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디 혹은 애슐리
김성중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어느 새 중견이 된, 김성중의 작품집.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작품인 <레오니>에 나오는 가족은 마치 거대한 나무 같다. 가지들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서쪽으로 뻗은 가지를 마주할 수 없다. 병들어 시든 가지도 있고 파릇파릇하니 물기로 팽팽한 가지도 있다. 대부분, 그럭저럭 건강하니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나무다.
먼 과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게 보이고 애잔한 감상을 남긴다. 작가가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말하려 했을까. 작품집 첫 머리에 어울리는 대중적이고 가벼운 소품처럼 읽힌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무척 도발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는 ‘젠더’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출 것을 권하는 것 같다. 젠더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나’와 ‘너’의 상태로 존재하자는 이야기로 읽힌다.
젠더의 규정은 어쩌면 개인을 설명하고 타인으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한, 그저 누군가를 카테고리화하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육체를 가졌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케어봇인 ‘엔도’는 영생이 가능한 육체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젠더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아우르는 이슈이다. 그저 ‘나’로서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면 굳이 ‘내가 누구’라고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상속>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다. 희망과 절망이 어우러진 분위기(재능이 삶을 낫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삶 쪽에서는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중략) 이런 재능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181쪽))에 죽음을 앞두고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책들을 타인에게 물려주려는 ‘기주’의 심정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어찌어찌 등단은 했으나 극심한 슬럼프로 자기 연민과 불행에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작가적 재능에 회의를 겪는 ‘진영’은, 재능은 있으나 운명이 허락하지 않는 기주와 선생님을 바라보며 껍질을 벗고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은 이야기를 짓고 글을 쓰는, 혹은 쓰려는 많은 이들을 위한 헌사로 읽힌다. 진영이 꾼, 항아리(숙성의 항아리, 슬럼프라는 껍질)가 깨지는(파편들, 미숙함, 깨짐으로서 나옴) 꿈은 그녀의 슬럼프가 이제 끝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징조가 아니었을까.
여러 동화를 패러디한 <마젤>은 (많은 동화나 설화에서 3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면)그 구조 역시 전형적인 동화다. (다소 관념적인) 불행을 겪고 있는 ‘그녀’는 안락한 곳을 떠나 세 번의 모험을 통해 세 명의 인물을 만나고 결국 스스로를 구하게 된다. 여행 중에 만난 동화 속 인물들은 주인공의 분신으로, ‘마젤’은 희망과 행복, 구원의 집합체로 보인다. 타인을 구원하는 건 결국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그 외에 중고 거래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지혜와 용기, 사랑, 세상을 읽는 방법의 경험치를 전해 듣는(열여덟의 결과물, 43쪽) 십대의 이야기인 <해마와 편도체>, 타인의 꿈을 지지하는 이야기인 <정상인>이 실려 있다.
나무라는 소재, 숲이라는 공간, 동화적인 분위기 등의 요소를 공유하는 두 작품, <나무사냥꾼 돈 사파테로의 모험>, <배꼽 입술, 무는 이빨>은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조차 어려워 언급을 생략한다.
개인적이고도 전체적인 감상으로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작품들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매우 좋았던 작품들과 읽는 게 고역이었던 작품들 사이에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존재하는, 작품들의 높낮이가 다양하다고 해야 하나. SF와 동화적 상상력은 작가의 초기 작품집에서부터 확인된 거였으니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건 의미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독자가 알아먹게는 써야지 않나, 싶다가도 그것도 작가의 스타일, 개성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이러다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글을, 의 의문과 생각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 그런 작품집이었다.
작가의 신작 (최초의) 장편이 SF 장르라던데.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