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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작가로 고생하며 살고 있는 ‘다나’는 ‘케빈’과 새 가정을 꾸리던 1976년에서 순식간에 시간 이동(time slip)을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18세기 초의 미국. 남북전쟁 전, 다나가 속한 때로부터 거의 170년 전이다.
다나는 그곳에서 ‘루퍼스’란 이름의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몇 대를 거스른 조상. 많은 노예들을 거느린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인 루퍼스는 자유민인 흑인 ‘앨리스’에게서 딸 ‘헤이거’를 얻는데, 그녀가 바로 다나가 알고 있는 가계도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는 둘째 치고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루퍼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다나는 과거로 소환된다. 그들의 가족이 현재까지 존재해야 하므로 헤이거가 태어나기 전까지 루퍼스는 살아 있어야 했다. 반대로 다나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목숨의 위협을 느낄 때) 다나는 현재로 돌아올 수 있다.
이야기가 주는 긴장과 재미의 핵심은 다나의 신분이 역전되며 겪게 되는 모험에 있다. 현재에 그럭저럭 어엿한 미국 시민으로서 살고 있는 다나는 과거로 돌아감으로서 노예가 된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당시에 다른 무엇으로 사는 게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여성과 인권, 폭력과 착취, 순응과 저항, 사랑과 증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다.
특히 애증이 뒤섞인 다나의 감정과 정서적으로 나약한 루퍼스 사이의 감정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굵직굵직하고 스피디한 사건들 사이를 채워주고 숨 가쁘게 몰아치는 감정들로부터 쉼 역할을 해주는데, 리듬감 있는 완급의 조절과 그 효과가 꽤 괜찮다. 의무가 아닌 ‘필요’와 ‘당위’에 의한 감정들은 전혀 군더더기나 소모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작품엔 (허점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명들을 생략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것들로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돌리는 역할도 한다. 약간 교묘하게 보이지만 기술적이고 능숙하다.
솔직히 작품이 다루는 이슈는 새로운 건 없다. SF 장르에 특기를 가진 흑인 여성 작가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딱 그만큼을 다룬다. 하지만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가고 용감무쌍한 다나의 모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의 흡인력을 보장한다. 다나는 타고난 여전사는 아니다. 경험과 시행착오가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까.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한 흑인 여성에서 강인한 주인공으로 거듭 나는 다나의 변화도 보기 좋다.
작품 속 세계는 다나에게 최악의 시절이지만 비교적 안전하다. 18세기의 사람들은 다나에게 친절한 편이고, 다나는 진짜 심각한 위기를 겪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작품이 약간 안일한 느낌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며, 서부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고안한 놀이공원이 시스템 오류로 서서히 악몽으로 변하는 디스토피아 S.F.의 걸작, ‘율 브린너’의 영화, ≪이색지대(Westworld, 1973년 作)≫와 비교하게 됐는데, 이야기에 긴장을 부여하는 측면에서는 ≪이색지대≫가 훨씬 잘 했다고 생각한다.
S.F. 장르보다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정통적인 SF에서 기대하는 과학 기반의 설정들은 거의 없다. 작가는 타임 슬립이란 소재, 왜 다나여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파고 들면 플롯에 이런 저런 구멍들이 드러날 게 뻔하지만 작품은 그럴 새를 주지 않고 독자들을 몰아친다. 이 정도의 재미와 이 정도의 설득력, 이 정도의 메시지라면 ‘왜?’, ‘어떻게?’라는 질문 정도는 잊게 된다. (혹은 잊고 싶어진다)
사족.
원제인 ‘Kindred’는 상징이고 뭐고 굉장히 직설적인 제목이다. 보통 이런 제목은 촌스러워 보이는데 오히려 더 이상의 좋은 제목은 없을 정도로 딱 맞는다. 그런데 왜 번역 제목이 (이도저도 아닌) ‘킨’이 되었을까. 차라리 솔직하게 번역해서 ‘혈통’이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