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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당연한 소리)
(무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요즘 단편 한 편으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시대에 이 정도면 가성비 최고다. 다양한 인물들, 이야기들을 만날 기대로 마음이 잔뜩 부푼다.
근데 (솔직히) 기대에는 못 미쳤다.
모호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들의 ‘코어(core)’를 찾기가 쉽지 않아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의아한 작품이 있다. 물론 독자로서 나의 수준 탓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집약도가 떨어진다. 산만하다는 얘기다. 단편소설에서는 낭비할 겨를이 없다.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한눈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Something New’가 없다.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 등에 지속적이고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독자들이라면 고루할 수 있다. 내부는 낡았고 외면은 거칠다.
작품들마다 거의 공통된 설정들이 있다. 바닷가, 망해가는 조선소, 사람들이 거의 떠난 폐허 분위기의 동네, 청년과 중년 사이의 어중간한 나이, 그리고 가르치는 직업.
겹치는 설정들이 많아 작품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인다. 작품마다 이야기가 뚜렷하지 않아 더 그렇다. 임팩트가 부족해 뒤돌아서면 쉬이 잊히는, 휘발성이 강한 이야기들이 많다.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의 부재도 한몫한다.
숙련된, 준비된, 기대되는 신인의 느낌은 없다. 이 책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습작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작가, 완전 신인은 아니다. 데뷔 장편이 2019년에 출판됐다. 아무리 이 나라 문학 시장이 등단 시스템에 휘둘린다고 해도 전작(前作)을 무시하는 처사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 생각이나 감정을 짚어내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건 분명 작가의 재능이다. 모든 작품에서 그 재능이 발휘되는 건 아니지만 눈에 자주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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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마음에 없는 소리>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네 인물의 ‘케미’가 좋았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화와 알콩달콩한 일상, 잔잔하게 깔린 로맨틱한 정서에, 더 이상 어리지 않지만 아직은 삶에 미숙한 자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잘 스며들어 있다. 무작정 희망을 외치지 않는 작가의 현실적인 태도도 균형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은 미래, 혹은 ‘끝’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인 ‘나’는 자신이 ‘겪은 것, 감당한 것, 견뎌낸 것(25쪽)’에 대해서만 자신하는, 끝난 상태에 이르러야 안심을 하는 인물이다. 자궁 근종이 발견되고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은 연인(진영)은 화를 내고(이게 삐지고 화를 낼 일인가, 이젠 완전 마음 놓아도 되는 거냐고 걱정해줘야 맞는 것 아닌가 싶지만)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끝’은 고착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 이후로도 끝난 무언가는 계속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과정’에 있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하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해변에서 주운 것들은 버려진 것, 끝장이 나버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들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아직 완벽한 상태의 ‘끝맺음’을 맞은 게 아니다. 해변에 다시 버려진 그것들은 또 다시 무수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 미래는 미지이다. 알 수 없슴, 예측 불허의 상태는 두려움만 남기지 않는다. 기대와 희망도 있다. 진영과 헤어진 화자는 새로운 애인과 만들어갈,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들로 설렌다.
굉장히 멋을 부린 <작정기>는 숨겨만 왔던, 그러다가 아쉽게, 어이없게 끝나버린 애정에 대한 뒤늦은 고백처럼 읽힌다. 이 작품 역시 막힘없이 읽히나 큰 의미는 없는, 소품처럼 보인다.
일본에서 성냥갑이 여전히 일상적인 물건인지 궁금했고(아무리 아날로그의 왕국이래도 라이터가 디지털인 것도 아닐 텐데) ‘원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떤’ 사고였는지 구체적이지 않아 이야기의 국면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이렇게 다뤄질 소모성 캐릭터가 아님에도 그의 죽음이 소홀하게, 그저 소비되는 것처럼 보여 거슬린다. 소설 속 인물이라도 죽음을 다룰 때엔 신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차에 대한 설명의 부재, 신목처럼 묘사된 녹나무 같은 설정은 약간 과한 치장처럼 보인다.
<그런 나약한 말들>은 관계의 피상에 의지하다가 비로소 그 이면을 목격하는 내면의 균열을 그린 이야기로 읽힌다. 마냥 애정을 줄 수만은 없는 화자는 이 작품의 가장 큰 흠이었다.
술술 잘 읽히는 <굴 드라이브>는 이야기의 중심에 작가의 생각이 잘 와닿지 않았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그게 필요하다는 얘긴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얘기인지 모호하다.
중고거래 상대를 기다리며 우연히 마주친 세 할머니들과의 한나절을 그린 <결로>, 작품집 안에서, ‘톤(tone)’으로 보나 문장 구성으로 보나 가장 이질적인 성격의 <내가 울기 시작할 때>는 도무지 의미 파악이 되지 않은, 어렵거나 과하게 비튼 작품이었다.
마지막 두 작품인 <사랑하는 일>과 <공원에서>는 목적이 분명한,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명확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일>은 작가가 작정하고 쓴 퀴어 소설로 읽힌다.
<사랑하는 일>엔 레즈비언 커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 별나다. 그런 종류의 사랑에 왈가왈부 토를 다는 건 전혀 의미가 없을 테다. 작가의 목적은 조금 유별난 방식의 사랑도 인정해주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고 독자로서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굉장히 위선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은호는 자신의 커밍아웃에 (적극적으로 혐오를 드러낸 할머니를 제외하고)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한 가족들에게 (적의에 가까운)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상속을 노린다. (그럴 수 있나? 이건 정말 진정한 ‘PRIDE’의 문제다) 게다가 은호는 중매로 결혼해 살다가 최근에 이혼한 부모의 사랑을, 아내를 사랑했다는 아빠의 고백(245쪽)을 묵살하고 ‘거짓된 사랑’으로 폄하한다.
자신이 존중받길 바란다면 상대도 존중해줘야 한다. 자신의 것을 돋보이기 위해 굳이 남의 것을 깎아내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은호는 부모가 결혼한 과정이나 그들의 사랑에 대해, 태어나기 전이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저런 언행은 오만해 보인다.
커밍아웃에 대해서도 은호는 상대의 가치관이나 개인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 평생 이성애자 사회에서 이성애자 가치관을 갖고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이, 더군다나 제 자식, 누나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열렬한 환영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찬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 이야기 구석구석엔 은호에 대한 식구들 나름의 노력이 보인다. 오히려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은호다. 맥락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남’ 타령을 하고 있는 것(233쪽)보다,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권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24쪽) 것보다 더 나빠 보인다. 이 작품은 내게 대단히 기만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인 <공원에서> 역시 그렇다.
작가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고 그 의도, 핵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화자는 다른 의미에서의 ‘가해자’다. 자신이 당한 폭력은 굉장한 사건이고 자신이 불륜에 가담하여 이야기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낯모를 (같은) 여성에게 정서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작가가 굳이 이런 설정을 왜 포함시켰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설정을 화자의 삶에 포함시키기로 했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이나 설명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인물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도록, 그 분노와 억울함에 동승해 그를 응원할 수 있도록 설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기원을 알 수 없는 말습관, 관용구를 가지고 시비거리로 삼는다. 이 시대 사람들이 책임질 수 없는 걸로 책임을 묻는다. 언어와 표현은 일종의 문화유산이다. 더 이상 쓰지 않도록, 속뜻을 알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도하고 시간을 두고 볼 일이다. 그런 말들이 사소하게 통용된 시대적 특징과 한 시기를 지배했던 가치관과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전에서 지운다고 말 습관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거스를 수도 없는 과거를 비난하는 건 트집 이상은 아니다.
화자에 공감이 안 되니 그가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질 않는다. 섣부른 독자라면 이 사람이 그저 ‘땡깡’부리는 걸로 여길 테다. 동정과 연민을 느껴야 할 이야기에서 ‘내로남불’의 허울을 씌우다니. 그저 독자 탓일까.
삶은 연속의 과정이다. 삶은 여러 사건을 아우른다. 이야기, 한 편의 소설에서 독자들이 목격하는 것은 삶의 한 토막이다. 그 조각난 일면에 많은 감정과 사유, 사건이 포함된다. 그것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세계에 드러내고 싶은 자신 속 세계를 내보인다. 그것들은 함부로 쓰이지 않는다. 작가는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하물며 단편이라면 그 선택은 더욱 신중하고 집약적이어야 한다. 인물, 대화, 설정, 소품 하나라도 허투루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저 설정이 그래’ 이런 말은 빈약한 핑계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따로 있다. 그건 작품들마다 저변에 흐르는 ‘증오’와 ‘혐오’의 정서였다.
레즈비언 커플을 본 해변가의 ‘남자’가 침을 뱉는다. 딸로 추정되는 어린 여자아이가 동행이었다. 여자아이는 잠재적으로 레즈비언 커플을 보면 침을 뱉는다, 식의 공식을 학습할 수 있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16쪽)
주인공 커플을 본 ‘남자’ 노인이 지팡이를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17쪽)
외국인 ‘남자’ 노동자들이 화자를 성희롱한다. (<굴 드라이브>, 43쪽)
화자의 식당에 손님으로 온 ‘남자’ 노인이 갑질을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 170쪽)
자신의 커밍아웃을 시들한 반응으로 일관한 (할머니를 제외한) 이성애자 가족 구성원들에게 염오의 감정을 드러내며,(<사랑하는 일>) 맥락도 없이 남동생을 ‘한남’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작품, 233쪽)
기타 등등…,
이런 설정, 이런 장면, 이런 에피소드들을 정말 그냥, 별다른 의미 없이 썼을 수 있다. 한 작품이라면 독자로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편의 작품이 실린 작품집 안에서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거듭된다면 독자로서 이런 불평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의도가 목적이 쓰임새가 분명해야 한다. 용도가 교묘히 숨겨져 있나. 그래서 저질의 독자가 저급한 눈으로, 깊은 속뜻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차별과 혐오의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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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설정, 저 장면, 저 에피소드들이 다른 모양새였거나 차라리 없다면 작품의 완성도에 해가 됐을까.
저 설정, 저 장면, 저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에 꼭 필요한가. 필연적인 도움을 주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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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 작품은 작가의 도구이고 무기이면서 세상에 자신을 비춘 반영이다.
저질과 저급의 ‘콜라보’로 무장한 독자로서 오독을 한 결과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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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짓는(作)’ 사람이라면 독자는 ‘읽는(讀)’ 동시에 ‘짓는(作)’ 사람이다. 소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는 작가가 아닌 독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 영역엔 작가가 할 일이 거의 없다. 소설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와 독자의 손에 들리고, 전자책 리더기 화면에 활자가 뜨는 순간부터 그 창작물은 더 이상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독자가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근거는 작가가 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제 맘대로 쓴다면 독자는 제 식대로 읽는다.
김성중 작가는 작품 안에서 (≪에디 혹은 애슐리, 문학동네, 2020년6월 刊≫ 안, <상속, 175쪽> 중에서) ‘소설은 나(작가)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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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일은 주장이 아닌 설득의 과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설득엔 균형이 필요하다. 감정에 빠진 작가는 자신만 감동받는, 공감을 요구하는 그런 소설만 쓴다. 당위나 개연은 내팽개쳐진다. 그래서 때때로 실패한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같은 이유로 나는 화자가 ‘나’인 소설은 가능한 피한다. 읽더라도 각오가 필요하다) 작가는 제 안에서 나와 밖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소설 쓰는 일은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 작업은 대단히 전략적인 일이다. 이야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만들고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여 ‘내 편’에 설 수 있게 만들려면 ‘꾀바름’이 필요하다. 감성과 함께 예리한 ‘이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소설은 감성만으로, 혹은 이성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작품을 읽는 데에는 감성과 이성 모두를 가동시켜야 한다. 공감 이전에 모든 이야기는 말이 되어야 한다. 소설엔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내 생각엔 헛소리다. 단 수학적인 논리는 아니다. 행동과 사유엔 동기가 필요하고 그 동기는 납득하고 설득당할 만해야 한다. 공감 이전에 이입이 가능해야 하고 마음이 열려야 한다. 기계적인 반응을 진짜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은 문자를 매개로 하는 이야기의 예술이고 인물이나 설정, 문장 등은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란 인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며 결국 어떤 결말을 통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대한 흐름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게 (좋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세 편이나 실려 있다. 독자들 별점도 좋고 출판사나 평단의 호들갑 만큼의 감상은 건지지 못했다. 다소 과대평가된 작품집이지 않나 생각된다. 당연히 내 주관적인 감상이다.
사족 1.
소설 쓰는 수업의 합평 시간이라면 지적받을 것들이 눈에 더러 띈다. 사소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정확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문장을 구사해야 하는 건 작가의 의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선풍기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래 머무르기에 그 앞으로 기어가 앉아 내 쪽으로 선풍기를 고정했다. (95쪽)
심각한 오류는 아니지만 작가가 말하는 건 아마도 ‘선풍기의 머리’였을 것이다. 인물이 필요했던 건 ‘선풍기 바람’이었을 테니까.
사족 2.
소설 시장이 ‘등단 시스템’에 휘둘리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소위 등단 작가이면서 대기업 형 출판사에 의해 ‘간택’되지 않는 작가들, 흔히 말해 ‘메인스트림’이 아닌 작가들에게 요즘 슬슬 시선이 간다. 기업형 출판사+대형 서점+주류 평단의 콜라보는 독자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독자로서 그들이 출판한 책, 그들이 진열한 책, 그들이 해설을 써준 책을 사보라고 강요받는 기분이 든달까. 눈에 많이 노출되는 건 광고의 힘이지 작품이 힘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여러 작가들을 탐험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게 독서의 진짜 묘미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