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뒤란에서 소설 읽기 1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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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남는 시간에 역사책을 읽는 ‘레이먼드’는 하나뿐인 친구 ‘안드레’가 전학을 가자 더욱 외로워진다. 어느 날 ‘루이스 벨레즈’라는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밀리’라는 노인과 마주친다. 레이먼드는 노인을 아무런 보상 없이 도와오다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 남자를, 이젠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의 위협에까지 몰린 시각장애인 밀리를 위해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한 마디로 ‘착한’ 소설이다. 친절과 선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감사로 중무장되어 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돕는다. 인물들은 우울하고 사건은 삭막하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사랑스러운 동시에 진중한 문제의식, 이야기의 흡인력과 후반부(재판 과정)의 긴장감도 좋은,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이야기 중반에 밝혀지는 루이스 벨레즈의 죽음은 우연과 나쁜 운이 개입된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스며들지 못하고 종종 눈에 튄다. 도시에 계획적으로(인위적으로) 세운, 마치 거대한 ‘랜드마크’처럼 보인다. 루이스의 죽음과 이후의 재판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 (특히 ‘내집단(inner group)’의 속성인)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무의미한 계급의식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장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작위성이 무색하게도 사건은 이야기 안에서 일종의 모티프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두 주인공의 관계가 시작되는 단서를 제공하고 이야기에 동력을 제공한다. (사건 주변의 것들도 포함하여) 지나치게 눈에 띄는 반면, 이야기에 넘치지만 딱 알맞은 힘을 부여한다.

레이먼드는 흑인이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한 십대다. 밀리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나치의 폭압에서 ‘돈’으로 살아남은, 그래서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백인의 이성애자, 맹인 여성 노인이다. 여기에 그들을 돕고자 하는 다른 백인들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들, 흑백이 섞여있는 레이먼드네 가족을 배경으로 연령과 피부색, 성정체성 같은 ‘다름’을 뛰어넘은 두 인물의 연대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지 거의 확실하다.

루이스 발데즈의 재판 과정에서 ‘객관적 진실’이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사물은 관찰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363쪽)’는 양자역학의 핵심 논리를 바탕으로 한 위의 질문은, 소위 우리가 중요시하는 ‘팩트(fact)’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고 객관적인 현실보다 인식의 주관성을 부각시킨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편하지 않느냐는 레이먼드의 질문에 밀리는 ‘오히려 보지 않음으로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눈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눈’은 죄가 없다. 인간은 눈을 통해 거의 모든 정보를 얻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정보들을 해석하는 관점, 인식하는 방법이다. 마음의 눈을 통해 보라는 말은 알지만 (도를 닦지 않은 이상)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건 비교적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눈물과 미소를 번갈아가며 자극하는 이 재미난 소설이 마냥 좋기만 할까.
한편으로는 참 얄궂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여지는 없을까.

사람이 이렇게, 마냥, 대책없이 착하기만 한 동물일까.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인 독자들의 눈에는 이 소설이 마냥 좋게만 보일까.
누군가를 도우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더 큰 낭패를 겪는 뉴스를 자주 접하는 이 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사리고 눈과 귀는 물론 입까지 닫는 게 최선이자 최후의 처신이라고 믿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어떻게 읽힐까.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했지만,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글을 적는 지금은 최면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선의’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사족.

최근에 읽은 ‘김성중’의 단편 <해마와 편도체>, ‘알 파치노’와 ‘크리스 오도넬’이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92년作)≫를 생각나게 한다.
특히 맹인 노인과 십대 소년의 감정적 연대,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좋은 영향력을 그리며 인간의 진실, 삶의 지혜를 말한다는 점에서 ≪여인의 향기≫와 공통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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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케이크
샤메인 윌커슨 지음, 서제인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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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와 ‘바이런’은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해양 학자로 승승장구 중인 바이런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고한 애인과 직장에서 번번이 누락된 승진으로 의기소침한 상태이고, 생활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하는 여동생, 베니는 커밍아웃 이후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들과 척을 진 상태다.
장례식을 위해 어렵게 한자리에 모인 남매는 모친의 변호사로부터 유언이 녹음된 음성 파일을 전달받는데, 자식들도 몰랐던 어머니의 ‘진짜 삶’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가족의 기원, ‘나’라는 존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가족의 해체는 물론, 그 정통성마저 의심하는 요즘에 ‘가족’이라니. 고루하게 들리지만 꽤 획기적이다. 이야기는 진행하면서 가족 이야기의 단순한 틀을 벗어나 그 이상의 주제, 차별과 억압, 계급과 제도적 관습, 환경 문제,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이슈로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살 만한 삶’,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큰 공감이 갔다. 작가는 안주하지 않는 삶을 권한다. 일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문을 열고 나아가기를 권한다. 삶은 모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탐험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들에 대해서도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순간이라도 두 삶이 얽힌다는 것을 의미하며, 영향의 주고받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해주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화자들이 교대로 등장해 다양한 시공간을 무대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조연과 단역들의 삶에 대해서도 소홀함이 없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고 의미 있으며 (독자들이 읽기에) 재미있는 이유는 그들의 역할이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이상으로, 작가는 이야기라는 전체 그림의 한 구석에 드리워진 작은 그림자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세밀함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타인들의 역할과 그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있다.

제목인 ‘블랙케이크(Black Cake)’에 대한 자세한 조리법은 소개되지 않지만, 대략 언급된 바에 의하면 타지 않게 끓여 카라멜화(-化; caramelization)된 설탕이 핵심인 것 같다. 이로 인해 완성된 케이크의 색깔이 결정된다. 또 여기에 카리브 해 연안의 섬 국가들의 특산품인 ‘럼’이나 ‘포트와인’에 절인 과일들(특히 자두)이 들어간다.
보통의 케이크와는 달리 풍미가 상당히 독특할 것 같은 이 음식은 이야기 안에서 서사를 꿰뚫는 상징적 소재이며 한 개인의 뿌리를 정의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블랙케이크는 카리브 해 제도(諸島)국들의, 말하자면 지역 특산품이지만 그 재료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이며, 밀은 서아시아, 자두는 중국, 포트와인은 남부유럽, 기타 등등.
그렇게 많은 지역에서 온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그 나라의 토종 음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다양함과 기원의 혼재함은, 중국인과 카리브 해의 흑인, 백인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주인공인 ‘커비(혹은 엘리너)’의 가계에서도 보인다. 과연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작가는 ‘정통성’이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정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배타적이게 되고, 배타적인 태도는 차별과 억압, 나아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 마음과 문을 열고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것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자세라고 작가는 전한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 광활한 ‘바다’가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짐작해 본다. 그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듯이 삶에 맞부딪히고 뛰어들어 탐험하라는 독려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다.

작품을 위한 작가의 전략도 눈여겨 볼만하다. ‘머리’를 썼다는 얘긴데, 작품 구석구석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전략이 노골적으로 도드라지면 촌스럽게 보이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 인상적인 데뷔작에서 그런 함정을 보기 좋게 피해가면서 후반 100여 쪽은, 정말이지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사족.

첫 작품이 이다지도 강렬하면 독자로서 작가가 살짝 (걱정 아닌) 걱정이 되는데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다음 작품은 어쩌려고, 이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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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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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는 세 딸과 훌륭한 남편을 둔, 완벽한 아내이면서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이다.
어느 날, 다락방에서 우연히, 수신인이 그녀인 남편의 손 편지를 발견하는데, ‘내가 죽은 후에 열어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남편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얼까. 그것도 자신이 죽은 후에라니. 호기심과 양심 사이에서 세실리아는 전전긍긍한다.

‘테스’는 남편, 사촌과 함께 안정적인 사업을 꾸려나가고 있다. 어느 날 사촌인 ‘펠리시티’와 사랑에 빠졌다는 남편의 고백을 듣고 ‘멘붕’이 온다. 더 심한 건 어릴 적 쌍둥이처럼 지냈던 펠리시티를 미워하지도 못한다는 사실. 테스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 친정으로 도망친다.

학교 비서인 ‘레이첼’은 삼십 여 년 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딸 ‘자니’의 죽음과 그 슬픔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면서, 당시 자니를 사랑했고 지금은 같은 학교의 체육선생인 ‘코너’를 의심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 남은 아들 내외까지 사랑하는 손자를 데리고 멀리 가려고 한다.

인물이 소개되고 평화롭고 여유 있는 서두를 지나면 세실리아가 남편의 편지를 (기어이) 읽어내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무관한 듯 보였던 세 여자의 삶이 하나로 얽히고 과거의 어떤 사건이 소환된다. 이야기는 세실리아의 딜레마를 핵으로, 과거 ‘자니’의 죽음과 그 주변으로 사랑과 배신, 범죄와 비밀, 이해와 관용, 복수와 정의, 결혼의 의미, 가족에 대한 의무 등으로 버무려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다채로움에 빠른 전개, 치밀한 복선, 인물들의 심리는 섬세하다. 클라이맥스 이후로는 정말로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어려운데’ 도발적인 결말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일 수도 있다. 과연 이렇게까지? 진실의 대가가 너무 크다. 너무 큰 희생이 따른다. 게다가 그 파급력이라니. 영문도 모르고 불행해지는 사람들은 무슨 죄로 그런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나.
하지만 엔딩까지 읽고 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솔직히 다소 끔찍하긴 해도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겠다 싶었다. 엔딩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극적으로 과장됐긴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물들이 보이는 사고와 행동은 지극히 현실적이라 불만과 의심은 잠식된다.

인간은 과연 정의로울까. 우리의 죄악은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우리의 판단과 결정은 과연 옳을까. 우리가 바르다고 믿는 우리 마음은 정말로 바른가. 자신이 옳다는 판단은 지나친 자기 신뢰나 자기합리화의 결과물 아닐까. 혹시 어떤 암시에 휘둘린 나머지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힌트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과연 정의란 게 있을까. 조물주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지만 모든 곡식을 곱게 빻는다는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쳐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 아닌가.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정의 구현’, ‘관용’ 같은 메시지를 작가가 의도했을지는 몰라도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어가는 것은 ‘복수’일 것이다. 물론 방향도 방법도 옳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런데 그게 정말 실패일까? 그렇다고 성공으로 볼 수 없고. 결말의 이런 아이러니와 인물들의 딜레마는 엔딩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독자로서 확신하는 것은 단 하나다. 모두가 유죄.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질 영원한 불행과 암담한 미래. 그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사족.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추리소설’로 취급하고 있는데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미권 시장은 사정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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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좀 환상하는 여자들 4
라일라 마르티네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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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손녀가 교대로 화자로 나선다. 4대에 걸친 가족사가 펼쳐지는데 할머니는 주로 과거, 손녀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 그들의 가족사를 주변으로 스페인의 근대사(프랑코 정부의 독재), 자본주의의 폭력, 핍박받는 여성의 삶, 계급, 가난과 억압 등의 이슈가 서사의 층위를 다양하게 한다. 200쪽 정도의 짧은 분량 안에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삶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야기가 오랜 세월을 거슬러야 할 때, 반드시 대하소설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두 여자가 사는 집은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면서 비밀과 악의를 품은 또 하나의 중요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어둠의 그늘이 곳곳에 도사리고 정체 모를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출몰한다.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미래를 예지하는 할머니의 능력은 이야기에 꼭 필요하다. 소설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역시 폭력으로 맞서고 복수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가 압도한다. 슬픔과 억울(抑鬱), 분노,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인물들을 지배한다.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뿜어 나오는 울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단순히 남성들을 가해자로 만들 수도 있고 그런 남성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여성들을 소외시킨 거대 시스템에 화살을 돌릴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병폐인 가난과 그 대물림, 계급 차이에서 빚어지는 폭력, 독재와 폭정, 나라에 의한 폭력 등은 잘못된 정치에서 나오는 문제로 보이고 그것은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딕 호러를 기반으로 환상소설, 여성서사, 사회고발소설 등의 특징들을 두루 아우른다. 자국인 스페인에서는 SF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니, SF 장르의 폭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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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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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당연한 소리)



(무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요즘 단편 한 편으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시대에 이 정도면 가성비 최고다. 다양한 인물들, 이야기들을 만날 기대로 마음이 잔뜩 부푼다.

근데 (솔직히) 기대에는 못 미쳤다.



모호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들의 ‘코어(core)’를 찾기가 쉽지 않아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의아한 작품이 있다. 물론 독자로서 나의 수준 탓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집약도가 떨어진다. 산만하다는 얘기다. 단편소설에서는 낭비할 겨를이 없다.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한눈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Something New’가 없다.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 등에 지속적이고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독자들이라면 고루할 수 있다. 내부는 낡았고 외면은 거칠다.



작품들마다 거의 공통된 설정들이 있다. 바닷가, 망해가는 조선소, 사람들이 거의 떠난 폐허 분위기의 동네, 청년과 중년 사이의 어중간한 나이, 그리고 가르치는 직업.

겹치는 설정들이 많아 작품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인다. 작품마다 이야기가 뚜렷하지 않아 더 그렇다. 임팩트가 부족해 뒤돌아서면 쉬이 잊히는, 휘발성이 강한 이야기들이 많다.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의 부재도 한몫한다.



숙련된, 준비된, 기대되는 신인의 느낌은 없다. 이 책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습작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작가, 완전 신인은 아니다. 데뷔 장편이 2019년에 출판됐다. 아무리 이 나라 문학 시장이 등단 시스템에 휘둘린다고 해도 전작(前作)을 무시하는 처사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 생각이나 감정을 짚어내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건 분명 작가의 재능이다. 모든 작품에서 그 재능이 발휘되는 건 아니지만 눈에 자주 띈다.



*****



표제작인 <마음에 없는 소리>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네 인물의 ‘케미’가 좋았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화와 알콩달콩한 일상, 잔잔하게 깔린 로맨틱한 정서에, 더 이상 어리지 않지만 아직은 삶에 미숙한 자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잘 스며들어 있다. 무작정 희망을 외치지 않는 작가의 현실적인 태도도 균형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은 미래, 혹은 ‘끝’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인 ‘나’는 자신이 ‘겪은 것, 감당한 것, 견뎌낸 것(25쪽)’에 대해서만 자신하는, 끝난 상태에 이르러야 안심을 하는 인물이다. 자궁 근종이 발견되고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은 연인(진영)은 화를 내고(이게 삐지고 화를 낼 일인가, 이젠 완전 마음 놓아도 되는 거냐고 걱정해줘야 맞는 것 아닌가 싶지만)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끝’은 고착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 이후로도 끝난 무언가는 계속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과정’에 있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하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해변에서 주운 것들은 버려진 것, 끝장이 나버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들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아직 완벽한 상태의 ‘끝맺음’을 맞은 게 아니다. 해변에 다시 버려진 그것들은 또 다시 무수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 미래는 미지이다. 알 수 없슴, 예측 불허의 상태는 두려움만 남기지 않는다. 기대와 희망도 있다. 진영과 헤어진 화자는 새로운 애인과 만들어갈,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들로 설렌다.



굉장히 멋을 부린 <작정기>는 숨겨만 왔던, 그러다가 아쉽게, 어이없게 끝나버린 애정에 대한 뒤늦은 고백처럼 읽힌다. 이 작품 역시 막힘없이 읽히나 큰 의미는 없는, 소품처럼 보인다.

일본에서 성냥갑이 여전히 일상적인 물건인지 궁금했고(아무리 아날로그의 왕국이래도 라이터가 디지털인 것도 아닐 텐데) ‘원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떤’ 사고였는지 구체적이지 않아 이야기의 국면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이렇게 다뤄질 소모성 캐릭터가 아님에도 그의 죽음이 소홀하게, 그저 소비되는 것처럼 보여 거슬린다. 소설 속 인물이라도 죽음을 다룰 때엔 신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차에 대한 설명의 부재, 신목처럼 묘사된 녹나무 같은 설정은 약간 과한 치장처럼 보인다.



<그런 나약한 말들>은 관계의 피상에 의지하다가 비로소 그 이면을 목격하는 내면의 균열을 그린 이야기로 읽힌다. 마냥 애정을 줄 수만은 없는 화자는 이 작품의 가장 큰 흠이었다.



술술 잘 읽히는 <굴 드라이브>는 이야기의 중심에 작가의 생각이 잘 와닿지 않았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그게 필요하다는 얘긴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얘기인지 모호하다.



중고거래 상대를 기다리며 우연히 마주친 세 할머니들과의 한나절을 그린 <결로>, 작품집 안에서, ‘톤(tone)’으로 보나 문장 구성으로 보나 가장 이질적인 성격의 <내가 울기 시작할 때>는 도무지 의미 파악이 되지 않은, 어렵거나 과하게 비튼 작품이었다.



마지막 두 작품인 <사랑하는 일>과 <공원에서>는 목적이 분명한,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명확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일>은 작가가 작정하고 쓴 퀴어 소설로 읽힌다.



<사랑하는 일>엔 레즈비언 커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 별나다. 그런 종류의 사랑에 왈가왈부 토를 다는 건 전혀 의미가 없을 테다. 작가의 목적은 조금 유별난 방식의 사랑도 인정해주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고 독자로서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굉장히 위선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은호는 자신의 커밍아웃에 (적극적으로 혐오를 드러낸 할머니를 제외하고)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한 가족들에게 (적의에 가까운)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상속을 노린다. (그럴 수 있나? 이건 정말 진정한 ‘PRIDE’의 문제다) 게다가 은호는 중매로 결혼해 살다가 최근에 이혼한 부모의 사랑을, 아내를 사랑했다는 아빠의 고백(245쪽)을 묵살하고 ‘거짓된 사랑’으로 폄하한다.

자신이 존중받길 바란다면 상대도 존중해줘야 한다. 자신의 것을 돋보이기 위해 굳이 남의 것을 깎아내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은호는 부모가 결혼한 과정이나 그들의 사랑에 대해, 태어나기 전이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저런 언행은 오만해 보인다.



커밍아웃에 대해서도 은호는 상대의 가치관이나 개인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 평생 이성애자 사회에서 이성애자 가치관을 갖고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이, 더군다나 제 자식, 누나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열렬한 환영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찬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 이야기 구석구석엔 은호에 대한 식구들 나름의 노력이 보인다. 오히려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은호다. 맥락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남’ 타령을 하고 있는 것(233쪽)보다,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권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24쪽) 것보다 더 나빠 보인다. 이 작품은 내게 대단히 기만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인 <공원에서> 역시 그렇다.

작가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고 그 의도, 핵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화자는 다른 의미에서의 ‘가해자’다. 자신이 당한 폭력은 굉장한 사건이고 자신이 불륜에 가담하여 이야기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낯모를 (같은) 여성에게 정서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작가가 굳이 이런 설정을 왜 포함시켰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설정을 화자의 삶에 포함시키기로 했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이나 설명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인물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도록, 그 분노와 억울함에 동승해 그를 응원할 수 있도록 설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기원을 알 수 없는 말습관, 관용구를 가지고 시비거리로 삼는다. 이 시대 사람들이 책임질 수 없는 걸로 책임을 묻는다. 언어와 표현은 일종의 문화유산이다. 더 이상 쓰지 않도록, 속뜻을 알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도하고 시간을 두고 볼 일이다. 그런 말들이 사소하게 통용된 시대적 특징과 한 시기를 지배했던 가치관과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전에서 지운다고 말 습관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거스를 수도 없는 과거를 비난하는 건 트집 이상은 아니다.



화자에 공감이 안 되니 그가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질 않는다. 섣부른 독자라면 이 사람이 그저 ‘땡깡’부리는 걸로 여길 테다. 동정과 연민을 느껴야 할 이야기에서 ‘내로남불’의 허울을 씌우다니. 그저 독자 탓일까.



삶은 연속의 과정이다. 삶은 여러 사건을 아우른다. 이야기, 한 편의 소설에서 독자들이 목격하는 것은 삶의 한 토막이다. 그 조각난 일면에 많은 감정과 사유, 사건이 포함된다. 그것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세계에 드러내고 싶은 자신 속 세계를 내보인다. 그것들은 함부로 쓰이지 않는다. 작가는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하물며 단편이라면 그 선택은 더욱 신중하고 집약적이어야 한다. 인물, 대화, 설정, 소품 하나라도 허투루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저 설정이 그래’ 이런 말은 빈약한 핑계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따로 있다. 그건 작품들마다 저변에 흐르는 ‘증오’와 ‘혐오’의 정서였다.



레즈비언 커플을 본 해변가의 ‘남자’가 침을 뱉는다. 딸로 추정되는 어린 여자아이가 동행이었다. 여자아이는 잠재적으로 레즈비언 커플을 보면 침을 뱉는다, 식의 공식을 학습할 수 있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16쪽)

주인공 커플을 본 ‘남자’ 노인이 지팡이를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17쪽)

외국인 ‘남자’ 노동자들이 화자를 성희롱한다. (<굴 드라이브>, 43쪽)

화자의 식당에 손님으로 온 ‘남자’ 노인이 갑질을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 170쪽)

자신의 커밍아웃을 시들한 반응으로 일관한 (할머니를 제외한) 이성애자 가족 구성원들에게 염오의 감정을 드러내며,(<사랑하는 일>) 맥락도 없이 남동생을 ‘한남’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작품, 233쪽)

기타 등등…,



이런 설정, 이런 장면, 이런 에피소드들을 정말 그냥, 별다른 의미 없이 썼을 수 있다. 한 작품이라면 독자로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편의 작품이 실린 작품집 안에서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거듭된다면 독자로서 이런 불평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의도가 목적이 쓰임새가 분명해야 한다. 용도가 교묘히 숨겨져 있나. 그래서 저질의 독자가 저급한 눈으로, 깊은 속뜻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차별과 혐오의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걸까.

.

저 설정, 저 장면, 저 에피소드들이 다른 모양새였거나 차라리 없다면 작품의 완성도에 해가 됐을까.

저 설정, 저 장면, 저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에 꼭 필요한가. 필연적인 도움을 주고 있나.



*****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 작품은 작가의 도구이고 무기이면서 세상에 자신을 비춘 반영이다.



저질과 저급의 ‘콜라보’로 무장한 독자로서 오독을 한 결과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



작가가 ‘짓는(作)’ 사람이라면 독자는 ‘읽는(讀)’ 동시에 ‘짓는(作)’ 사람이다. 소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는 작가가 아닌 독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 영역엔 작가가 할 일이 거의 없다. 소설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와 독자의 손에 들리고, 전자책 리더기 화면에 활자가 뜨는 순간부터 그 창작물은 더 이상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독자가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근거는 작가가 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제 맘대로 쓴다면 독자는 제 식대로 읽는다.



김성중 작가는 작품 안에서 (≪에디 혹은 애슐리, 문학동네, 2020년6월 刊≫ 안, <상속, 175쪽> 중에서) ‘소설은 나(작가)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이라고 했다.



*****



소설을 쓰는 일은 주장이 아닌 설득의 과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설득엔 균형이 필요하다. 감정에 빠진 작가는 자신만 감동받는, 공감을 요구하는 그런 소설만 쓴다. 당위나 개연은 내팽개쳐진다. 그래서 때때로 실패한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같은 이유로 나는 화자가 ‘나’인 소설은 가능한 피한다. 읽더라도 각오가 필요하다) 작가는 제 안에서 나와 밖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소설 쓰는 일은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 작업은 대단히 전략적인 일이다. 이야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만들고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여 ‘내 편’에 설 수 있게 만들려면 ‘꾀바름’이 필요하다. 감성과 함께 예리한 ‘이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소설은 감성만으로, 혹은 이성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작품을 읽는 데에는 감성과 이성 모두를 가동시켜야 한다. 공감 이전에 모든 이야기는 말이 되어야 한다. 소설엔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내 생각엔 헛소리다. 단 수학적인 논리는 아니다. 행동과 사유엔 동기가 필요하고 그 동기는 납득하고 설득당할 만해야 한다. 공감 이전에 이입이 가능해야 하고 마음이 열려야 한다. 기계적인 반응을 진짜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은 문자를 매개로 하는 이야기의 예술이고 인물이나 설정, 문장 등은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란 인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며 결국 어떤 결말을 통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대한 흐름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게 (좋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세 편이나 실려 있다. 독자들 별점도 좋고 출판사나 평단의 호들갑 만큼의 감상은 건지지 못했다. 다소 과대평가된 작품집이지 않나 생각된다. 당연히 내 주관적인 감상이다.



사족 1.



소설 쓰는 수업의 합평 시간이라면 지적받을 것들이 눈에 더러 띈다. 사소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정확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문장을 구사해야 하는 건 작가의 의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선풍기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래 머무르기에 그 앞으로 기어가 앉아 내 쪽으로 선풍기를 고정했다. (95쪽)



심각한 오류는 아니지만 작가가 말하는 건 아마도 ‘선풍기의 머리’였을 것이다. 인물이 필요했던 건 ‘선풍기 바람’이었을 테니까.



사족 2.



소설 시장이 ‘등단 시스템’에 휘둘리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소위 등단 작가이면서 대기업 형 출판사에 의해 ‘간택’되지 않는 작가들, 흔히 말해 ‘메인스트림’이 아닌 작가들에게 요즘 슬슬 시선이 간다. 기업형 출판사+대형 서점+주류 평단의 콜라보는 독자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독자로서 그들이 출판한 책, 그들이 진열한 책, 그들이 해설을 써준 책을 사보라고 강요받는 기분이 든달까. 눈에 많이 노출되는 건 광고의 힘이지 작품이 힘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여러 작가들을 탐험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게 독서의 진짜 묘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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