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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살인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6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5월
평점 :
❝저 엉거시풀만 해도 어찌나 지독하게 안 뽑히는… 그 뿌리가 땅속 깊숙이 뻗어 있기 때문이에요. 아주 깊숙이, 흙 속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거죠.”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 경감이 대꾸했다. “아주 깊숙이 멀리… 멀리… 옛날까지 뻗어나가 있는 거죠. 이번 살인사건 말입니다. 18년 동안.”
“아마 그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였는지도 모르지요.” 마플양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269쪽)❞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한 번째.
‘그웬다’와 ‘자일즈’는 뉴질랜드에서 막 결혼해 영국에 정착하려는 신혼부부다. 해외 출장 중인 자일즈를 대신해 영국 남부 해변 마을 ‘딜머스’에서 적당한 집을 찾은 그웬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본 장소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그녀를 압도한다. 거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의 가려진 출입문의 존재를 알아맞히고 정원의 숨겨진 계단을 찾아내더니, 급기야 열리지 않는 벽장 안에 발려진 벽지의 무늬를 정확히 기억해 낸다. 자신에게 일종의 초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는 그웬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던 중, 어릴 적 기억이 폭발한다. 이층의 계단 난간 아래로 내려다 본 금발 여인의 시체. 목이 졸려 죽은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헬렌’.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내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너무 젊어서 죽었어.’
하지만 그웨니는 헬렌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
우리의 명탐정 ‘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은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겁을 먹은 그웬다에게 가장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기억하지 못할 뿐, 그웬다는 어릴 적 그 집에 살았었고, 이름만 기억하는 헬렌은 같이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 잠깐의 조사로 미스 마플의 말은 사실임이 밝혀진다. 세 살의 그웬다는 1년 남짓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헬렌은 그녀의 새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과거의 사람들은 헬렌이 다른 남자와 도망친 것으로 알고 있다. 헬렌의 부재는 자발적인 가출일까, 아니면 살인일까.
젊은 부부는 과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에 호기심을 갖지만 미스 마플은 경고한다. ‘잠자는 살인’은 깨우지 말라고. 그것은 언제든 깨어나 현실을 침범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지만 ‘판도라’ 이후로, 호기심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부부를 미스 마플은 돕기로 한다.
과연 18년 전에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은 게 정말로 매력적이다. 단숨에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고딕 소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어딘지 음산하고 기괴하다. 그웬다의 시점으로 기억되는 헬렌의 시체와 연극의 대사를 읊조리는 익명의 남자 목소리를 상상하면 한창때의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해결되지 않았거나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간 과거의 범죄가 어떤 계기로 현실로 소환되는 상황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다. 그리고 범죄 해결 이전에 범죄가 과연 성립되는가, ‘진짜로 범죄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의 플롯 역시 작가의 작품들 속에선 드물지 않았다. 이런 재활용, 혹은 단골 설정의 익숙함이 지배하지만 이런 작품들의 묘미는 역시 불완전하고 왜곡된 기억을 더듬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 진실과 거짓들이 난무하고 교착(交錯)된 증언들 속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을 배반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후더잇(whodunit)’의 구조를 지니면서도 기괴함과 슬픔이 황금 비율로 섞인 분위기가 압도하는, 인상적인 수작이다. 작가의 장점, 특기가 골고루, 알맞게 발휘되어서 ‘묘기 대잔치’라 해도 무방하다. 매력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음산한 분위기 위로 잘 짜인 범죄 드라마가 진행되는데, 용의자들을 나열하고 그들에게 의심 갈 상황을 만드는 방식, 중요한 단서들을 대수롭지 않은 척 제공하는 동시에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방식들이 모두 ‘크리스티 적(-的)’이다.
특히 악의, 질투, 욕망, 이기심, 그리고 사랑이 뒤범벅된 범죄는 어둡고 추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범인의 심리와 동기가 잘 그려졌다.
사랑이 과하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고통일 수 있으니, 그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닌 건 분명하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걸까. 이기심을 버린다면 사랑으로 고통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작가의 특기인 로맨스+유머를 걷어낸 건조하고 음울한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려 슬픔과 고통의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글 서두에 발췌, 인용된 두 인물의 대화는 인간의 악마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인간의 성격(범죄성향 같은 악마적인 면을 포함하여)은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에 자라면서 받은 외부의 영향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사는 동안 계속 변한다.
인간의 본성에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는 가설을 사실로 친다면,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은 개인을 둘려싼 여러 조건들(내재적, 외부적)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발전하거나 퇴보할 것이다. 선한 부분보다 악한 부분이 더 두드러지는 환경 속에서 개인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까. 그의 악한 행동을 제지하고 옳지 못한 동기를 제거하려면 과연 성장의 어떤 단계에 수정이 가해져야 할까.
이런 상상 만으로도 여러 소설, 영화가 떠오른다. 동서고금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독자나 관객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궁극적으로 입증하려고 한 것은 (심지어 선한 인간이 악함을 눌러 이기는 교훈적인 이야기조차) 인간의 선함이 아닌 악함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악함은 대개 그 뿌리가 길고 깊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선한 행동은 이기심, 증오, 질투와 분노 등을 기어코 눌러내야 어렵사리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존 웹스터(Jong Webster)’의 희곡, ≪말피 공작부인(the Duchess of Malfie)≫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아포리즘으로 (꽤 중요하게) 인용된다.
어린 그웬다가 들은 범인의 독백은 아래와 같다.
❝Cover her face.
Mine eyes dazzle.
She died young❞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
내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젊어서 죽었다.
(‘존 웹스터’, ≪말피 공작부인≫, 4막2장)
발표 순으로 보면 가장 마지막(1976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작가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들 중의 한 명인 ‘미스 제인 마플’의 마지막 책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40년대에 쓰였다. 집필 순서대로라면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을 담은 책은 71년 작인 ≪복수의 여신(Nemesis) https://soulflower71.tistory.com/270≫이다.
2차세계대전 중에 작가는, 자신의 사후에 발표하기로 하고 두 작품의 원고를 써놓는데, 한 권이 이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에르큘 포와로(Hercule Poirot)’의 마지막 책인 ≪커튼(Curtain)≫이다. 작가의 사후, 이 작품보다 일 년 전(75년)에 출간된 커튼에서 포와로는 죽음을 맞는데, 실제 인물인 양, 신문에 부고 기사까지 실린다.
실제로 이 작품이 쓰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았던 모양이다. 크리스티 전문가들에 의하면 1940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43년 작인 ≪움직이는 손가락(the Moving Finger)≫이 살짝 언급되는 걸 보면 그 이후인 것 같기도 하고, 68년 작 ≪엄지손가락의 아픔(By the Pricking of My Thumbs)≫의 도입부가 그대로 이 책에서 인용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62년 작, ≪깨어진 거울(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에 죽은 걸로 나오는 ‘밴트리 대령’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등, 인물들의 타임라인에 혼란이 온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쓰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족.
이 작품을 위해 작가가 염두에 둔 제목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 다섯 번째 챕터의 제목 ‘회상 속의 살인(Murder in Retrospect)’이 그 하나이고, 존 웹스터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Cover Her Face)’도 물망에 올랐다고.
‘회상 속의 살인’은 작가의 43년 작, ≪다섯 마리의 아기 돼지(Five Little Pigs) https://soulflower71.tistory.com/498≫의 미국판 제목이 되었고,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는 나중에 ‘P.D. 제임스’의 데뷔작(62년) 제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