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바위 얼굴 바벨의 도서관 7
너다니엘 호손 지음, 고정아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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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다섯 편이 실렸다.

<대지의 번제>를 읽고 바로 든 생각. ‘지구의 적은 바로 인간’ 맞구나. 물질문명의 추구, 무분별한 산업화를 바라보는 200년 전의 작가가 이미 이런 걱정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에 스며든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은 헌재의 독자들에게도 유효하다.

<히긴보텀 씨의 참사>는 추리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 1841년)>보다 무려 7년이나 먼저(1834년 최초 출판) 세상에 나왔다. 범죄, 탐정, 수사과정, 의외의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엔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요구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최초’라는 타이틀을 포우에게 넘겨준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결말이 다소 맥 빠지고 수사랄 것도 할 수 없는 주인공의 활약 탓인가 싶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미스터리 앤솔러지의 단골 작품이기도 하다.

<목사의 검은 베일>은 평생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산 목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어서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도 베일을 벗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가 가린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죄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목사라는 직업을 염두에 둔다면 가릴 게 아니라 오히려 세인들의 죄를 마주하고 교화에 더 힘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 어려운 작품이다.

<웨이크필드>는 가출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행동이 기행인 이유는 아내가 있는 집이 보이는 가까운 곳에 얻은 셋방에서 무려 20년을 칩거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남자의 행동을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 ‘배우자 유기’로 보고 있는데, 당시엔 여자들의 경제력은 오롯이 남편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집안의 경제력엔 문제가 없었던 듯, 남편이 없는 세월 동안 부인이 밥을 굶거나 삯일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이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는데, 남자의 이런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려 했을까. <목사의 검은 베일>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알레고리가 있을 것 같은데, 어렵다.

<큰바위 얼굴>은 이 책을 읽게 만든 작품이다. 오래 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기억이 났다. 시험도 쳤을 거고 여러 번 읽었을 텐데, 어떤 이야기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 거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은 감상은 어땠을까.
착한 동화 같다. 온 마을이 바위산에 새겨진 얼굴처럼 생긴 ‘현자’를 기다리는데, 이 사람인가 싶으면 아니고 저 사람인가 하면 또 아니고. 거듭 실망만 하다가 결국은 부자도 아니고 가방끈도 짧은, 그저 마을 토박이로 거의 평생을 살다가 이젠 노인이 된, 내세울 것 없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이었다는 결말.
그저 평범한 동화 같지만,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가 ‘그 사람’이 되라는, 모든 일에 과욕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임하면 언젠가는 하늘이 답해준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같은 유수한 격언들도 생각나게 하는, 교과서에 실릴 만한 딱 그만큼의 이야기. 절실하게 구한 것이 멀리 있었던 게 아니라 바로 곁에 있었다는 주제는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도 반복됐던 것 같다.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eca di Babele)>이라는 타이틀로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감수하고 해제를 단 시리즈의 한 권이다. 2000년대에 ’바다출판사‘라는 곳에서 전권 출판한 적이 있는데 중요한 책들은 품절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사족.

‘호손’의 <웨이크필드>에 영감을 받은 ‘E. L. Doctorow‘라는 작가가 동명의 소설을 발표했다. 게다가 2016년엔 동명의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영화 정보를 보니, 크레딧에 호손과 닥터로우 둘 모두 명시되어 있지만, 이런 경우 닥터로우의 창작물이 될 수 있는 건지, 외국엔 저작권의 의미가 우리와 다를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영화 시놉시스를 보니, 이야기의 골자는 거의 똑같던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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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서사 -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
듀나 외 지음 / 돌고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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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에게 서사를 주어야 할까’라는 쟁점 아래,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 등장하는 악, 악행, 악당의 다양한 모습들을 아홉 명의 저자들이 각각의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다.

에세이로 접근했다가 큰코다쳤다. 그보다 문화 평론, 사회 비평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고 그 수준이 다양하다. 대부분 쉽게 읽었지만, ‘강덕구’와 ‘윤아랑’의 글 들은 어려웠다. 책의 기획 의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글들도 더러 있었는데, 넓은 맥락에서 보면 아주 멀게 있지는 않았다.

포문을 여는 ‘듀나’의 글은 ‘악인에게 서사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즉답처럼 읽힌다. 그 내용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가는 둘째 치고 이 책의 전체적인 취지에 가장 근접한, 시원시원한 주장이 속 시원한 글이었다.

퀴어 평론으로도 읽히는 ‘전승민’의 글엔 소수자를 향한 다수의 시선에 숨은 우월한 자의식이 연민과 이해를 표방하면서도 어떤 식으로 악으로 변질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편견이겠지만 이성애자 작가가 쓴 퀴어서사에서 종종 발견했던(당시에는 오류라고 느꼈던) 지점이라 무척 공감이 갔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를 ‘가부장적 온정주의’로 이해해도 될지 궁금하다.

‘모녀 서사’를 중심으로, 악이 아닌 악, 고발도 징벌도 불가능한 악, 가족 내의 폭력을 고한 ‘최리외’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부자’나 ‘부녀’, ‘모자’도 아니고, 성차별적인 클리셰인 건 분명하지만 ‘모녀 관계’가 소설이나 대중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양상을 떠올리면 저자의 주장에 밑도 끝도 없지 않음을 알게 된다.

대형 서점의 글쓰기 서가에 보면, 악인을 어떻게 만들고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작법서, 내지는 지침서가 많이 보인다. 소위 ‘매력적인 빌런’의 중요성에 대한 방증인데, 중요한 건 ‘매력’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일 것이다. 자칫 악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저 정도 사정이면 어쩔 수 없었겠네’라는 말로 파렴치한 범죄를 퉁치려는 시도는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목격되는 일이니까. 이 책은 단순히 창작자나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현실의 우리에게 ‘악에 대한 감수성’을 벼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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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게일 허니먼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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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엘리너’는 ‘괴짜’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근면하지만 성실하지는 않고 왠지 외롭고 딱해 보여 손을 내밀고 싶지만 선뜻 그러기 어려운 인물. 주기적으로 술을 마시지만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는 않고 정해진 루틴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 재미있거나 유쾌한 사람도 아니고, 매력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타인들에게 쉽게 자신을 어필할 ‘뭔가’가 없는 사람. 선천적인 장애는 없지만 어떤 사고에서 연유된 듯 얼굴의 상처를 주홍 글씨 품듯 살고 있는 사람.

주 중에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각에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그게 영 쓴 약 삼키듯 해버려 뭔가 있지 싶다. 엄마랑 연을 끊고 사는 건 맞는데 그렇다면 굳이 연락을 근근히 잇고 있는 것도 뭔가 수상하다.

제목이나 표지, 도입부에 등장하는 주인공만 봐서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괴짜 주인공의 연애+인생 성공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이런 전혀 뜻밖의 이야기라니.

한 마디로, 요즘 뭐 읽을 책 없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노벨 수상작품이나 유명한 고전 취향이 아니라면, 그냥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는다면 읽어 보라고 사주고 싶은 책이다. 진입 장벽 낮으면서 수월하게 읽히고 결국 ‘재밌다, 잘 읽었다’ 이런 감상을 토하게 만드는.

이런 책 만나기가 과연 쉽던가.

이 책을 다 읽어낸 직후, 내가 휘갈긴 메모는 이랬다.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 우리는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고 무언가 성취하고 손에 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보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
그게 진정한 가치의 ‘성장’이 아닐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저게 다인 것 같고, 뭐, 그닥 새로울 것도 없다.
특별한 통찰도, 눈에 띄는 각성도 없다. 그냥 평범한 인물을 내세워 좋은 얘기하는 책이라면 주변에 널렸지만, 이 책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엘리너가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 그런 면에서 인물의 트라우마 극복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것조차 평범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제 주변에 높고 두꺼운 벽을 세웠던 엘리너가 결국엔 타인의 도움을 바라게 된다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절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도 친절이라는 것.

홀로서기가 완벽히 혼자임을 의미하는 건 아닐 터.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대사가 생각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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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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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퀴어.
그들의 가족, 이웃들, 그리고 연인들.
고유의 속도로 제각각 흐르다가 반가이 만나기도, 다시 헤어지기도 하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
그것들이 이뤄내는 커다란 강.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 아래 뭐가 있을까.
먹히고 썩어가는 죽은 짐승은 생전에 어떤 꿈을 꾸었을까.

이 책을 읽자마자 적은 메모인데, 더 이상의 세세한 면을 기억하자니 어렵다. (읽은 지 두 달 가까이 지났다)

대단히 방대한 시간대를 아우른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가족의 많은 구성원들이 나오는데 인물들이 많았던 것도 기억난다. 현실적인 공감이 가는 인물들도 있었고 동화 속의 인물처럼 캐리커처로 묘사되거나 모호하게 처리된 인물들도 있었다.
이런 모호함은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야기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데에도 한몫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인지 다 읽고도 풀리지 않은(답을 줄 수 없는) 의문이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야기 자체로는 뭐랄까, 잘 읽히기는 하지만 남는 건 크게 없었던, 대가족을 통해 그 시대를 대변했던, 예전의 대하 TV 드라마 같았달까. 시대물로서의 기능은 다소 약하고 인물에 집중했으며, 방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작가의 호흡이 다소 허겁지겁 했던 것 같다.

보통 타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은 (적어도 나에게)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인데(우리나라 역사도 잘 모르는데, 감히 다른 나라의 역사에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기우였다.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잘 읽혔고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그건 아마도 자국의 역사와 인간의 이야기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준, 인간과 삶의 여러 측면들을 잘 보여준 작가 덕분이겠지.

자국인 대만에서는 ‘퀴어 문학’으로 소개되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주변의 많은 인물들에 섞여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 소설을 정의하고 소개하기에 적당한 도구는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작가는 그들의 삶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사족.

음력 7월 보름은 불교의 ‘백중일’과 겹친다. 불교에서도 그날 망자들을 위해 예를 갖추고 제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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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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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어플을 통해 만난 남자들을 만나 돈을 갈취한, 소위 ‘꽃뱀’ 범죄의 피의자로 기소된 ‘가지이 마나코’. 가지이의 범죄가 더욱 유명세를 탄 건 남자들이 몇 명 죽었기 때문이다.
돈을 빼앗고 필요가 없어진 남자들을 죽인 걸까. 아니면 자연사? 사고사?
잡지사 기자인 ‘리카’가 독점 취재를 위해 가지이의 사건에 뛰어 들지만, 리카는 눈앞의 가지이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 데에 놀란다. 커다란 체구에 살집 풍부한 몸매는 일반적인 여성성과 거리가 먼, 성적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 남자들을 꼬드겼다고? 드러나지 않은 게 더 있음을 직감한 리카는 가지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의문의 범죄가 등장하고 의뭉스러운 용의자와 의욕적인 탐정이 잇따른다. 명목상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으니 잘 어울리고 바람직한 도입부다.
초반에 매력적인 설정들이 많다. 일단 가지이는 짐작 가능한 ‘팜므 파탈’ 형의 캐릭터가 아니다. 범죄자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어 결국 그 영향력에 휘둘리는 주인공의 권력 구조는 ≪양들의 침묵≫에서 보이는 ‘한니발 렉터’와 ‘클라리스 스털링’의 구도를 닮았다. 음식을 매개로 캐릭터를 설명하려는 취지도 신선하다. 젠더 감수성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요즘의 소설들과는 달리, 이 작품엔 인물들의 외모에 대해 작가는 직접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맛이 달랐고 용기 있어 보였다.

작품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도 꽤 독보적이다. ‘여성성’은 여자들의 약점일까, 무기일까. ‘사랑받음’, ‘받아들여짐’은 구속일까, 자유일까. 사랑을 얻는다는 것은 성취인 동시에 또 다른 굴레, 속박은 아닐까. 음식과 섹스를 넘나들며 자기 몸의 권리, 인간관계의 역학과 통찰을 담아내려 한 시도 역시 귀 기울일만 했다.

하지만 산만하다. 그리고 장황하다.
뒤로 갈수록 초점을 잃고 군더더기를 덧붙이며 우왕좌왕한다. 관념적인 주제를 실체화 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한 것처럼 읽힌다.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지더니 결론은 다소 성급하다.
재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분량(거의 600쪽에 육박)이 필요했었나, 하는 의문이 남는다. 가지들을 쳐내고 절반 정도의 길이면 딱 적당했을 것 같다.

사족.

일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실제 사건 개요는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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