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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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스포일러)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미래 지구 위의 어느 국가. 상위 1지구는 엘리트, 고위 관직들의 거주 지역으로 이를 테면 부촌이다. 1에서 멀어질수록 가난하고 폭력이 빈번하고 치안은 엉망이다. 오래 전, 가난과 불평등을 빌미로 최하위 구역인 9지구를 중심으로 사회를 전복하려는 시도(12월 혁명)가 있었지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탓에 9지구는 현재 ‘후디’로 상징되는 범죄의 소굴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엔 약간의 오해가 있다.

1지구에 살며 아무나 못 들어가는 기숙학교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십대 ‘다윈 영’. 부친 ‘니스 영’은 현재 교육부 차관으로 차기 대통령을 노리고 있고, 조부인 ‘러너 영’은 부자 사업가다.
이들 주변으로 많은 인물들이 배치된다. 니스 영의 친구이면서 오래 전에 살해당한 ‘제이 헌터’, 그의 동생 ‘조이’. 그의 딸이면서 여학교로선 명문이지만 프라임스쿨엔 한참 못 미치는 ‘프리메라 스쿨’에 다니는 ‘루미’. 루미가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는 왕년에 아주 유명한 사진작가였는데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그리고 니스 영과 죽은 제이 헌터의 친구인 ‘버즈 마샬’은 성공한 다큐 감독이고 그의 아들 ‘레오’는 프라임 스쿨의 반항아이다. 이 아이는 나중에 다윈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니스 영은 오래 전에 살해당한 제이 헌터의 추도식에 30년째 참석 중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추도식에 갈 마땅한 이유는 없으나 다윈은 매년 아빠와 동행한다.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그 집의 루미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 드디어 바라던 기회가 오고 다윈은 루미와 말을 트는데 루미는 얼굴도 모르는 삼촌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다. 과거에 알려진 대로 제이 헌터의 살인은 단순 강도 사건이 아니라는 것. 다윈과 루미는 30년도 더 지난 사건 조사에 착수하기로 의기투합한다.

***

SF적인 무대는 장단점이 있다. 지구 별로 구획되어 있는 사회는 계급의 상징이다. 정책적으로 편견과 몰이해를 방관하고 있다. 실제로 9지구를 처음 다녀온 다윈과 루미는 그곳의 실제 모습이 자신들이 듣고 믿어온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의 시스템은 서로를 격리하고 고립한다. 오해를 종용하고 묵인한다. 계급 간의 몰이해는 대립과 증오로 이어지고 결국 폭력을 낳는다. 사회, 혹은 국가가 그것을 바라는가? 현재의 우리와 많이 겹친다.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가 은근히 익숙하다.

반면 미래의 한국인가 싶었는데 인물들 이름이 죄다 영어다. 하나의 언어를 매개로 지구상에 하나로 존재하는, 통합된 신생국가인가 했는데 어딘가에서 ‘다른 나라’를 언급한다. 그럼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지구 위는 맞나?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설정은 아닐지라도 이런 무국적성, 배경의 모호함은 작품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미래의, 가공의 무대라도 작가는 ‘그 공간’의 개념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각인시키고 납득시켜야 한다. 잘 보면 이야기 자체도 구체성이 모자란다.

작가는 작품에서 많은 것을 시도한다. 일단 형식적으로 이 작품은 SF, 미스터리, 성장드라마, 캐릭터드라마를 넘나든다. 주제적으로는 사회적인 이슈와 개인적인 이슈를 모두 건드리는데, 가장 삐거덕거리는 부분은 이 지점에서 나온다.

작가는 초중반을 거치며 많은 분량을 할애해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려고 한다. 특정 계급의 특권의식을 강화하고 계급 간 위화감을 장려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이 일단 그렇다. 정부의 교육 관련 요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이사진에 포함된 학교에 아들이 학생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자부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편견에 지배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며 자신의 자만심을 채우려는 루미의 캐릭터도 그렇다. 모두 사회를 비판하기(조롱하기) 위한 재료들로 읽힌다.
하지만 플롯의 초점이 ‘제이 헌터의 죽음’에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는 12월 폭동과 연결되어 있고, 한 개인의 동기, 누군가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게 되는데 사실 폭동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이런 내용이 소설 후반부에 집약되어 있다.

사회에서 개인으로, 거시적인 시선에서 미시적인 대상으로 옮겨가는 건 사회학자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회파’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흔히 쓰는 논법(작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후반부로 갈수록 (여태 공을 들인) 사회적인 이슈들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사회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의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사회 시스템의 기능과는 별개의 문제다. 굳이 저런 사회가 아니어도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언제 어디서나 작동한다. 살인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전후반부가 긴박하게 연결되어 큰 의미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실패했다. 따로 노는 전후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에 ‘악의 기원’이라는 말이 있고 이야기 전체의 흐름도 한 인물이 ‘흑화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니 작가가 ‘악’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악의 근원은 사회(환경)에 있다고? 아니면 개인에게? 인간의 악, 범죄성을 연구하는 무수한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오랜 시간 논의해 왔어도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은 주제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여전히 설왕설래 중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중요한 건, 인간의 악, 악마성, 악한 행동은 어디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작가 ‘박지리’의 생각(의견)이다.
작가는 결론을 뭉뚱그리며 살짝 피해간다. ‘악의 유전’, DNA에 새겨진 악의 근성 정도로 요약되는 결말이라면 사회의 모순에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다. 다소 생뚱맞은 결론에 산만하고 장황함이 부각된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다윈’의 심리 변화는 작위적이고 클라이맥스의 행동은 동기가 부실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저렇게까지?).

전체적으로 용두사미 같은 느낌이랄까.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갔달까.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작가가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과욕이다. 그 예로 분량이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나 싶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서 간결하고 타이트하게 구성했더라면 오히려 효과적이었을 수도. 게다가 한 얘기 또 하고 보여준 거 또 보여주고, 이런 부분들이 많다.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어떨까. 범죄 구성이 엉성하다. 그저 ‘이래서 이랬다’, ‘저래서 그랬다’, 정도의 동기와 결과만 갖고 구상만 한 것 같다.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번갯불이 콩 구워먹듯 후딱 해치워버리니 감흥이 없다. 육하원칙 아래 작성된 신문기사가 이런 느낌일까. 범죄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으니 그냥 이야기의 빈틈을 채우는 구성물처럼 보여, 진상이 밝혀진 후에도 독자로서 정서의 파장이 별로 없다.
방법적인 건 어떨까. 이 작품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과정이 나오기는 하는데 무용하다.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은 거의 우연에 의존한다. 단서라고 나오는 것들이 설득력이 없다. 목걸이나 얼굴의 점을 사진 속에서 식별한다는 건 TV 일일극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다. 무엇보다 다윈은 녹음테이프를 레오에게 왜 재생시키라고 했을까. 위험한 거 뻔히 알면서. 작가에게 너무 편한 일이다.

인물들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역할도 식상하다. 도화지처럼 순백의 아이, 영리하지만 반항기 가득한 아이. 거기에 새침 떨고 자존심 센 여자아이. 어른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캐릭터 성을 갖춘 건 루미가 유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할머니의 캐릭터들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루미 외에 의미있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다소 거슬린다. 작가의 선택이겠지만 이야기의 생동감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한다.

***

전체적인 느낌이, 장독 뚜껑을 너무 일찍 연 것 같다. 덜 삭힌 젓갈 같다. 작가가 조금 더 고민하고 다듬고 아이디어를 숙성시킬 시간을 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디어도 좋고 가능성은 확실히 있어 보이니, 조금만 더 공을 들였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듯 싶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작가에게 개정을 위해 작품을 수정할 기회는 없을 테고.

그럼에도 작가의 좋은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읽어본 한국작가들 중, 소위 ‘글빨’이 아니라 ‘말빨’이 좋은 작가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멋 부리는, 아름다운 문장’보다 ‘적확한 문장’, ‘친절하고 설득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난 그런 문장이 더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을 많은 독자들이 좋아한다. 뮤지컬로도 제작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면 성공작이다 싶다. 구성이 복잡하고 장황해서 각색 과정이 수월치는 않았겠지만.

늦게나마 삼가 박지리 작가의 명복을 빈다. 작가의 새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건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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