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
캐트리오나 워드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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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화자가 교대로 등장한다. ‘테드 배너먼’, ‘로런’, ‘올리비아’, 그리고 ‘디디(딜리일러)’, 기타 등등.

외딴 집에 직업도 없이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는 테디는 어떤 일에든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에 힘들어 보이고, 어린 딸 로런과 함께 올리비아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안 되는 이웃들은 테디의 딸과 고양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옆, 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다. 11년 전, 가까운 캠핑장 호숫가에서 사라진 ‘막대아이스크림을 든 소녀’의 언니인 디디는 동생의 행방과 실종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좇고 있다.

처음 몇 장(章), 대략 60쪽을 지나면 다양한 화자들이 실제로는 한 인물임을 의식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질문한다. 작가가 지금 ‘다중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이거 혹시 스포일러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틀리다’는 말이 왠지 공정하지 않게 들리는데 이야기는 시종일관 다중인격(책에서는 ‘해리성정체감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에 시달리는 남자 얘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학대’와 그 파괴적인 영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DID가 소설에서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보자면 이 증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학대에서 살아남고, 이 증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선(善)을 위해 분투한다.(512쪽)❞

작가의 이런 의도, 증상에 대한 이해, 오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 책의 내용이고 목적이고 그 전부다.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암울한 정서는 공포라기보다 외로움에 가깝다. 테디의 비밀스러운 삶은 충분히 의뭉스럽지만 그 속을 알고 나면 그런 시선이 단지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다. 룰루의 실종과 테디의 이야기는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를 이룬다. 테디를 의심하고 괴물로 인식했던 디디는 스스로가 괴물이 된다. 한 사람의 오해는 무시되거나 설득의 여지가 있지만 대중의 오해는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이 작품은 범죄와 비밀, 거짓말과 두려움, 공포와 혼돈으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 ‘선의(善意)’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들인 노력은 작가란 직업이 앉아서 얻어먹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읽고 조사하고 쓰는 육체적인 노동은 물론이고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꾸준히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탐색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난한 길이다. 이 작품이 주는 정서적인 충격은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면 더 큰 울림을 남긴다. 평소에 책 말미에 실리는 ‘작가의 말’ 따위 왜 필요한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작가의 말이라면 꼭 필요하고 읽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 공간은 ‘작품(이야기)뿐, 그 이상은 안 돼’라는 고집에 약간 여유를 두기로 한다.

시작과 더불어 1/4 분량은 몰입이 약간 어렵다. 한 명이면서 여러 명인 목소리가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들을 동시에 떠들어대는 통에 눈도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가면 이야기에 빨려들 듯 흡수되는데 그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환상 속 자아들이 쏟아내는 초현실적 이야기, 이미지들엔 장단점이 있다. 충분히 흥미로운 반면 인물의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500쪽 넘게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야기 전체에 대한 실제적이고 실속 있는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독특하다. 마치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는 느낌, 혹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느낌이랄까. 이런 장르의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요소다.

사족

원제는 ≪The Last House on Needless Street≫.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72년 영화, ≪The Last House on the Left≫를 생각나게 하는데, 내용은 크게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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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따는 사람들 서사원 영미 소설 2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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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여름.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농작물 수확을 돕는 북미 원주민 가족. 집안의 네 살짜리 딸, ‘루시’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남은 가족들은 루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생업을 놓칠 수가 없다.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일의 특성으로 가족은 막내딸이 사라진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다. 루시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본, 두 살 위의 오빠 ‘조’는 여동생의 실종에 대한 부채를 평생 지고 산다.

한편, 미국의 다른 지역. ‘노마’라는 여자아이는 뭔지 모를 꿈에 시달린다. 평범한 꿈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한 그 꿈은 너무나 생생해 차라리 현실 같다. 거의 과보호에 가까운 엄마의 양육 방식은 성장하는 노마에게 덫처럼 여겨지고 부모와 다른 피부색, 유전학적으로 달리 생긴 귀의 생김, 과거의 화재로 모조리 타버렸다는 사진들을 지하실에서 발견하면서 노마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노마가 루시라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고 백인 부부가 원주민 아이를 키우는 데에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야기엔 비밀은 있으나 반전은 없고 악당도 존재하나 응징이나 복수 같은 건 없다. 슬픔과 고통, 분노로 시작한 이야기는 오히려 사랑과 용서, 빛나는 인간애와 (요즘은 구시대적인 사고로 폄하되는) 가족의 가치로 충만한 결말을 맞는다. 전통적인 가족상 무너뜨리기, 가족 해체 등에 열심인 요즘의 한국 소설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막힘없는 진행에 감정은 진솔하고 억눌려 터져나오는 슬픔과 분노는 생생하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인상적인데, 화자로 번갈아 나서는 조와 루시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루시의 실종과 형 ‘찰리’의 죽음 이후 조가 겪는 불행은 작중 인물의 말처럼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동시에 조는 자신이 타인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불행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평생 트라우마처럼 지고 있는 조는 행복해질 수 없는 캐릭터다. 어둡고 불안하고 항상 제 그림자에 쫓기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사람이다.
루시는 화해와 용서의 아이콘이다. 작중 최대 빌런인 ‘레노아-프랭크’ 부부가 자신에게 한 일을 알고 나서도 아주 잠깐 원망하는 데 그친다. 그들을 탓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있겠으나, 이미 일어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루시는 자신을 유괴하고 키워준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그들 역시 자신의 다른 부모로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가족들을 온 힘으로 사랑한다. 거짓의 토양에서 비밀을 양분으로 탐스럽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루시는 이 작품의 진정한 히로인이다.

이야기의 원형만 떼어놓고 보면 TV 일일극 설정에 어울릴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유괴된 아이, 뒤바뀐 부모,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 탕아, 결혼과 장례식, 출생과 죽음. 이런 소재로 작가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은 마치 물처럼 흐른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신파라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으며 인물을 비판하거나 독자에게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인물 각자의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일구고 살아내는 모습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그저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건 작가와 이야기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이다. 독자들은 자신이 본 것들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세상을, 삶을 통과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세상은 사랑으로만 충만한 게 아니고 그렇다고 증오와 미움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 용서, 화해 같은 좋은 것들이 아주 조금 더 많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놀랍다. 이다지도 강렬한 첫 소설이라니. 그 다음 작품은 얼마나 부담이 될까, 걱정도 든다.
작가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미크마크 부족) 출신이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아버지가 줬다고 하는데, 처음에 기대했던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 동화 정책’에 관한 (정치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배경으로 잠깐 언급되는 정도다.
하지만 원주민의 땅을 빼앗은 백인들의 상징으로서, 루시를 백인 부부에게 빼앗긴 원주민 어머니의 눈물이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에게 딸, ‘페르세포네’를 빼앗긴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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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혹은 애슐리
김성중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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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중견이 된, 김성중의 작품집.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작품인 <레오니>에 나오는 가족은 마치 거대한 나무 같다. 가지들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서쪽으로 뻗은 가지를 마주할 수 없다. 병들어 시든 가지도 있고 파릇파릇하니 물기로 팽팽한 가지도 있다. 대부분, 그럭저럭 건강하니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나무다.
먼 과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게 보이고 애잔한 감상을 남긴다. 작가가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말하려 했을까. 작품집 첫 머리에 어울리는 대중적이고 가벼운 소품처럼 읽힌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무척 도발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는 ‘젠더’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출 것을 권하는 것 같다. 젠더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나’와 ‘너’의 상태로 존재하자는 이야기로 읽힌다.
젠더의 규정은 어쩌면 개인을 설명하고 타인으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한, 그저 누군가를 카테고리화하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육체를 가졌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케어봇인 ‘엔도’는 영생이 가능한 육체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젠더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아우르는 이슈이다. 그저 ‘나’로서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면 굳이 ‘내가 누구’라고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상속>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다. 희망과 절망이 어우러진 분위기(재능이 삶을 낫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삶 쪽에서는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중략) 이런 재능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181쪽))에 죽음을 앞두고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책들을 타인에게 물려주려는 ‘기주’의 심정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어찌어찌 등단은 했으나 극심한 슬럼프로 자기 연민과 불행에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작가적 재능에 회의를 겪는 ‘진영’은, 재능은 있으나 운명이 허락하지 않는 기주와 선생님을 바라보며 껍질을 벗고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은 이야기를 짓고 글을 쓰는, 혹은 쓰려는 많은 이들을 위한 헌사로 읽힌다. 진영이 꾼, 항아리(숙성의 항아리, 슬럼프라는 껍질)가 깨지는(파편들, 미숙함, 깨짐으로서 나옴) 꿈은 그녀의 슬럼프가 이제 끝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징조가 아니었을까.

여러 동화를 패러디한 <마젤>은 (많은 동화나 설화에서 3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면)그 구조 역시 전형적인 동화다. (다소 관념적인) 불행을 겪고 있는 ‘그녀’는 안락한 곳을 떠나 세 번의 모험을 통해 세 명의 인물을 만나고 결국 스스로를 구하게 된다. 여행 중에 만난 동화 속 인물들은 주인공의 분신으로, ‘마젤’은 희망과 행복, 구원의 집합체로 보인다. 타인을 구원하는 건 결국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그 외에 중고 거래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지혜와 용기, 사랑, 세상을 읽는 방법의 경험치를 전해 듣는(열여덟의 결과물, 43쪽) 십대의 이야기인 <해마와 편도체>, 타인의 꿈을 지지하는 이야기인 <정상인>이 실려 있다.

나무라는 소재, 숲이라는 공간, 동화적인 분위기 등의 요소를 공유하는 두 작품, <나무사냥꾼 돈 사파테로의 모험>, <배꼽 입술, 무는 이빨>은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조차 어려워 언급을 생략한다.

개인적이고도 전체적인 감상으로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작품들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매우 좋았던 작품들과 읽는 게 고역이었던 작품들 사이에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존재하는, 작품들의 높낮이가 다양하다고 해야 하나. SF와 동화적 상상력은 작가의 초기 작품집에서부터 확인된 거였으니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건 의미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독자가 알아먹게는 써야지 않나, 싶다가도 그것도 작가의 스타일, 개성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이러다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글을, 의 의문과 생각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 그런 작품집이었다.

작가의 신작 (최초의) 장편이 SF 장르라던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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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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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사이비 종교라 해도 그걸로 전 세계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거야.❞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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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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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편의 단편과 에세이 두 편이 실렸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표제작인 <신앙>이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한몫 잡으려는 인물과 그를 의심하면서 서서히 동조하게 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종교(믿음)의 본질을 살핀다. 누군가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는다면 사이비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위험해 보이나, 사실을 알고 보면 거대 종교 역시 사이비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취향, 물질에 대한 애호의 속성 역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과 비슷하다는 작가의 주장에도 공감이 간다. 틀에 박힌 사고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기발한 전개, 아이러니 가득해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터지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편의를 위해 가전제품을 구매하듯이 자신과 똑같은 ‘클론’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어느 미래. 가사 노동과 경제 활동, 기타 목적으로 클론들을 구입한 주인공이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서서히 잃어 가고 있는 과정을 그린 <쓰지 않은 소설>도 꽤 독특한 감상을 남긴다. 기계로 대체된 사회에서 고유성을 잃고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인간의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지배하는 외계 생물체의 위협을 그린 영화 ≪Body Snatcher≫를 생각나게 한다.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받는 요소는 무엇일까, 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 밖에 수단이 목적을 앞서는 주객전도된 미래를 그린 <생존율>, 대체 가정을 꿈꾸는 세 여성의 이야기인 <토맥윤기>, 무개성, 몰개성이 일반화된 획일된 모습의 미래를 그린 <컬처쇼크>, 예술의 위대함과 영원성을 이야기한 <마지막 전시회> 등의 소설 작품이 실렸다.

나머지 두 작품은 에세이인데, <기분 좋음이라는 죄>에서는 개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무리에 섞일 정도만’을 요구하는 이율배반적인 주류 사회에 대한 작가의 경험이 들린다. 조금이라도 튀면 ‘비웃음을 당하고 캐릭터화 되고 라벨링을 당하는(126쪽)’ 일은 비단 일본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무리 없이,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성, 다양함’이란 존재하는지,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자면서 가차 없이 제시되는 대중의 ‘이중 잣대’에 대해서도 사회는 고민해야 한다.

<그들의 혹성에 돌아가는 일>은 어릴 적, 주변과의 불화를 극복하게 해 준 어릴 적 상상의 친구에 대한 작가의 경험이 보인다. ‘상상 친구’의 경험은 작가들에게 거의 공통된 기억으로 보이는데, 내향형 인간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짓고 글을 쓰는 일이 ‘내향형’의 인간에게 특화된 건 아닐지라도 좀 더 그들에게 유리한 일은 아닐지, 근거 없는 상상을 해본다.

대부분의 작품이 SF의 성격을 갖는다. 작가의 문학적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통통 튀는 상상력이 좋았다. 대부분의 작품이 짧다. 간략한 분량 안에서 할 말 다 하고 있으니 굉장히 효율적이고 이야기 집약적이다. 낭비가 없다는 건 좋은 작가의 덕목 중 하나이다.

사족.

<컬처쇼크>을 읽으면서 기시감이 들어서, 뭐지, 했는데, 생각해 보니, ‘박지리’ 작가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서 보여준 사회와 꽤 비슷하다. 미래에 대한 상상은 누구나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하고 있는 걸 보면, 현재에 대한 인식도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서로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미래의 상상은 현재의 반영이니 사람들 사는 모습은 국경 너머 어디든 똑같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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