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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따는 사람들 ㅣ 서사원 영미 소설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평점 :
1962년 여름.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농작물 수확을 돕는 북미 원주민 가족. 집안의 네 살짜리 딸, ‘루시’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남은 가족들은 루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생업을 놓칠 수가 없다.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일의 특성으로 가족은 막내딸이 사라진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다. 루시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본, 두 살 위의 오빠 ‘조’는 여동생의 실종에 대한 부채를 평생 지고 산다.
한편, 미국의 다른 지역. ‘노마’라는 여자아이는 뭔지 모를 꿈에 시달린다. 평범한 꿈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한 그 꿈은 너무나 생생해 차라리 현실 같다. 거의 과보호에 가까운 엄마의 양육 방식은 성장하는 노마에게 덫처럼 여겨지고 부모와 다른 피부색, 유전학적으로 달리 생긴 귀의 생김, 과거의 화재로 모조리 타버렸다는 사진들을 지하실에서 발견하면서 노마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노마가 루시라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고 백인 부부가 원주민 아이를 키우는 데에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야기엔 비밀은 있으나 반전은 없고 악당도 존재하나 응징이나 복수 같은 건 없다. 슬픔과 고통, 분노로 시작한 이야기는 오히려 사랑과 용서, 빛나는 인간애와 (요즘은 구시대적인 사고로 폄하되는) 가족의 가치로 충만한 결말을 맞는다. 전통적인 가족상 무너뜨리기, 가족 해체 등에 열심인 요즘의 한국 소설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막힘없는 진행에 감정은 진솔하고 억눌려 터져나오는 슬픔과 분노는 생생하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인상적인데, 화자로 번갈아 나서는 조와 루시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루시의 실종과 형 ‘찰리’의 죽음 이후 조가 겪는 불행은 작중 인물의 말처럼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동시에 조는 자신이 타인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불행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평생 트라우마처럼 지고 있는 조는 행복해질 수 없는 캐릭터다. 어둡고 불안하고 항상 제 그림자에 쫓기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사람이다.
루시는 화해와 용서의 아이콘이다. 작중 최대 빌런인 ‘레노아-프랭크’ 부부가 자신에게 한 일을 알고 나서도 아주 잠깐 원망하는 데 그친다. 그들을 탓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있겠으나, 이미 일어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루시는 자신을 유괴하고 키워준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그들 역시 자신의 다른 부모로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가족들을 온 힘으로 사랑한다. 거짓의 토양에서 비밀을 양분으로 탐스럽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루시는 이 작품의 진정한 히로인이다.
이야기의 원형만 떼어놓고 보면 TV 일일극 설정에 어울릴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유괴된 아이, 뒤바뀐 부모,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 탕아, 결혼과 장례식, 출생과 죽음. 이런 소재로 작가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은 마치 물처럼 흐른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신파라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으며 인물을 비판하거나 독자에게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인물 각자의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일구고 살아내는 모습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그저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건 작가와 이야기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이다. 독자들은 자신이 본 것들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세상을, 삶을 통과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세상은 사랑으로만 충만한 게 아니고 그렇다고 증오와 미움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 용서, 화해 같은 좋은 것들이 아주 조금 더 많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놀랍다. 이다지도 강렬한 첫 소설이라니. 그 다음 작품은 얼마나 부담이 될까, 걱정도 든다.
작가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미크마크 부족) 출신이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아버지가 줬다고 하는데, 처음에 기대했던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 동화 정책’에 관한 (정치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배경으로 잠깐 언급되는 정도다.
하지만 원주민의 땅을 빼앗은 백인들의 상징으로서, 루시를 백인 부부에게 빼앗긴 원주민 어머니의 눈물이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에게 딸, ‘페르세포네’를 빼앗긴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은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