블루 캐슬 대교북스캔 클래식 7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오현수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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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밸런시’는 노처녀 소리를 듣는 29세의 미혼 여성이다. 외모도 별로다. 사교술도 없다. 교육의 기회도, 직업을 갖고 돈을 벌 기회도 변변치 않아 제대로 된 결혼만이 여성들이 살 길이었던 당시(1920년대), 교양과 체면, 관습과 형식에 목숨을 거는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선 으레 집안의 평판을 깎아먹는 ‘빙충이’ 취급을 면치 못한다.
연애 경험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아니다. 어느 정도냐면 예를 들어, 댄스파티에서 남자들에게 춤 신청을 받지 못해 언제나 ‘벽의 꽃(wallflower)’ 신세다. 하지만 말이 좋지, 아무도 밸런시를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밸런시에겐 탈출구가 있다. 상상의 장소 ‘블루 캐슬’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황후이고 공주다. 자유와 행복을 만끽한다.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드디어 제 삶의 꽃을 피운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과 마주해야 한다. 숨 막히고 희망 없는 삶도 삶인지라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타고난 약한 몸으로 건강에 이상을 느낀 밸런시는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그녀에게 협심증과 동맥류를 진단하면서 1년의 시한부를 선고한다. 밸런시는 죽음이 두려웠을까. 희망이나 낙관 따위 찌꺼기도 남지 않은 삶인데 그럴 리가. 그 사건은 슬픔을 요구하기보다 밸런시를 각성시킨다. 그녀는 남은 생애를 자유롭게, 알차게 보내기로 작정한다.

주인공 밸런시는 작가의 대표작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의 주인공 ‘앤 셜리’의 후손이다. 이 작품이 ‘빨강머리 앤’보다 16년 후에 출간됐으니 그 영향을 받은 건 가능해 보인다. 그런 탓에 초반부에 드는 기시감은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밸런시가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고 말대답을 하고 일상의 루틴을 가차없이 깨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반전된다. 이야기는 독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면서 ‘의외의 방향’으로 물머리를 돌린다.

작품 속 세계에서 밸런시는 반목의 아이콘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시선, 관습, 의무에 저항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탕녀, 광인으로 취급한다. 그런 평판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건 죽음을 각오한 자의 순수한 용기 덕분이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 얼마 남지 않은 (끝이 보이는) 삶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나 자신으로’ 사는 것. 100년 후의 우리들에게도 꽤 솔깃한 욕구다.

로맨스+코미디를 주된 기둥으로 한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를 가둔 틀을 깰 때 가능하다. 지금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건 과연 어떤 요소들일까,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가식의 허울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겐 그 껍질을 벗을 힘과 용기가 과연 있을까.

밸런시의 결말은 참으로 장르다운 면모를 빠짐없이 갖춘다. 사랑과 돈, 그리고 용감하고 슬기로운 여성이라는 명예까지. 이런 결말을 두고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말들을 할까. 요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밸런시는 과연 행복한(바람직한) 결말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밸런시의 앞날을 두고 설왕설래하기 전에, 제발 1920년대의 사정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용기와 지혜, 친절함과 배려심까지 갖춘 여자가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것을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손에 넣는 게 어리석고 멍청한, 남자에게 길들여지는 일이라면, 그저 코 한 번 찡긋 하며 웃어주면 된다. 그 이상은 낭비다.

사족

전체적으로 영화 ≪Last Holiday≫와 유사점이 많다. 1950년 오리지널은 보기 어렵고, ‘퀸 라티파(Queen Latifah)’ 주연으로 리메이크한 2006년의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같이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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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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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의 ‘기하’는 아빠와 둘이 산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는 오래전에 암으로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새엄마를 데리고 들어오고 졸지에 아홉 살 아래의 동생 ‘재하’가 생긴다. 기하는 갑작스런 새엄마도 당황스러운데 생전 처음 해보는 형 노릇에 질색한다. 기하는 새엄마에게도 재하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흔히 아는 ‘정식의 절차’가 없었더라도 기하는 새엄마와 재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 ‘중2병’을 앓을 나이는 이미 지났고 이듬해면 성인인데 저리 옹졸한 태도는 대체 왜지? 엄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도 아니고 아빠에 대한 배반감? 아니면 가족의 울타리 안에 선뜻 발을 들인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

위에 적은 것들 모두 해당될 테지만 작가는 기하가 어떤 마음인지보다 보이는 것, 행동과 태도에 집중한다. 전체적으로 인물에 대한 여백이 많은 작품이다. 설명이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한데 독자들이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약간 뻔해서 심심하다.

인물들의 권력 관계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두 집 모두 편부, 편모의 가정이다. 두 집 모두 아들 하나씩 있고, 두 집 모두 수입이 있다. 사진관 사장과 학습지 교사 중 누가 수입이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재하 엄마가 기하 아빠에게 경제력을 완전 의지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재하네는 기하네로부터 ‘받아들여져야’ 하고 기하는 그들을 거부한다.

평등해 보이는 조건에서도 권력이 기운다. 기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여자는 받아들여져야 하고 남자는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재하의 엄마는 이혼녀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 폭력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바늘방석이다. 여자는 폭력적이지 않고 착하고 성실한 남자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젊지만 유용하고 막강한 무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래서 외롭게 남는 쪽은 ‘기하’처럼 보인다.
어차피 두 가족은 ‘중국 냉면의 육수에 잘 풀어지지 않는 땅콩소스’처럼, 서로 융화될 가망이 별로 없었다. ‘어느 쪽이든 괜찮은, (토마토가) 과일이든 채소든 상관없는(26쪽)’ 재하와는 달리, 기하는 친절하지 못하고 배려 없었던 제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이 작품이 극히 일부의 독자들로부터 ‘남성중심적인 이성애자 사회의 남성 구원 서사’라는 원망을 듣는다면, 그 구원은 실패했다고 말해야 한다.

인물들이 모두 착하다. 악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다. 새엄마는 기하의 인정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재하는 그런 엄마가 약간 과하다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기하의 아빠 또한 친절하기 짝이 없고 기하의 행동도 악하다고는 볼 수 없다. 철이 없다고나 할까. 기하가 하는 양을 보면 찬바람이 휙휙 불다가 뒤돌아서 곱씹고 후회하는, 그런 유형이다. 유일한 ‘빌런’이 한 명 등장하는데(재하의 친부), 이 사람의 쓰임새 역시 전형적이다. ‘양아치’의 습성을 빠짐없이 갖춘, 결국엔 어렵게 맺어진 사람들의 여전한 노력들을 무용하게 만들어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설정이나 인물, 이야기의 얼개 등이 새롭지도 않고 짜임새가 그리 조밀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고루한 인상을 주는데,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거의 재활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엔 개성이 있다.

낡은 소재들이지만 포장은 새롭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현실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결말을 그린다. 할 만한 행동들엔 부연이 필요 없다. 선뜻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납득은 된다. 생략과 비약은 작가 나름의 계산이었던 것 같다. 작가는 큰 노력 없이 세련된 맵시를 부린다.

작품 전체를 꿰뚫는 소재로 ‘사진’이라는 작가의 선택은 적절해 보인다(기하 아버지의 직업이 괜히 사진관 운영이 아니었다). 소재 이상의 장치로 보인다.
사진은 시간을 ‘박제’한다. 시간은 정지하고 진실은 봉인된다. 박제된 순간은 사진을 마주함으로서 반복된다. 사진으로서 과거는 현재로 소환되고 환기(喚起)된다. 마법이 비로소 풀린다. 과거의 의미가 비로소 부여된다. 훗날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자신이 ‘두고 온 것’을 생각한다.

작품은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과거엔 만족보다 후회나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난날엔 항상 미련이라는 긴 그림자가 남기 마련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하는 걸 오만이라고 느끼기 쉽다.
그럼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과거가 있음에도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프랙탈(fractal) 패턴’은 우리 삶에도 보인다(편혜영 작품의 리뷰에서도 이 비유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과 변화는 요원한 듯 보인다.
작가가 그런 점을 의식했을까. 작품에서 ‘반복’이라는 장치가 거듭 보인다. ‘19세의 기하-10세의 재하-중년 기하-청년 재하’로 이어지는 구성(화자의 교차와 반복), 거듭 등장하는 ‘사진’이라는 소재, 그리고 반복되는 장소(인릉).

15년이 흐르고 재회한 기하와 재하는 과거에서 비롯된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 누군가는 사과하고 누군가는 용서하고, 한때 형제였던 두 사람이 진짜 형제가 되는 시작점에 선 두 사람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났더라면. 하지만 삶이 어디 그런가. 두 사람은 어른이 됐고 살 만큼 살았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고 여러 형태의 좌절도 겪었다. 두 사람은 의미 있는 변화를 겪으며 삶을 통과했지만 지향점이 서로를 향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가족사를 소재로 작가는 ‘진짜 삶’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에 발을 디딘, 꽤 단단한 느낌을 준다. 슬프지만 전형적인 슬픔과는 결이 다른 정서가 꽤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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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
캐트리오나 워드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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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화자가 교대로 등장한다. ‘테드 배너먼’, ‘로런’, ‘올리비아’, 그리고 ‘디디(딜리일러)’, 기타 등등.

외딴 집에 직업도 없이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는 테디는 어떤 일에든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에 힘들어 보이고, 어린 딸 로런과 함께 올리비아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안 되는 이웃들은 테디의 딸과 고양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옆, 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다. 11년 전, 가까운 캠핑장 호숫가에서 사라진 ‘막대아이스크림을 든 소녀’의 언니인 디디는 동생의 행방과 실종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좇고 있다.

처음 몇 장(章), 대략 60쪽을 지나면 다양한 화자들이 실제로는 한 인물임을 의식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질문한다. 작가가 지금 ‘다중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이거 혹시 스포일러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틀리다’는 말이 왠지 공정하지 않게 들리는데 이야기는 시종일관 다중인격(책에서는 ‘해리성정체감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에 시달리는 남자 얘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학대’와 그 파괴적인 영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DID가 소설에서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보자면 이 증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학대에서 살아남고, 이 증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선(善)을 위해 분투한다.(512쪽)❞

작가의 이런 의도, 증상에 대한 이해, 오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 책의 내용이고 목적이고 그 전부다.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암울한 정서는 공포라기보다 외로움에 가깝다. 테디의 비밀스러운 삶은 충분히 의뭉스럽지만 그 속을 알고 나면 그런 시선이 단지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다. 룰루의 실종과 테디의 이야기는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를 이룬다. 테디를 의심하고 괴물로 인식했던 디디는 스스로가 괴물이 된다. 한 사람의 오해는 무시되거나 설득의 여지가 있지만 대중의 오해는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이 작품은 범죄와 비밀, 거짓말과 두려움, 공포와 혼돈으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 ‘선의(善意)’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들인 노력은 작가란 직업이 앉아서 얻어먹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읽고 조사하고 쓰는 육체적인 노동은 물론이고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꾸준히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탐색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난한 길이다. 이 작품이 주는 정서적인 충격은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면 더 큰 울림을 남긴다. 평소에 책 말미에 실리는 ‘작가의 말’ 따위 왜 필요한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작가의 말이라면 꼭 필요하고 읽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 공간은 ‘작품(이야기)뿐, 그 이상은 안 돼’라는 고집에 약간 여유를 두기로 한다.

시작과 더불어 1/4 분량은 몰입이 약간 어렵다. 한 명이면서 여러 명인 목소리가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들을 동시에 떠들어대는 통에 눈도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가면 이야기에 빨려들 듯 흡수되는데 그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환상 속 자아들이 쏟아내는 초현실적 이야기, 이미지들엔 장단점이 있다. 충분히 흥미로운 반면 인물의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500쪽 넘게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야기 전체에 대한 실제적이고 실속 있는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독특하다. 마치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는 느낌, 혹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느낌이랄까. 이런 장르의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요소다.

사족

원제는 ≪The Last House on Needless Street≫.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72년 영화, ≪The Last House on the Left≫를 생각나게 하는데, 내용은 크게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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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따는 사람들 서사원 영미 소설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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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여름.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농작물 수확을 돕는 북미 원주민 가족. 집안의 네 살짜리 딸, ‘루시’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남은 가족들은 루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생업을 놓칠 수가 없다.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일의 특성으로 가족은 막내딸이 사라진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다. 루시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본, 두 살 위의 오빠 ‘조’는 여동생의 실종에 대한 부채를 평생 지고 산다.

한편, 미국의 다른 지역. ‘노마’라는 여자아이는 뭔지 모를 꿈에 시달린다. 평범한 꿈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한 그 꿈은 너무나 생생해 차라리 현실 같다. 거의 과보호에 가까운 엄마의 양육 방식은 성장하는 노마에게 덫처럼 여겨지고 부모와 다른 피부색, 유전학적으로 달리 생긴 귀의 생김, 과거의 화재로 모조리 타버렸다는 사진들을 지하실에서 발견하면서 노마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노마가 루시라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고 백인 부부가 원주민 아이를 키우는 데에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야기엔 비밀은 있으나 반전은 없고 악당도 존재하나 응징이나 복수 같은 건 없다. 슬픔과 고통, 분노로 시작한 이야기는 오히려 사랑과 용서, 빛나는 인간애와 (요즘은 구시대적인 사고로 폄하되는) 가족의 가치로 충만한 결말을 맞는다. 전통적인 가족상 무너뜨리기, 가족 해체 등에 열심인 요즘의 한국 소설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막힘없는 진행에 감정은 진솔하고 억눌려 터져나오는 슬픔과 분노는 생생하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인상적인데, 화자로 번갈아 나서는 조와 루시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루시의 실종과 형 ‘찰리’의 죽음 이후 조가 겪는 불행은 작중 인물의 말처럼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동시에 조는 자신이 타인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불행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평생 트라우마처럼 지고 있는 조는 행복해질 수 없는 캐릭터다. 어둡고 불안하고 항상 제 그림자에 쫓기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사람이다.
루시는 화해와 용서의 아이콘이다. 작중 최대 빌런인 ‘레노아-프랭크’ 부부가 자신에게 한 일을 알고 나서도 아주 잠깐 원망하는 데 그친다. 그들을 탓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있겠으나, 이미 일어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루시는 자신을 유괴하고 키워준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그들 역시 자신의 다른 부모로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가족들을 온 힘으로 사랑한다. 거짓의 토양에서 비밀을 양분으로 탐스럽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루시는 이 작품의 진정한 히로인이다.

이야기의 원형만 떼어놓고 보면 TV 일일극 설정에 어울릴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유괴된 아이, 뒤바뀐 부모,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 탕아, 결혼과 장례식, 출생과 죽음. 이런 소재로 작가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은 마치 물처럼 흐른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신파라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으며 인물을 비판하거나 독자에게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인물 각자의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일구고 살아내는 모습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그저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건 작가와 이야기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이다. 독자들은 자신이 본 것들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세상을, 삶을 통과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세상은 사랑으로만 충만한 게 아니고 그렇다고 증오와 미움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 용서, 화해 같은 좋은 것들이 아주 조금 더 많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놀랍다. 이다지도 강렬한 첫 소설이라니. 그 다음 작품은 얼마나 부담이 될까, 걱정도 든다.
작가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미크마크 부족) 출신이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아버지가 줬다고 하는데, 처음에 기대했던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 동화 정책’에 관한 (정치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배경으로 잠깐 언급되는 정도다.
하지만 원주민의 땅을 빼앗은 백인들의 상징으로서, 루시를 백인 부부에게 빼앗긴 원주민 어머니의 눈물이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에게 딸, ‘페르세포네’를 빼앗긴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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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혹은 애슐리
김성중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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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중견이 된, 김성중의 작품집.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작품인 <레오니>에 나오는 가족은 마치 거대한 나무 같다. 가지들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서쪽으로 뻗은 가지를 마주할 수 없다. 병들어 시든 가지도 있고 파릇파릇하니 물기로 팽팽한 가지도 있다. 대부분, 그럭저럭 건강하니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나무다.
먼 과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게 보이고 애잔한 감상을 남긴다. 작가가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말하려 했을까. 작품집 첫 머리에 어울리는 대중적이고 가벼운 소품처럼 읽힌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무척 도발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는 ‘젠더’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출 것을 권하는 것 같다. 젠더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나’와 ‘너’의 상태로 존재하자는 이야기로 읽힌다.
젠더의 규정은 어쩌면 개인을 설명하고 타인으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한, 그저 누군가를 카테고리화하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육체를 가졌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케어봇인 ‘엔도’는 영생이 가능한 육체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젠더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아우르는 이슈이다. 그저 ‘나’로서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면 굳이 ‘내가 누구’라고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상속>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다. 희망과 절망이 어우러진 분위기(재능이 삶을 낫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삶 쪽에서는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중략) 이런 재능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181쪽))에 죽음을 앞두고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책들을 타인에게 물려주려는 ‘기주’의 심정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어찌어찌 등단은 했으나 극심한 슬럼프로 자기 연민과 불행에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작가적 재능에 회의를 겪는 ‘진영’은, 재능은 있으나 운명이 허락하지 않는 기주와 선생님을 바라보며 껍질을 벗고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은 이야기를 짓고 글을 쓰는, 혹은 쓰려는 많은 이들을 위한 헌사로 읽힌다. 진영이 꾼, 항아리(숙성의 항아리, 슬럼프라는 껍질)가 깨지는(파편들, 미숙함, 깨짐으로서 나옴) 꿈은 그녀의 슬럼프가 이제 끝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징조가 아니었을까.

여러 동화를 패러디한 <마젤>은 (많은 동화나 설화에서 3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면)그 구조 역시 전형적인 동화다. (다소 관념적인) 불행을 겪고 있는 ‘그녀’는 안락한 곳을 떠나 세 번의 모험을 통해 세 명의 인물을 만나고 결국 스스로를 구하게 된다. 여행 중에 만난 동화 속 인물들은 주인공의 분신으로, ‘마젤’은 희망과 행복, 구원의 집합체로 보인다. 타인을 구원하는 건 결국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그 외에 중고 거래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지혜와 용기, 사랑, 세상을 읽는 방법의 경험치를 전해 듣는(열여덟의 결과물, 43쪽) 십대의 이야기인 <해마와 편도체>, 타인의 꿈을 지지하는 이야기인 <정상인>이 실려 있다.

나무라는 소재, 숲이라는 공간, 동화적인 분위기 등의 요소를 공유하는 두 작품, <나무사냥꾼 돈 사파테로의 모험>, <배꼽 입술, 무는 이빨>은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조차 어려워 언급을 생략한다.

개인적이고도 전체적인 감상으로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작품들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매우 좋았던 작품들과 읽는 게 고역이었던 작품들 사이에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존재하는, 작품들의 높낮이가 다양하다고 해야 하나. SF와 동화적 상상력은 작가의 초기 작품집에서부터 확인된 거였으니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건 의미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독자가 알아먹게는 써야지 않나, 싶다가도 그것도 작가의 스타일, 개성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이러다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글을, 의 의문과 생각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 그런 작품집이었다.

작가의 신작 (최초의) 장편이 SF 장르라던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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