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마지막 책일 듯.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중 한 권. 이름대로 한 작가의 단편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다. 얇은 책이라 집어 들기 편한데, 책들과 책들 사이에 쉼표처럼 읽기 수월한 기획이다. 매 권권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안윤’ 작가는 수상집 형식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작가다. 단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아주 좋았고 인상 깊었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 작가의 책을 한동안은 기다릴 것 같다.

이 책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그리움일 것이다. 세 편 모두 누군가를 잃어서 남겨진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도 슬픔을 태우고 난 재처럼 남은 그리움을 안고 있다.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건 죽음, 그 이후의 일들이다. 그 후의 감정, 그 후의 기억, 그 후에 이어질 삶.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어질 인생. 그것을 기다리고 기대해야 하는가, 그래도 되는가, 그럴 만한가의 질문.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죽을 거라는, 그래서 결국 사라질 거라는 사실은 어느 무엇보다 확실하다. 그건 우리의 정해진 미래다. 인간을 포함한 유기생명체 뿐 아니라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 역시 제 몫을 다하고 쓸모를 잃게 되면 언젠가는 버려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래서 작가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부연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들이 중요한 순간도 있겠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그저 죽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사라졌다는 사실. 그래서 누군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그러므로 남은 평생 그를 그리고 가끔 기억을 더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문제가 된다.

죽은 자들은 서서히 잊힐까. 그래야만 한다. 아주 잊히지 않을 정도로만, 문득 떠올라 잠깐 울며 그리워 할 만큼의 흔적만 남기고 잊혀야 한다. 그래야 뒤에 남은 자, 살아서 남겨진, 아직 못 죽어 뒤처진 자들이 산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살다가 가는 거지, 죽은 채로 가는 것이 아니다. 가기 위해서는 먼저 ‘살다가’의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것도 ‘잘’ 살면 더 좋다.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각자의 형편과 기준에 맞추도록 해야겠지만 일단 살아있다면 살아야 한다. 그게 삶에 대한 예의이고 죽음에 대한 예의이다. 최선을 다해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죽음도 그런 죽음이길 바란다. 누군가의 생일과 다른 누군가의 기일이 같을 때, 생일상을 먼저 차리는 <달밤> 속 화자처럼 삶이 죽음보다 앞서는 이유가 한두 가지 더 있다고 해도, 망자들은 화내지 않을 것이다.

뒤에 남은 자들이 위로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 일어설 수 있다고,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언젠가는 그럴 거라고, 종종 미친 듯 그리움을 겪으면서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다시 그리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야 한다. 그들이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순간은 자신의 슬픔을 아는 누군가를 만나고 그 감정을 나눌 때이다.
<방어가 제철> 속 화자(안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빠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후에 자신이 떠안은 똑같은 무게의 두려움과 그리움을 ‘정오’ 역시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 앞으로 안라의 삶은 오빠 ‘재영’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용서받았음으로 아주 조금 편해질 것이다.

<만화경> 속 ‘나경’은 생면부지의 타인(미리내)의 죽음을 애도한다. 고달프고 아슬아슬한 삶의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는 나경은 자신에게 주위의 타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녕을 물어줄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매우 안심되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에서는 소설 뒤에 존재하는 작가가 보인다. CoVid-19가 대유행하던 시기, 사람들의 죽음을 단지 수치로 환산해 유통하듯 정보를 교환하던 때가 있었다. 익명성 뒤에 숨은 몰개성, 비인간화의 또 다른 증거 앞에서 묵도하는 작가가 보인다. 그 숱한, 허무하고 의미없는 죽음들 뒤에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끝을 아는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나.

우리가 마지막의 의지까지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마지막의 선의마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에게 ‘최후’를 위해 마지막의 선의는 간직하고 있음을 믿는다.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가능성은 무한대로 존재함을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는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6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 엉거시풀만 해도 어찌나 지독하게 안 뽑히는… 그 뿌리가 땅속 깊숙이 뻗어 있기 때문이에요. 아주 깊숙이, 흙 속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거죠.”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 경감이 대꾸했다. “아주 깊숙이 멀리… 멀리… 옛날까지 뻗어나가 있는 거죠. 이번 살인사건 말입니다. 18년 동안.”
“아마 그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였는지도 모르지요.” 마플양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269쪽)❞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한 번째.

‘그웬다’와 ‘자일즈’는 뉴질랜드에서 막 결혼해 영국에 정착하려는 신혼부부다. 해외 출장 중인 자일즈를 대신해 영국 남부 해변 마을 ‘딜머스’에서 적당한 집을 찾은 그웬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본 장소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그녀를 압도한다. 거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의 가려진 출입문의 존재를 알아맞히고 정원의 숨겨진 계단을 찾아내더니, 급기야 열리지 않는 벽장 안에 발려진 벽지의 무늬를 정확히 기억해 낸다. 자신에게 일종의 초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는 그웬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던 중, 어릴 적 기억이 폭발한다. 이층의 계단 난간 아래로 내려다 본 금발 여인의 시체. 목이 졸려 죽은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헬렌’.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내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너무 젊어서 죽었어.’
하지만 그웨니는 헬렌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

우리의 명탐정 ‘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은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겁을 먹은 그웬다에게 가장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기억하지 못할 뿐, 그웬다는 어릴 적 그 집에 살았었고, 이름만 기억하는 헬렌은 같이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 잠깐의 조사로 미스 마플의 말은 사실임이 밝혀진다. 세 살의 그웬다는 1년 남짓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헬렌은 그녀의 새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과거의 사람들은 헬렌이 다른 남자와 도망친 것으로 알고 있다. 헬렌의 부재는 자발적인 가출일까, 아니면 살인일까.
젊은 부부는 과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에 호기심을 갖지만 미스 마플은 경고한다. ‘잠자는 살인’은 깨우지 말라고. 그것은 언제든 깨어나 현실을 침범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지만 ‘판도라’ 이후로, 호기심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부부를 미스 마플은 돕기로 한다.
과연 18년 전에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은 게 정말로 매력적이다. 단숨에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고딕 소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어딘지 음산하고 기괴하다. 그웬다의 시점으로 기억되는 헬렌의 시체와 연극의 대사를 읊조리는 익명의 남자 목소리를 상상하면 한창때의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해결되지 않았거나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간 과거의 범죄가 어떤 계기로 현실로 소환되는 상황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다. 그리고 범죄 해결 이전에 범죄가 과연 성립되는가, ‘진짜로 범죄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의 플롯 역시 작가의 작품들 속에선 드물지 않았다. 이런 재활용, 혹은 단골 설정의 익숙함이 지배하지만 이런 작품들의 묘미는 역시 불완전하고 왜곡된 기억을 더듬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 진실과 거짓들이 난무하고 교착(交錯)된 증언들 속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을 배반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후더잇(whodunit)’의 구조를 지니면서도 기괴함과 슬픔이 황금 비율로 섞인 분위기가 압도하는, 인상적인 수작이다. 작가의 장점, 특기가 골고루, 알맞게 발휘되어서 ‘묘기 대잔치’라 해도 무방하다. 매력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음산한 분위기 위로 잘 짜인 범죄 드라마가 진행되는데, 용의자들을 나열하고 그들에게 의심 갈 상황을 만드는 방식, 중요한 단서들을 대수롭지 않은 척 제공하는 동시에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방식들이 모두 ‘크리스티 적(-的)’이다.

특히 악의, 질투, 욕망, 이기심, 그리고 사랑이 뒤범벅된 범죄는 어둡고 추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범인의 심리와 동기가 잘 그려졌다.
사랑이 과하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고통일 수 있으니, 그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닌 건 분명하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걸까. 이기심을 버린다면 사랑으로 고통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작가의 특기인 로맨스+유머를 걷어낸 건조하고 음울한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려 슬픔과 고통의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글 서두에 발췌, 인용된 두 인물의 대화는 인간의 악마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인간의 성격(범죄성향 같은 악마적인 면을 포함하여)은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에 자라면서 받은 외부의 영향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사는 동안 계속 변한다.
인간의 본성에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는 가설을 사실로 친다면,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은 개인을 둘려싼 여러 조건들(내재적, 외부적)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발전하거나 퇴보할 것이다. 선한 부분보다 악한 부분이 더 두드러지는 환경 속에서 개인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까. 그의 악한 행동을 제지하고 옳지 못한 동기를 제거하려면 과연 성장의 어떤 단계에 수정이 가해져야 할까.
이런 상상 만으로도 여러 소설, 영화가 떠오른다. 동서고금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독자나 관객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궁극적으로 입증하려고 한 것은 (심지어 선한 인간이 악함을 눌러 이기는 교훈적인 이야기조차) 인간의 선함이 아닌 악함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악함은 대개 그 뿌리가 길고 깊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선한 행동은 이기심, 증오, 질투와 분노 등을 기어코 눌러내야 어렵사리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존 웹스터(Jong Webster)’의 희곡, ≪말피 공작부인(the Duchess of Malfie)≫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아포리즘으로 (꽤 중요하게) 인용된다.
어린 그웬다가 들은 범인의 독백은 아래와 같다.

❝Cover her face.
Mine eyes dazzle.
She died young❞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
내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젊어서 죽었다.

(‘존 웹스터’, ≪말피 공작부인≫, 4막2장)


발표 순으로 보면 가장 마지막(1976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작가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들 중의 한 명인 ‘미스 제인 마플’의 마지막 책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40년대에 쓰였다. 집필 순서대로라면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을 담은 책은 71년 작인 ≪복수의 여신(Nemesis) https://soulflower71.tistory.com/270≫이다.

2차세계대전 중에 작가는, 자신의 사후에 발표하기로 하고 두 작품의 원고를 써놓는데, 한 권이 이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에르큘 포와로(Hercule Poirot)’의 마지막 책인 ≪커튼(Curtain)≫이다. 작가의 사후, 이 작품보다 일 년 전(75년)에 출간된 커튼에서 포와로는 죽음을 맞는데, 실제 인물인 양, 신문에 부고 기사까지 실린다.

실제로 이 작품이 쓰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았던 모양이다. 크리스티 전문가들에 의하면 1940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43년 작인 ≪움직이는 손가락(the Moving Finger)≫이 살짝 언급되는 걸 보면 그 이후인 것 같기도 하고, 68년 작 ≪엄지손가락의 아픔(By the Pricking of My Thumbs)≫의 도입부가 그대로 이 책에서 인용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62년 작, ≪깨어진 거울(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에 죽은 걸로 나오는 ‘밴트리 대령’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등, 인물들의 타임라인에 혼란이 온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쓰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족.

이 작품을 위해 작가가 염두에 둔 제목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 다섯 번째 챕터의 제목 ‘회상 속의 살인(Murder in Retrospect)’이 그 하나이고, 존 웹스터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Cover Her Face)’도 물망에 올랐다고.

‘회상 속의 살인’은 작가의 43년 작, ≪다섯 마리의 아기 돼지(Five Little Pigs) https://soulflower71.tistory.com/498≫의 미국판 제목이 되었고,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는 나중에 ‘P.D. 제임스’의 데뷔작(62년) 제목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글을 쓴 적이 없으면서 글을 쓴다 믿었고
사랑한 적이 없으면서 사랑한다 믿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닫힌 문을 마주한 채 기다리기만 했다.』

소설 서두에 나오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 속 문장은 화자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용이다.

화자는 두 자녀를 둔, 결혼 15년 차의 주부다. 경제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고 그녀 자신도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쁘고 정신없고, 익숙함에 매몰된 무관심을 보이다가 그런 와중에도 알맞은 순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오히려 다정한 남자다.
그럼에도 화자는 매우 불행하다. 아니, 스스로 불행하다 느낀다.

화자는 남편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남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렵고 불안하다. 사소한 행동에 실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든다. 작은 농담에 상처 입고, 별 것 아닌 무관심에 분노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건 아닌지 살피고 덫을 놓고 시험하려 든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른 남자들과 섹스를 한다. 남편을 벌주기 위해서.

화자의 사랑엔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다. 그 사랑의 대상은 정작 남편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다. 화자 자신이 고백하듯(134쪽)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 중독된’ 자신의 상황이 오로지 문제가 된다. 화자의 가장 큰 결핍은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확인해줄 ‘결핍’이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모자란다는 건 완벽에 다다르기 위한 동력이다. 그게 없으니 매사 지루하고 진부하고 불안하고 두렵다. 사랑을 통해 실존을 확인해야 하는 화자는 (우리 옛말에)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것처럼 보인다. 걱정을 사서 한다.

결핍이 없음이 결핍인 화자는 미친 걸까.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완전 광기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멘탈은 아니다. 스스로 불행의 여지를 만들어 자신을 고문한다. 남편을 사랑한다 목청껏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감정은 가학적이기도, 한편으로는 피학적이다. 작품 속에서 남편의 문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화자의 문제는 사백 쪽 가까운 본문에 거의 빼곡하다.

작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위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논할 때, ‘변함없음’이라는 조건은 언제나 상위일까. 변함없는 사랑이 마냥 좋은 걸까. 언제나 긴장하고 마음 졸이게 만드는 사랑이 과연 행복과 만족을 보장할까. 그런 사랑을 통한 존재의 의미, 존재함에 있어서 사랑의 가치는 언제나 상응할까.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화자를 통해, 정신적으로 남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여자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여성의 ‘의존성’, ‘미성숙함’을 꼬집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과 가학성, 그 양가의 균형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을 고발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는 스스로를 고문함과 동시에 남편 역시 가해자, 피의자로 만든다. 엄연한 정신적 폭력이다. 화자는 남편이 자신을 실망시킬 때마다 나름의 복수도 준비하는데 그걸 일일이 수첩에 기록하는 기벽을 보여준다. 사랑이 끔찍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 언제 어떤 얼굴을 드러낼지 아무도 모른다.

‘사이코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마냥 위험스럽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문득 냉정하고 정신적 균형을 찾는 순간도 있다. 블랙 코미디 같은 면모는 행간에 스며 있는 엉뚱한 유머로 확인된다.

독특한 소설이다. 최소한의 인물, 경제적인 배경으로 인물의 이상 심리에 파고든다. 시종일관 시선을 화자에게 두는 건 다소 피곤하다. 열정이 지나쳐 광기를 넘나드는 인물의 내면은 흥미로우면서 지루하다. 이야기 흐름에 완급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뒤란에서 소설 읽기 1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남는 시간에 역사책을 읽는 ‘레이먼드’는 하나뿐인 친구 ‘안드레’가 전학을 가자 더욱 외로워진다. 어느 날 ‘루이스 벨레즈’라는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밀리’라는 노인과 마주친다. 레이먼드는 노인을 아무런 보상 없이 도와오다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 남자를, 이젠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의 위협에까지 몰린 시각장애인 밀리를 위해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한 마디로 ‘착한’ 소설이다. 친절과 선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감사로 중무장되어 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돕는다. 인물들은 우울하고 사건은 삭막하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사랑스러운 동시에 진중한 문제의식, 이야기의 흡인력과 후반부(재판 과정)의 긴장감도 좋은,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이야기 중반에 밝혀지는 루이스 벨레즈의 죽음은 우연과 나쁜 운이 개입된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스며들지 못하고 종종 눈에 튄다. 도시에 계획적으로(인위적으로) 세운, 마치 거대한 ‘랜드마크’처럼 보인다. 루이스의 죽음과 이후의 재판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 (특히 ‘내집단(inner group)’의 속성인)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무의미한 계급의식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장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작위성이 무색하게도 사건은 이야기 안에서 일종의 모티프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두 주인공의 관계가 시작되는 단서를 제공하고 이야기에 동력을 제공한다. (사건 주변의 것들도 포함하여) 지나치게 눈에 띄는 반면, 이야기에 넘치지만 딱 알맞은 힘을 부여한다.

레이먼드는 흑인이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한 십대다. 밀리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나치의 폭압에서 ‘돈’으로 살아남은, 그래서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백인의 이성애자, 맹인 여성 노인이다. 여기에 그들을 돕고자 하는 다른 백인들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들, 흑백이 섞여있는 레이먼드네 가족을 배경으로 연령과 피부색, 성정체성 같은 ‘다름’을 뛰어넘은 두 인물의 연대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지 거의 확실하다.

루이스 발데즈의 재판 과정에서 ‘객관적 진실’이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사물은 관찰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363쪽)’는 양자역학의 핵심 논리를 바탕으로 한 위의 질문은, 소위 우리가 중요시하는 ‘팩트(fact)’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고 객관적인 현실보다 인식의 주관성을 부각시킨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편하지 않느냐는 레이먼드의 질문에 밀리는 ‘오히려 보지 않음으로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눈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눈’은 죄가 없다. 인간은 눈을 통해 거의 모든 정보를 얻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정보들을 해석하는 관점, 인식하는 방법이다. 마음의 눈을 통해 보라는 말은 알지만 (도를 닦지 않은 이상)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건 비교적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눈물과 미소를 번갈아가며 자극하는 이 재미난 소설이 마냥 좋기만 할까.
한편으로는 참 얄궂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여지는 없을까.

사람이 이렇게, 마냥, 대책없이 착하기만 한 동물일까.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인 독자들의 눈에는 이 소설이 마냥 좋게만 보일까.
누군가를 도우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더 큰 낭패를 겪는 뉴스를 자주 접하는 이 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사리고 눈과 귀는 물론 입까지 닫는 게 최선이자 최후의 처신이라고 믿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어떻게 읽힐까.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했지만,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글을 적는 지금은 최면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선의’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사족.

최근에 읽은 ‘김성중’의 단편 <해마와 편도체>, ‘알 파치노’와 ‘크리스 오도넬’이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92년作)≫를 생각나게 한다.
특히 맹인 노인과 십대 소년의 감정적 연대,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좋은 영향력을 그리며 인간의 진실, 삶의 지혜를 말한다는 점에서 ≪여인의 향기≫와 공통점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케이크
샤메인 윌커슨 지음, 서제인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니’와 ‘바이런’은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해양 학자로 승승장구 중인 바이런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고한 애인과 직장에서 번번이 누락된 승진으로 의기소침한 상태이고, 생활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하는 여동생, 베니는 커밍아웃 이후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들과 척을 진 상태다.
장례식을 위해 어렵게 한자리에 모인 남매는 모친의 변호사로부터 유언이 녹음된 음성 파일을 전달받는데, 자식들도 몰랐던 어머니의 ‘진짜 삶’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가족의 기원, ‘나’라는 존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가족의 해체는 물론, 그 정통성마저 의심하는 요즘에 ‘가족’이라니. 고루하게 들리지만 꽤 획기적이다. 이야기는 진행하면서 가족 이야기의 단순한 틀을 벗어나 그 이상의 주제, 차별과 억압, 계급과 제도적 관습, 환경 문제,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이슈로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살 만한 삶’,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큰 공감이 갔다. 작가는 안주하지 않는 삶을 권한다. 일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문을 열고 나아가기를 권한다. 삶은 모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탐험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들에 대해서도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순간이라도 두 삶이 얽힌다는 것을 의미하며, 영향의 주고받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해주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화자들이 교대로 등장해 다양한 시공간을 무대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조연과 단역들의 삶에 대해서도 소홀함이 없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고 의미 있으며 (독자들이 읽기에) 재미있는 이유는 그들의 역할이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이상으로, 작가는 이야기라는 전체 그림의 한 구석에 드리워진 작은 그림자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세밀함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타인들의 역할과 그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있다.

제목인 ‘블랙케이크(Black Cake)’에 대한 자세한 조리법은 소개되지 않지만, 대략 언급된 바에 의하면 타지 않게 끓여 카라멜화(-化; caramelization)된 설탕이 핵심인 것 같다. 이로 인해 완성된 케이크의 색깔이 결정된다. 또 여기에 카리브 해 연안의 섬 국가들의 특산품인 ‘럼’이나 ‘포트와인’에 절인 과일들(특히 자두)이 들어간다.
보통의 케이크와는 달리 풍미가 상당히 독특할 것 같은 이 음식은 이야기 안에서 서사를 꿰뚫는 상징적 소재이며 한 개인의 뿌리를 정의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블랙케이크는 카리브 해 제도(諸島)국들의, 말하자면 지역 특산품이지만 그 재료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이며, 밀은 서아시아, 자두는 중국, 포트와인은 남부유럽, 기타 등등.
그렇게 많은 지역에서 온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그 나라의 토종 음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다양함과 기원의 혼재함은, 중국인과 카리브 해의 흑인, 백인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주인공인 ‘커비(혹은 엘리너)’의 가계에서도 보인다. 과연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작가는 ‘정통성’이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정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배타적이게 되고, 배타적인 태도는 차별과 억압, 나아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 마음과 문을 열고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것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자세라고 작가는 전한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 광활한 ‘바다’가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짐작해 본다. 그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듯이 삶에 맞부딪히고 뛰어들어 탐험하라는 독려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다.

작품을 위한 작가의 전략도 눈여겨 볼만하다. ‘머리’를 썼다는 얘긴데, 작품 구석구석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전략이 노골적으로 도드라지면 촌스럽게 보이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 인상적인 데뷔작에서 그런 함정을 보기 좋게 피해가면서 후반 100여 쪽은, 정말이지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사족.

첫 작품이 이다지도 강렬하면 독자로서 작가가 살짝 (걱정 아닌) 걱정이 되는데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다음 작품은 어쩌려고, 이런 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