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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서사 -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
듀나 외 지음 / 돌고래 / 2023년 8월
평점 :
‘악인에게 서사를 주어야 할까’라는 쟁점 아래,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 등장하는 악, 악행, 악당의 다양한 모습들을 아홉 명의 저자들이 각각의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다.
에세이로 접근했다가 큰코다쳤다. 그보다 문화 평론, 사회 비평에 가까운 글들이 많았고 그 수준이 다양하다. 대부분 쉽게 읽었지만, ‘강덕구’와 ‘윤아랑’의 글 들은 어려웠다. 책의 기획 의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글들도 더러 있었는데, 넓은 맥락에서 보면 아주 멀게 있지는 않았다.
포문을 여는 ‘듀나’의 글은 ‘악인에게 서사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즉답처럼 읽힌다. 그 내용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가는 둘째 치고 이 책의 전체적인 취지에 가장 근접한, 시원시원한 주장이 속 시원한 글이었다.
퀴어 평론으로도 읽히는 ‘전승민’의 글엔 소수자를 향한 다수의 시선에 숨은 우월한 자의식이 연민과 이해를 표방하면서도 어떤 식으로 악으로 변질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편견이겠지만 이성애자 작가가 쓴 퀴어서사에서 종종 발견했던(당시에는 오류라고 느꼈던) 지점이라 무척 공감이 갔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를 ‘가부장적 온정주의’로 이해해도 될지 궁금하다.
‘모녀 서사’를 중심으로, 악이 아닌 악, 고발도 징벌도 불가능한 악, 가족 내의 폭력을 고한 ‘최리외’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부자’나 ‘부녀’, ‘모자’도 아니고, 성차별적인 클리셰인 건 분명하지만 ‘모녀 관계’가 소설이나 대중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양상을 떠올리면 저자의 주장에 밑도 끝도 없지 않음을 알게 된다.
대형 서점의 글쓰기 서가에 보면, 악인을 어떻게 만들고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작법서, 내지는 지침서가 많이 보인다. 소위 ‘매력적인 빌런’의 중요성에 대한 방증인데, 중요한 건 ‘매력’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일 것이다. 자칫 악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저 정도 사정이면 어쩔 수 없었겠네’라는 말로 파렴치한 범죄를 퉁치려는 시도는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목격되는 일이니까. 이 책은 단순히 창작자나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현실의 우리에게 ‘악에 대한 감수성’을 벼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