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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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좋고
작가의 ‘말빨’도 좋으나
절반의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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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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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스포일러)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미래 지구 위의 어느 국가. 상위 1지구는 엘리트, 고위 관직들의 거주 지역으로 이를 테면 부촌이다. 1에서 멀어질수록 가난하고 폭력이 빈번하고 치안은 엉망이다. 오래 전, 가난과 불평등을 빌미로 최하위 구역인 9지구를 중심으로 사회를 전복하려는 시도(12월 혁명)가 있었지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탓에 9지구는 현재 ‘후디’로 상징되는 범죄의 소굴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엔 약간의 오해가 있다.

1지구에 살며 아무나 못 들어가는 기숙학교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십대 ‘다윈 영’. 부친 ‘니스 영’은 현재 교육부 차관으로 차기 대통령을 노리고 있고, 조부인 ‘러너 영’은 부자 사업가다.
이들 주변으로 많은 인물들이 배치된다. 니스 영의 친구이면서 오래 전에 살해당한 ‘제이 헌터’, 그의 동생 ‘조이’. 그의 딸이면서 여학교로선 명문이지만 프라임스쿨엔 한참 못 미치는 ‘프리메라 스쿨’에 다니는 ‘루미’. 루미가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는 왕년에 아주 유명한 사진작가였는데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그리고 니스 영과 죽은 제이 헌터의 친구인 ‘버즈 마샬’은 성공한 다큐 감독이고 그의 아들 ‘레오’는 프라임 스쿨의 반항아이다. 이 아이는 나중에 다윈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니스 영은 오래 전에 살해당한 제이 헌터의 추도식에 30년째 참석 중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추도식에 갈 마땅한 이유는 없으나 다윈은 매년 아빠와 동행한다.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그 집의 루미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 드디어 바라던 기회가 오고 다윈은 루미와 말을 트는데 루미는 얼굴도 모르는 삼촌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다. 과거에 알려진 대로 제이 헌터의 살인은 단순 강도 사건이 아니라는 것. 다윈과 루미는 30년도 더 지난 사건 조사에 착수하기로 의기투합한다.

***

SF적인 무대는 장단점이 있다. 지구 별로 구획되어 있는 사회는 계급의 상징이다. 정책적으로 편견과 몰이해를 방관하고 있다. 실제로 9지구를 처음 다녀온 다윈과 루미는 그곳의 실제 모습이 자신들이 듣고 믿어온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의 시스템은 서로를 격리하고 고립한다. 오해를 종용하고 묵인한다. 계급 간의 몰이해는 대립과 증오로 이어지고 결국 폭력을 낳는다. 사회, 혹은 국가가 그것을 바라는가? 현재의 우리와 많이 겹친다.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가 은근히 익숙하다.

반면 미래의 한국인가 싶었는데 인물들 이름이 죄다 영어다. 하나의 언어를 매개로 지구상에 하나로 존재하는, 통합된 신생국가인가 했는데 어딘가에서 ‘다른 나라’를 언급한다. 그럼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지구 위는 맞나?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설정은 아닐지라도 이런 무국적성, 배경의 모호함은 작품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미래의, 가공의 무대라도 작가는 ‘그 공간’의 개념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각인시키고 납득시켜야 한다. 잘 보면 이야기 자체도 구체성이 모자란다.

작가는 작품에서 많은 것을 시도한다. 일단 형식적으로 이 작품은 SF, 미스터리, 성장드라마, 캐릭터드라마를 넘나든다. 주제적으로는 사회적인 이슈와 개인적인 이슈를 모두 건드리는데, 가장 삐거덕거리는 부분은 이 지점에서 나온다.

작가는 초중반을 거치며 많은 분량을 할애해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려고 한다. 특정 계급의 특권의식을 강화하고 계급 간 위화감을 장려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이 일단 그렇다. 정부의 교육 관련 요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이사진에 포함된 학교에 아들이 학생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자부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편견에 지배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며 자신의 자만심을 채우려는 루미의 캐릭터도 그렇다. 모두 사회를 비판하기(조롱하기) 위한 재료들로 읽힌다.
하지만 플롯의 초점이 ‘제이 헌터의 죽음’에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는 12월 폭동과 연결되어 있고, 한 개인의 동기, 누군가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게 되는데 사실 폭동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이런 내용이 소설 후반부에 집약되어 있다.

사회에서 개인으로, 거시적인 시선에서 미시적인 대상으로 옮겨가는 건 사회학자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회파’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흔히 쓰는 논법(작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후반부로 갈수록 (여태 공을 들인) 사회적인 이슈들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사회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의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사회 시스템의 기능과는 별개의 문제다. 굳이 저런 사회가 아니어도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언제 어디서나 작동한다. 살인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전후반부가 긴박하게 연결되어 큰 의미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실패했다. 따로 노는 전후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에 ‘악의 기원’이라는 말이 있고 이야기 전체의 흐름도 한 인물이 ‘흑화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니 작가가 ‘악’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악의 근원은 사회(환경)에 있다고? 아니면 개인에게? 인간의 악, 범죄성을 연구하는 무수한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오랜 시간 논의해 왔어도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은 주제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여전히 설왕설래 중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중요한 건, 인간의 악, 악마성, 악한 행동은 어디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작가 ‘박지리’의 생각(의견)이다.
작가는 결론을 뭉뚱그리며 살짝 피해간다. ‘악의 유전’, DNA에 새겨진 악의 근성 정도로 요약되는 결말이라면 사회의 모순에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다. 다소 생뚱맞은 결론에 산만하고 장황함이 부각된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다윈’의 심리 변화는 작위적이고 클라이맥스의 행동은 동기가 부실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저렇게까지?).

전체적으로 용두사미 같은 느낌이랄까.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갔달까.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작가가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과욕이다. 그 예로 분량이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나 싶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서 간결하고 타이트하게 구성했더라면 오히려 효과적이었을 수도. 게다가 한 얘기 또 하고 보여준 거 또 보여주고, 이런 부분들이 많다.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어떨까. 범죄 구성이 엉성하다. 그저 ‘이래서 이랬다’, ‘저래서 그랬다’, 정도의 동기와 결과만 갖고 구상만 한 것 같다.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번갯불이 콩 구워먹듯 후딱 해치워버리니 감흥이 없다. 육하원칙 아래 작성된 신문기사가 이런 느낌일까. 범죄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으니 그냥 이야기의 빈틈을 채우는 구성물처럼 보여, 진상이 밝혀진 후에도 독자로서 정서의 파장이 별로 없다.
방법적인 건 어떨까. 이 작품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과정이 나오기는 하는데 무용하다.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은 거의 우연에 의존한다. 단서라고 나오는 것들이 설득력이 없다. 목걸이나 얼굴의 점을 사진 속에서 식별한다는 건 TV 일일극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다. 무엇보다 다윈은 녹음테이프를 레오에게 왜 재생시키라고 했을까. 위험한 거 뻔히 알면서. 작가에게 너무 편한 일이다.

인물들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역할도 식상하다. 도화지처럼 순백의 아이, 영리하지만 반항기 가득한 아이. 거기에 새침 떨고 자존심 센 여자아이. 어른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캐릭터 성을 갖춘 건 루미가 유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할머니의 캐릭터들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루미 외에 의미있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다소 거슬린다. 작가의 선택이겠지만 이야기의 생동감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한다.

***

전체적인 느낌이, 장독 뚜껑을 너무 일찍 연 것 같다. 덜 삭힌 젓갈 같다. 작가가 조금 더 고민하고 다듬고 아이디어를 숙성시킬 시간을 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디어도 좋고 가능성은 확실히 있어 보이니, 조금만 더 공을 들였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듯 싶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작가에게 개정을 위해 작품을 수정할 기회는 없을 테고.

그럼에도 작가의 좋은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읽어본 한국작가들 중, 소위 ‘글빨’이 아니라 ‘말빨’이 좋은 작가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멋 부리는, 아름다운 문장’보다 ‘적확한 문장’, ‘친절하고 설득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난 그런 문장이 더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을 많은 독자들이 좋아한다. 뮤지컬로도 제작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면 성공작이다 싶다. 구성이 복잡하고 장황해서 각색 과정이 수월치는 않았겠지만.

늦게나마 삼가 박지리 작가의 명복을 빈다. 작가의 새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건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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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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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좋은(잘 쓰인) 소설이 해내는 일은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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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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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얕고 얇은 나의 지식으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중동 어디쯤에 위치한 나라였다. 파키스탄과 이란, 과거 소련(지금은 독립한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반은 맞다. 중국과도 살짝 맞닿아 있는데 다른 얘기지만 중국 땅이 진짜 넓긴 하다.
무식한 것 이상으로, 무지를 기반으로 한 편견도 있었다. 탈레반의 근거지이고 폭탄 테러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만약 그런게 가능하다면) 악의 축. 위험하고 무서운 이슬람. 이것도 반만 맞다. 이런 불명예는 주로 탈레반이라는 집단이 하는 짓이고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착취한 사람들이다.

이 책의 작가인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는 여기 수도 ‘카불’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데, 아마도 자신의 고향, 과거에 만신창이였고 지금도 만신창이인 자국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예전에 영화로 본, 그 영화의 원전이 된 데뷔작이자 이 작품 전작인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 역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니, 이 작품 이후의 다른 작품들 역시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러리란 예상이 쉽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고국을 떠난 한 개인으로서 자국에서 일어난,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비극과 불합리와 폭력을 세계에 고발하는 의무를 지는 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쉬운, 매우 당연한 선택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국에 정착하여 소설을 발표하는 작가들을 보면 떠나온 곳에 대한 역사와 향수를 재료삼아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출신과는 별개로 완전히 현지화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제2의 고향의 구미에 맞는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으니까. 그건 그저 작가의 선택이다. 자국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천차만별일 테니까. 우리에게도 (망명한 경우는 아니지만) ‘현기영’ 같은 작가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한강’ 작가 역시 ≪소년이 온다≫ 같은 작품만 발표한 게 아니니까. ‘전후 문학’이란 게 카테고리 이상의 큰 의미를 갖지 않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거대하고 참혹한 비극을 자진해서 마주한다는 건 실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진정한 용기다.

작가 역시 고향의 거대하고 참혹한 비극을 마주한다. 그것을 배경으로 평범한 두 여자, ‘미리암’과 ‘라일라’를 전면에 내세운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보다 두 여자의 삶에 천착하는데, 그들이 겪고 그들에게 닥치는 일이 곧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다. 독자들은 두 여자의 삶을 통해 한 나라에 닥친 가난과 폭력, 억압과 차별을 경험한다. 특히 여성으로서 두 인물이 받아야 하는 폭압은 개인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능가한다. 비극 속에서 여성들의 삶은 더 가혹했다. 악몽 같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두 여자는 연대한다. 그럼에도 고난은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쉴 새 없이 닥친다. 와중에 웃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은 천상의 선물 같다. 휘청대는 운명에 눈물 흘릴 겨를이 없는 건 독자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진실을 담는다. 진실을 담는다는 그릇이기에 소설은 ‘사실’을 재료 삼는다. 하지만 그 ‘사실’만을 드러냈다면 소설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갖추기 어렵다. 방법을 아는 작가들은 사실보다 허구를 부각시킨다. 허구가 독자들의 의식을 사로잡을 때 사실은 무의식을 자극한다. 은밀하고 꾸준하게. 그리고 확실히.
작가의 진짜 의도는 ‘사실’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게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면 촌스럽고 서툴고 지루해 보인다.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금 허구(거짓말)로 이루어진(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하지만 동시에 배후에 숨겨진 사실(진실)을 눈치 채게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의 ‘핵’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제 할 일을 무척 잘 해냈다. 이야기에 빠져 감정이 휘몰아치는 사이, 순식간에 읽었다. 위에서 인정했듯이 모종의 편견으로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책인데 친구의 추천으로 읽었다(책을 사주진 않더라). 작품에선 탈레반이 물러나고 그나마 평화가 찾아오는 걸로 끝나지만, 몇 년 전 탈레반이 다시 집권했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나서 아연실색하게 된다.
비극은 여전하다. 지옥 같은 삶도 여전할 거다. 눈곱만큼 변한 게 있다면 바로 나 자신. 그토록 완고했던 편견이 흔들리고 그것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는 거다. 난민에 대해서도 실낱같지만 관심을 갖게 됐다는 사실. 이런 게 바로 독서의 힘, 한 편의 소설이 해내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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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 끝없는 밤
손보미 외 지음 / 북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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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작가의 대상수상작과 자선작 한 편, 우수상을 받은 다른 작가의 다섯 작품, 그리고 작년 대상 수상자인 ‘안보윤’ 작가의 자선작 한 편, 모두 8편이 실려 있다. 구성이 알차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혹은 편집 앨범을 듣는 기분이랄까.
여러 작가들이 참여한 작품집을 읽는 것과 오로지 한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된 작품집을 읽는 것엔 차이가 있다. 여러 작가들을 만나는 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알기엔 한계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건 나와 다른 사상,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 경험하며 서로 다른 목적으로 내 밖에 존재하는 무수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수상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문지혁’의 단편과 ‘성해나’의 단편이다.

작가 자신의 해외 체류 경험이 독특하게 활용된 <허리케인 나이트>는 주제면에서 영화 ≪기생충≫과 ‘휴 월폴(Hugh Walpole)’의 단편 <은가면(the Silver Mask)>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가난하다고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고 부자라고 언제나 사악한 것은 아니다. 이런 편견은 예전 사회주의에서 그들의 프로파간다를 강화하기 위한 슬로건에 악용됐다.
우리의 편견에, 부유함은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악함’과 연관된다. 부유함은 권력이며 이 시대의 권력은 보통 편력으로 악용되리란, 반대로 솔직하고 선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리란(적어도 부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해 보인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인물과 이기적이고 꽤 자주 사악한 부자 인물의 대립 구도는 오늘날 대중 매체에서 흔히 사용하는 갈등 구조다.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인물이 돈 많고 성격 더럽고 사악한 것보다 가난하지만 밝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물이길 바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클리셰, 혹은 편향적 사고에 매스 미디어에 책임을 묻는 건 무의미하다. 이 작품은 인간 사고의 맹점을 드러내어 독자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혼모노>는 ‘자신 되기’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작가는 우리의 ‘무교(武校)’적 장치를 활용해 작품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평생 제 몸에 깃든 신(神) 덕에 잘 살아온 ‘나’는 신력(神力)이 쇠해지면서 위기를 겪는다. 어린 나이에 신통한 신력을 발휘하면서 이웃이 된 ‘신애기’의 등장은 그의 경쟁심을 부추긴다.
신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을 지운다는 것이다. 평생 몸주(-主)의 출구 역할을 하고 시종 노릇을 하며 개인적인 자유에도 일상적으로 제약을 받아온 주인공이 밥벌이를 잃는다는 건 ‘불행’일 테지만, 어쩌면 비로소 제 모습을 찾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건 ‘행’의 기회일 수도 있다. 신력이 사라진 몸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굿을 하는 나’의 엔딩은 기괴하고 민망하지만 거의 황홀경에 이른 자축연처럼 보인다.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283쪽)’이라는 문장은 진짜 내가 되기 위해 신의 하수인 노릇을 버려야 한다는 의식의 발로이다. 신애기를 향해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256쪽)’던 ‘나’의 조소는 엔딩에 이르면 가면을 쓰고 자신이 아닌 척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식을 비웃는다(265쪽).

<담담>과 <그 개와 혁명>은 (개인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했던 작품이었다.

‘안윤’ 작가는 긴 삶의 한 순간을 무작위로 포착한 듯 시종일관 제목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렇지만 감정은 깊고 인물들의 사고는 날카로우며 로맨틱한 관계를 내세우면서도 꾸준히 냉정하고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사실 작품 전체에 깃든 거리감은 작가가 아닌 인물들 탓이다. 그들은 이미 절절한 사랑을 경험했고 그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알면서도 다시 그걸 원한다. 왜? 아프면 다시 안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랑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앞에 섰을 때의 태도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불길 앞에 나방떼처럼 달려든 게 과거의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주는 온기와 편안한 안정감만으로 이들은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기대도 있고 상대방과 자신이 그릴 그림도 분명 있겠지만 이들은 함부로 요구하거나 예측하지 않는다.
두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반면 그 문장은 아주 뜨겁다. 이 작품이 내 감정을 자극한 건 그런 성숙한 사랑이 매우 요원하기 때문에,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위한’ 연륜을 아직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바탕 난장판을 그린 <그 개와 혁명>은 아버지처럼 혁명을 도모한 딸의 이야기다.
남자 형제가 없음으로 사촌 형제를 상주로 세우자는 할머니의 말을 거스르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장에 애견을 데려옴으로, 화자는 과거 운동권이었던 부모의 궤적을 따른다.
부모 세대의 혁명(운동)이 소위 ‘대의’를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이 작품 속 수민의 혁명은 어떨까. 오직 남성이 상주 자격이 있다는 ‘관습’에 반기를 들고, 장례식장에 동물을 데려올 수 없다는 암묵적인(비성문화된) 법칙을 깨는 것 역시 넓게 보면 정치적인 일임을(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350쪽), 아버지를 사랑했던 수민이 그의 유언을 따르고 뜻을 받드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소소한 일상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 슬픔이란 감정의 정체(나의 슬픔은 나에 대한 것인가 고인에 대한 것인가), 애도의 방법(이 애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등, 죽음 전반에 걸친 고찰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곧잘 슬픔과 연민을 착각한다. 그리고 순수한 슬픔과 후회, 미련 같은 감정을 혼동한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남긴 게 순수한 슬픔이라면 언젠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미련과 후회 같은 감정이 섞여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란 좀처럼 어렵다. 엄청난 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련과 후회를 내려놓으려면, 당시의 나를 용서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사람들이 슬픔을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이유가 대부분 이것 때문인 듯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다. 인색할 정도로 그런 것 같다.
결국 내가 가여워 운다. 나를 애도하고 나를 걱정한다. 순수한 슬픔이 아니다. 2년 전,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의 슬픔(지금도 여전한)을 생각하면 그렇다. 난 어머니를 떠나보냈으면서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에도, 나 자신을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작년 수상자인 ‘안보윤’ 작가의 <그 날의 정모>는 자폐의, 혹은 정신적으로 허약한 아들을 둔 가정의 고단함을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꽤 가혹해 보이는데 서투른 위로조차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란 대책 없는 희망을 주는 대신 작가가 취하는 태도는 대체로 ‘가차 없음’이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대책 없는 위로나 근거 없는 희망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쉽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가차 없는 현실을 마주하도록 돕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다. 약효는 한정적이지만 고통은 지속적이다. 고통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게 잔인한 것처럼 보여도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것 같다.
이야기의 최대 ‘빌런’으로 등장하는 할머니는 화자(정모의 미성년자 누나)에게 ‘정모한테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네 년 말년이 나보다 나을 것 같느냐(384쪽)’고, 그들 가족을 지탱해주는 건 ‘가당찮은 가족애(383쪽)’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저주처럼 들리지만 솔직한 사실이다. 정모의 상태가 말끔히 나아질 일은 없을 테고 그의 평생, 누군가, 아마도 가족, 그것도 부모, 아니면(그들이 죽고 나면) 형제가 그 곁을 지키고 온 시간을 돌봄 노동에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가족애’라는 건 그들이 잃지 말아야 할 귀중한 가치이다. 그 동아줄마저 없으면 그들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것이 아직 건재함을 인정한 할머니의 말은 위로로 여길 만하다. ‘사랑’이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농담처럼 들릴지언정 그건 진실을 품는다고 믿는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는 제목처럼 노골적인 주제의식이 흐른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어딘지 강요하는 듯한, 선뜻 동의할 수 없어 감정적으로 반문만 하게 된, 그런 작품이었다. 작가의 작품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감상이 되살아났는데, ‘좋아하지 않음’과 ‘혐오’를 같은 맥락에서 다루려는 작가의 태도를, 나로서는 쉽게 긍정할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천착하는 작가의 고집은 가치 있지만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요령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기를 푸는 솜씨는 전작들보다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대상작인 ‘손보미’ 작가의 <끝없는 밤>과 작가의 자선작 <천생연분>은 아무리 읽어도 의미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두 작품 모두, 현재의 어떤 사건 와중에 과거 기억의 실마리를 데려오는 구성이었는데, 이런 저런 사건들만 많을 뿐, 과거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현 상황에도 많은 일이 긴박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우선 첫째로 내가 고급 독자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그 다음으로 작가 탓을 하게 됐는데, 탓이라기 보다, 아, 이 작가는 내 스타일이 아니구나, 이 단편들을 다시 읽거나, 다른 작품을 찾게 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슬픈 예감을 갖게 된 정도랄까.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두 작품을 다시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굳이, 억지로, 다른 읽을 책도 쌓여 있고, 다른 궁금한 작가들이 많으므로 보류하기로 했다. 보류라기 보다 포기에 가깝지만. 이 리뷰에 정작 대상수상작가의 작품을 다루지 않은 건 아무래도 찝찝한 일이다. 책에 죄를 지은 느낌이랄까, 뭐 싸고 안 닦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도가 꽤 높았던 책이었다. 여기서 처음 만난 문지혁, 안윤, 예소연 작가들은 더 궁금해서 다른 작품들을 준비해 놓았다(문지혁의 장편 ≪P의 도시≫, 안윤의 작품집 ≪방어가 제철≫, 예소연의 작품집 ≪사랑과 결함≫).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지만.
성해나와 안보윤 작가는 예전에 꽤 좋게 읽었었고. 특히 성해나의 작품집 ≪빛을 걷으면 빛≫은 아주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내공이 느껴졌달까.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안보윤 작가는 단편집(≪밤은 내가 가질게https://soulflower71.tistory.com/536≫)은 좋았으나 장편(≪밤의 행방https://soulflower71.tistory.com/541≫)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런 식으로 독서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힌트를 준다는 것. 이게 바로 이런 수상집의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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