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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 끝없는 밤
손보미 외 지음 / 북다 / 2024년 8월
평점 :
‘손보미’ 작가의 대상수상작과 자선작 한 편, 우수상을 받은 다른 작가의 다섯 작품, 그리고 작년 대상 수상자인 ‘안보윤’ 작가의 자선작 한 편, 모두 8편이 실려 있다. 구성이 알차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혹은 편집 앨범을 듣는 기분이랄까.
여러 작가들이 참여한 작품집을 읽는 것과 오로지 한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된 작품집을 읽는 것엔 차이가 있다. 여러 작가들을 만나는 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알기엔 한계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건 나와 다른 사상,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 경험하며 서로 다른 목적으로 내 밖에 존재하는 무수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수상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문지혁’의 단편과 ‘성해나’의 단편이다.
작가 자신의 해외 체류 경험이 독특하게 활용된 <허리케인 나이트>는 주제면에서 영화 ≪기생충≫과 ‘휴 월폴(Hugh Walpole)’의 단편 <은가면(the Silver Mask)>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가난하다고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고 부자라고 언제나 사악한 것은 아니다. 이런 편견은 예전 사회주의에서 그들의 프로파간다를 강화하기 위한 슬로건에 악용됐다.
우리의 편견에, 부유함은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악함’과 연관된다. 부유함은 권력이며 이 시대의 권력은 보통 편력으로 악용되리란, 반대로 솔직하고 선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리란(적어도 부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해 보인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인물과 이기적이고 꽤 자주 사악한 부자 인물의 대립 구도는 오늘날 대중 매체에서 흔히 사용하는 갈등 구조다.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인물이 돈 많고 성격 더럽고 사악한 것보다 가난하지만 밝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물이길 바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클리셰, 혹은 편향적 사고에 매스 미디어에 책임을 묻는 건 무의미하다. 이 작품은 인간 사고의 맹점을 드러내어 독자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혼모노>는 ‘자신 되기’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작가는 우리의 ‘무교(武校)’적 장치를 활용해 작품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평생 제 몸에 깃든 신(神) 덕에 잘 살아온 ‘나’는 신력(神力)이 쇠해지면서 위기를 겪는다. 어린 나이에 신통한 신력을 발휘하면서 이웃이 된 ‘신애기’의 등장은 그의 경쟁심을 부추긴다.
신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을 지운다는 것이다. 평생 몸주(-主)의 출구 역할을 하고 시종 노릇을 하며 개인적인 자유에도 일상적으로 제약을 받아온 주인공이 밥벌이를 잃는다는 건 ‘불행’일 테지만, 어쩌면 비로소 제 모습을 찾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건 ‘행’의 기회일 수도 있다. 신력이 사라진 몸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굿을 하는 나’의 엔딩은 기괴하고 민망하지만 거의 황홀경에 이른 자축연처럼 보인다.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283쪽)’이라는 문장은 진짜 내가 되기 위해 신의 하수인 노릇을 버려야 한다는 의식의 발로이다. 신애기를 향해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256쪽)’던 ‘나’의 조소는 엔딩에 이르면 가면을 쓰고 자신이 아닌 척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식을 비웃는다(265쪽).
<담담>과 <그 개와 혁명>은 (개인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했던 작품이었다.
‘안윤’ 작가는 긴 삶의 한 순간을 무작위로 포착한 듯 시종일관 제목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렇지만 감정은 깊고 인물들의 사고는 날카로우며 로맨틱한 관계를 내세우면서도 꾸준히 냉정하고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사실 작품 전체에 깃든 거리감은 작가가 아닌 인물들 탓이다. 그들은 이미 절절한 사랑을 경험했고 그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알면서도 다시 그걸 원한다. 왜? 아프면 다시 안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랑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앞에 섰을 때의 태도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불길 앞에 나방떼처럼 달려든 게 과거의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주는 온기와 편안한 안정감만으로 이들은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기대도 있고 상대방과 자신이 그릴 그림도 분명 있겠지만 이들은 함부로 요구하거나 예측하지 않는다.
두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반면 그 문장은 아주 뜨겁다. 이 작품이 내 감정을 자극한 건 그런 성숙한 사랑이 매우 요원하기 때문에,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위한’ 연륜을 아직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바탕 난장판을 그린 <그 개와 혁명>은 아버지처럼 혁명을 도모한 딸의 이야기다.
남자 형제가 없음으로 사촌 형제를 상주로 세우자는 할머니의 말을 거스르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장에 애견을 데려옴으로, 화자는 과거 운동권이었던 부모의 궤적을 따른다.
부모 세대의 혁명(운동)이 소위 ‘대의’를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이 작품 속 수민의 혁명은 어떨까. 오직 남성이 상주 자격이 있다는 ‘관습’에 반기를 들고, 장례식장에 동물을 데려올 수 없다는 암묵적인(비성문화된) 법칙을 깨는 것 역시 넓게 보면 정치적인 일임을(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350쪽), 아버지를 사랑했던 수민이 그의 유언을 따르고 뜻을 받드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소소한 일상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 슬픔이란 감정의 정체(나의 슬픔은 나에 대한 것인가 고인에 대한 것인가), 애도의 방법(이 애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등, 죽음 전반에 걸친 고찰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곧잘 슬픔과 연민을 착각한다. 그리고 순수한 슬픔과 후회, 미련 같은 감정을 혼동한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남긴 게 순수한 슬픔이라면 언젠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미련과 후회 같은 감정이 섞여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란 좀처럼 어렵다. 엄청난 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련과 후회를 내려놓으려면, 당시의 나를 용서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사람들이 슬픔을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이유가 대부분 이것 때문인 듯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다. 인색할 정도로 그런 것 같다.
결국 내가 가여워 운다. 나를 애도하고 나를 걱정한다. 순수한 슬픔이 아니다. 2년 전,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의 슬픔(지금도 여전한)을 생각하면 그렇다. 난 어머니를 떠나보냈으면서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에도, 나 자신을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작년 수상자인 ‘안보윤’ 작가의 <그 날의 정모>는 자폐의, 혹은 정신적으로 허약한 아들을 둔 가정의 고단함을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꽤 가혹해 보이는데 서투른 위로조차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란 대책 없는 희망을 주는 대신 작가가 취하는 태도는 대체로 ‘가차 없음’이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대책 없는 위로나 근거 없는 희망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쉽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가차 없는 현실을 마주하도록 돕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다. 약효는 한정적이지만 고통은 지속적이다. 고통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게 잔인한 것처럼 보여도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것 같다.
이야기의 최대 ‘빌런’으로 등장하는 할머니는 화자(정모의 미성년자 누나)에게 ‘정모한테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네 년 말년이 나보다 나을 것 같느냐(384쪽)’고, 그들 가족을 지탱해주는 건 ‘가당찮은 가족애(383쪽)’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저주처럼 들리지만 솔직한 사실이다. 정모의 상태가 말끔히 나아질 일은 없을 테고 그의 평생, 누군가, 아마도 가족, 그것도 부모, 아니면(그들이 죽고 나면) 형제가 그 곁을 지키고 온 시간을 돌봄 노동에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가족애’라는 건 그들이 잃지 말아야 할 귀중한 가치이다. 그 동아줄마저 없으면 그들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것이 아직 건재함을 인정한 할머니의 말은 위로로 여길 만하다. ‘사랑’이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농담처럼 들릴지언정 그건 진실을 품는다고 믿는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는 제목처럼 노골적인 주제의식이 흐른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어딘지 강요하는 듯한, 선뜻 동의할 수 없어 감정적으로 반문만 하게 된, 그런 작품이었다. 작가의 작품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감상이 되살아났는데, ‘좋아하지 않음’과 ‘혐오’를 같은 맥락에서 다루려는 작가의 태도를, 나로서는 쉽게 긍정할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천착하는 작가의 고집은 가치 있지만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요령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기를 푸는 솜씨는 전작들보다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대상작인 ‘손보미’ 작가의 <끝없는 밤>과 작가의 자선작 <천생연분>은 아무리 읽어도 의미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두 작품 모두, 현재의 어떤 사건 와중에 과거 기억의 실마리를 데려오는 구성이었는데, 이런 저런 사건들만 많을 뿐, 과거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현 상황에도 많은 일이 긴박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우선 첫째로 내가 고급 독자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그 다음으로 작가 탓을 하게 됐는데, 탓이라기 보다, 아, 이 작가는 내 스타일이 아니구나, 이 단편들을 다시 읽거나, 다른 작품을 찾게 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슬픈 예감을 갖게 된 정도랄까.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두 작품을 다시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굳이, 억지로, 다른 읽을 책도 쌓여 있고, 다른 궁금한 작가들이 많으므로 보류하기로 했다. 보류라기 보다 포기에 가깝지만. 이 리뷰에 정작 대상수상작가의 작품을 다루지 않은 건 아무래도 찝찝한 일이다. 책에 죄를 지은 느낌이랄까, 뭐 싸고 안 닦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도가 꽤 높았던 책이었다. 여기서 처음 만난 문지혁, 안윤, 예소연 작가들은 더 궁금해서 다른 작품들을 준비해 놓았다(문지혁의 장편 ≪P의 도시≫, 안윤의 작품집 ≪방어가 제철≫, 예소연의 작품집 ≪사랑과 결함≫).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지만.
성해나와 안보윤 작가는 예전에 꽤 좋게 읽었었고. 특히 성해나의 작품집 ≪빛을 걷으면 빛≫은 아주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내공이 느껴졌달까.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안보윤 작가는 단편집(≪밤은 내가 가질게https://soulflower71.tistory.com/536≫)은 좋았으나 장편(≪밤의 행방https://soulflower71.tistory.com/541≫)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런 식으로 독서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힌트를 준다는 것. 이게 바로 이런 수상집의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