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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ㅣ 뒤란에서 소설 읽기 1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0년 12월
평점 :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남는 시간에 역사책을 읽는 ‘레이먼드’는 하나뿐인 친구 ‘안드레’가 전학을 가자 더욱 외로워진다. 어느 날 ‘루이스 벨레즈’라는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밀리’라는 노인과 마주친다. 레이먼드는 노인을 아무런 보상 없이 도와오다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 남자를, 이젠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의 위협에까지 몰린 시각장애인 밀리를 위해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한 마디로 ‘착한’ 소설이다. 친절과 선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감사로 중무장되어 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돕는다. 인물들은 우울하고 사건은 삭막하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사랑스러운 동시에 진중한 문제의식, 이야기의 흡인력과 후반부(재판 과정)의 긴장감도 좋은,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이야기 중반에 밝혀지는 루이스 벨레즈의 죽음은 우연과 나쁜 운이 개입된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스며들지 못하고 종종 눈에 튄다. 도시에 계획적으로(인위적으로) 세운, 마치 거대한 ‘랜드마크’처럼 보인다. 루이스의 죽음과 이후의 재판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 (특히 ‘내집단(inner group)’의 속성인)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무의미한 계급의식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장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작위성이 무색하게도 사건은 이야기 안에서 일종의 모티프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두 주인공의 관계가 시작되는 단서를 제공하고 이야기에 동력을 제공한다. (사건 주변의 것들도 포함하여) 지나치게 눈에 띄는 반면, 이야기에 넘치지만 딱 알맞은 힘을 부여한다.
레이먼드는 흑인이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한 십대다. 밀리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나치의 폭압에서 ‘돈’으로 살아남은, 그래서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백인의 이성애자, 맹인 여성 노인이다. 여기에 그들을 돕고자 하는 다른 백인들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들, 흑백이 섞여있는 레이먼드네 가족을 배경으로 연령과 피부색, 성정체성 같은 ‘다름’을 뛰어넘은 두 인물의 연대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지 거의 확실하다.
루이스 발데즈의 재판 과정에서 ‘객관적 진실’이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사물은 관찰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363쪽)’는 양자역학의 핵심 논리를 바탕으로 한 위의 질문은, 소위 우리가 중요시하는 ‘팩트(fact)’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고 객관적인 현실보다 인식의 주관성을 부각시킨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편하지 않느냐는 레이먼드의 질문에 밀리는 ‘오히려 보지 않음으로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눈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눈’은 죄가 없다. 인간은 눈을 통해 거의 모든 정보를 얻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정보들을 해석하는 관점, 인식하는 방법이다. 마음의 눈을 통해 보라는 말은 알지만 (도를 닦지 않은 이상)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건 비교적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눈물과 미소를 번갈아가며 자극하는 이 재미난 소설이 마냥 좋기만 할까.
한편으로는 참 얄궂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여지는 없을까.
사람이 이렇게, 마냥, 대책없이 착하기만 한 동물일까.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인 독자들의 눈에는 이 소설이 마냥 좋게만 보일까.
누군가를 도우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더 큰 낭패를 겪는 뉴스를 자주 접하는 이 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사리고 눈과 귀는 물론 입까지 닫는 게 최선이자 최후의 처신이라고 믿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어떻게 읽힐까.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했지만,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글을 적는 지금은 최면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선의’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사족.
최근에 읽은 ‘김성중’의 단편 <해마와 편도체>, ‘알 파치노’와 ‘크리스 오도넬’이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92년作)≫를 생각나게 한다.
특히 맹인 노인과 십대 소년의 감정적 연대,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좋은 영향력을 그리며 인간의 진실, 삶의 지혜를 말한다는 점에서 ≪여인의 향기≫와 공통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