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글쓰기(일기)는 주로 분노의 글쓰기이다.

억울하고 분노했을때 글이 잘 써진다. 상황에 대해 내 감정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다 보면

어느새 감정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가라앉는다.

나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언어적 정의를 내리는 행위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작가님의 글에 나오는 자신이 만나는 타인과 사물과 상황에 대한 언어적 표현과 정의가 참 좋았다.

그렇게 글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그 사람을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행위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오랜된 차를 '눈물의 목격자' 라고 표현하고

자신이 만난 타인을 '한계와 문제를 딛고 존엄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입체적인 존재' 라는 표현도

인상 적이었다.

나도 한계와 문제를 딛고 존엄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존재로 정의 해보니

썩 괜찮은 사람인것 같았다.

내 상황을 언어로 표현해 보고 내 자신을 언어로 계속해서 정의 해가는 과정이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마음을 알아줄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글을 자주 써야 하는데 글쓰기는 분노(?) 할때 말고는 늘 어렵다.

읽은 책의 리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숙제처럼 여겨진다.

아직 어린 아이둘을 키우는 워킹맘이지만 시간이 된다면 작가님의 글쓰기 강좌도  참여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지금 진정으로사람으로 인정받고 살고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을 계속해서 던지게 만든 책 이었다.

여자로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아이를 두명 키우고 있는 한국 사람이 나의 현재 위치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 나의 일을 인정받고

무조건적으로 환대를 받고 있는가? 에 대한 답은 '아니오' 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역할을 하지 않으면 환대받지 못할 거라는 강박에 시달렸고

가정과 회사에서 내 역할을 충실히 하느라 번아웃 되기 직전이 지금 내 현실이다.

직장에서는 간신히 (나로서는) 어려운 일을 해내 가까스로 승진했지만

주변사람의 인정이라는 상호작용은 적극적으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여자로서 내 존재는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 에서만 조용히 일하는 상태였으나

눈에 확연히 보이는 일을 추진하고 성과를 내고 표나게 승진을 하게 되니

다들 불편한 기색이 크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제목에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있을 장소가 있어야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무조건 적인 환대를 받아야 그의 존엄이 지켜지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난민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성소수자도 아니고 등등

이라면 별 어려움없이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유지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는다.

그 자격을 당연히 취한 사람들은 그 자격이 일부분이라도 없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의 자연적인 특성 이라고만 여긴다.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 환대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그 곤란함을 알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오히려 감사하다.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무조건적인 환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할수 있었고 그동안 내가 왜 불편했는지에 대한 답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단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거 같아서 적어본다.

목요일에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운동하면서도 계속 울고 그 다음날도 근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우울해지고 인생이 억울해 졌다. 내 모든 관계에 환멸을 느꼈다. 관계를 그만두고 떠나고 싶다는 느낌이 강렬했다.

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보는 여유가 없었다. 물론 글로 쓸 여유도 없었다.

엄마와 이야기 나눈 내용은 내가 공부도 많이 하고 직장에도 다니면 편하게 살 줄 알았더니 너무 고생스럽게 산다는 이야기였다. 현미 신랑이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두 가지 내용이 내 감정을 흔들었는데. 내가 엄마에게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동정을 받는 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고 현미가 살고 있는 삶이 엄마에게 크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다. 또한 아직도 엄마의 말과 인정에 휘둘리는 내가 싫었다. 나는 독립했고 엄마가 인정을 안 해주더라도 내 삶은 하나도 영향이 없는데도 엄마의 말 한마디와 인정에 내가 이렇게도 흔들린다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의 말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나에게 주신 소명을 잊게 하는 사탄의 말 이기도 하다.

내가 크게 흔들린 이유는 엄마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난 내 삶이 무척이나 고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현미에 비해서 또 크게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으로나 행복지수 면에서나) 그 사실이 현실이라는 것 또한 나를 절망하게 했다.

설 명절 때 보여준 남편의 행동 또한 나를 절망하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이다. 어머니는 분양 받은 집에 입주할 듯한 말을 형님에게 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우리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계시니 내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당장 남편에게 사실 확인과 또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서 캐묻고 또 캐물었다. 평소에 내가 돈을 버니까 남편은 내 눈치 보는 것 없이 시댁에 경제적 시혜를 베푼다. 물론 그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걸 알기 때문에 나도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인정받는 마음이 충족되면 된 것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모르는 경제적 의존부분이 또 추가된다고 생각하니 아..나는 시댁에서는 개호구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누이는 철저하게 출가외인을 표방하며 경제적 보탬이 없었고 형님 댁은 혼자 번다는 이유로 형님이 경제권을 틀어쥐고 자신의 자원에 낭비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막내(남편)앞으로 들어오는 설 명절 선물을 자신이 독점하는 것이 당연했고 남편은 우리 집 냉동실까지 털어와 그들을 먹였다. 그들은 잠시 인정의 말을 전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의 자원과 우리 집의 자원도 관리 못하는 개호구일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나와 남편의 협의도 안된 사실로 형님에게 잘난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설이 절망스러웠다. 왜 남편은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내가 이렇게 되려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데. 이렇게 다 시댁에 퍼주려고. 나를 개호구로 생각하게 만드려고 그런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비교하자면 두 가지 나와 비교되는 삶이 있는데 그들은 또 공교롭게도 40살 동갑내기 이다. 그들에게 모두 질투를 느끼는 걸 보니 그들 나이와 내 나이가 뭔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꼭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다.

첫째로 동생 현미는 직장에 다니지 않고 아이를 한 명 키우는 전업주부 이다. 남편을 고르고 골라 경제력이 있고 학식도 풍부하고 성격도 인자한 사람과 결혼했으며 지금까지 문제없이 살고 있다. 최근에 벤츠로 차를 바꾸고 또한 집도 하나 장만하게 되어 경제적으로나 노동적인 면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다. 엄마에게도 가장 걱정을 주지 않은 딸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며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아마도 현미는 자라는 내내 나와 비교 되었을 것이다. 학창시절 그녀가 공부를 그리 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존심은 높아서 늘 그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가만 보면 엄마와 가장 성격적으로 비슷한 딸이 현미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뛰어났지만 지금은 엄마에게 나의 고생스런 삶으로 걱정시켜주는 딸이 되었다. 엄마의 잘못은 아니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바와 달리 나를 잘 이해 못하고 있다. 나는 꼭 내 욕심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직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이 사회에 순응해서 일반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나는 생각해보니 엄마의 뜻에 따르지 않은 지가 꽤 오래 되었다. 대학 때도 여자에 어울리지 않는 일도 엄마의 바램과 다르게 거침없이 했었다. (현미는 그러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결국 엄마의 바램 대로 살아온 것은 바로 현미 이다. 교회 일도 그렇다) 지금도 내 열망과 노력을 엄마는 이해 못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 사실을본능적으로 깨달아서 엄마의 인정을 멀리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다시 흔들리다니. 나도 엄마의 인정을 어지간히 받고 싶었구나라는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다 이해 못하니까 .엄마를 이해해야 한다. 엄마 나이 때 사고 폭은 그 정도 이다. 더 넓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신다. 그저 자식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인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바라는 바와 달리 어떤 운동과 투쟁의 심정으로 직장을 힘들지만 유지하고 있다. 나와 같은 여성들이 어떤 공부를 하고 일을 해도 잘할 수 있다는 것. 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내 조카와 아이들에게 남녀 구분 없이 공부의 분야를 선택해도 좋다고 말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꼭 여성이 진출해도 되는 분야와 안 되는 분야를 설명하고 있는 내가 초라했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조직에서라도 전산실에서 여자도 일할 수 있고 받아줄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굳이 이야기 하라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일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와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의 개별성을 내 자신이 그 동안 인정을 못하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인정을 못해줬는데 누가 해주랴. 나라도 인정해주자. 나는 투쟁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그렇게 애쓰는 것이 내 삶이라고. 누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설사 그게 부모라 하더라도) 괜찮다고. 어쩌면 나의 개별성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두번째로 사무실의 지** 이다. 그녀는 나와 같이 직장에 다니고 아이를 둘 키우는 힘든(?) 삶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연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그녀의 이야기도 들어주기도 하고 하였으나 이 사람은 내게 무슨 악감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본래 그런 사람인지. 내 이야기는 한번도 물어봐 주지도 않고 자신의 경제적인 자랑이나 자식 자랑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녀의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 대화로 인해 나는 약간의 상처로 우울해졌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직장에서 내가 하는 노력들과 다르게 그녀는 다른 행보를 했다. 이기적으로 직장 생활을 했고 계약직 처럼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좋아져서 인지 여전히 차, , 집안 가구, 전자제품, 아이의 학교성적, 공부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고개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복종이 없었다. 아마도 내 경제상황과 그녀을 비교해서 자괴감이 들었던 것 같다. 회사생활을 내 가치관대로 하는 것이 크게 이 세상과는 상관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이나 타인이 인정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가정을 그녀에 비해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은 죄책감. 그런데 물리적으로도 정말 너무 몸이 힘들고 시간도 없었다. 전업주부 한테서나 또는 슬렁슬렁 일하는 동료한테서나 인정도 못 받고 그냥 욕심 많은 사람, 무리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어서 사는 꼴이라니…...결국에 와서는 체력적으로도 방전되어 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울어도 울어도 울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나의 개별성을 나 조차도 인정 못 해준 결과 이기도 하다. 난 여성이면서도 하고자 하는 열망이 많은 사람이라 세상의 저항도 많고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줄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인지 하였다. 그리고 나를 천천히 보아주지 않은 사람들의 인정까지 바랬던 사실이 나의 큰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이다. 그리고 실격당한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읽고도 깨달았다. 108배도 했었고 기도도 하였다.

내 삶에 이런 깨달음을 주시는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감사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변호사이고 제목도 어려운 듯 했지만 근래 읽은 책 중에 최고였다. 읽은 구절을 또 읽고 또 읽고 후기 조차도 감동 받아서 울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쓴 것만으로도 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준거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정상인들의 범주가 얼마나 부질없던지. 늘 나는 정상인이 아니라 뭔가 별난 존재로 생각하고 살았던 날들에 대해서 자신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커버링이란 언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바로 커버링인가? 나보다 잘나고 별나지 않고 모나지 않고 외모와 성격도 훌륭한 그런 우월한 존재를 정상으로 규정하고 나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커버링은 나를 위한 언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정상인처럼 보이기 위해 노련함을 연기하며 살았었다. 내가 도달 못하는 그곳에 대한 동경과 비교로 나를 많이 괴롭혔다. 남보다 우월해야 가치가 있는 거라고,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그 생각이 나에게 습관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 좀 더 잘나고 싶고 잘살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커버링 하며 노련함을 연기하며 사는 것이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점점 지치기도 했다. 지금 현재 상태 이기도 하다.

 

 

도움 받는 개인의 서사와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이 도움을 주는 시혜를 주는 상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개별성을 인정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 돈을 주고 무언가를 사주거나 혜택을 줄 때 그들의 취향을 존중해 줬었나? 생각이 안 났다. 그런데 내가 도움을 받으면서 내 취향이 무시되었던 경우는 확연히 기억이 났다. 결정할 때 제발 내 취향을 물어 봐주기를. 내 취향을 반영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시간이 걸리는 매력 발견에 대하여, 아름다움이 쉽게 느껴지는 신체를 늘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스스로 균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에 더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 개별성을 들여다 봐주기를, 나의 단점도 개성으로 인정해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나는? 나는 내 자신의 개별성을 살펴보고 인정해주고 알아주었는지. 남들에게 이 감정들을 바라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내 자신을 천천히 돌아봐주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살만하다. 그게 내 자신이라도. 꼭 필요하다.

 

 

나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지극히 공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한 권력의 탄생 - 1%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권력 사용법
대커 켈트너 지음, 장석훈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서 말하는 권력은 명시적인 권력도 포함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왠지 권력이 명시적으로는 없지만 있는 듯한 그 느낌에 대한

답이다.

책에서는 인류의 생존방식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인류는 다른 영장류보다 뇌는 크고 몸은 약하다. 아이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오랜기간 보호받아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공동체 생활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중에 공동체의 선에 많이 기여할수록 권력을 갖게 된다는 이론이다.

 

공동의 선에 기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더 공감해 주고 공동체의 일과 이익에 더 솔선수범 한다.

사람이라면 공동의 선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야기 할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의 이익이 관여되지 않으면 그냥 본능적으로 공동의 선을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행하는 사람은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책에서는 그 사람은 바로 권력을 가질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물질적이고 명시적인 권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움직일수 있는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다.

공동체의 선에 많이 기여하는 사람은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그 사람이 말과 행동에는 많은 타인의 적극적인 협력이 따른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라고 정의했다.

 

아..그렇구나.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고 다른 사람보다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 사람의 승진여부와 재력여부에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는 선한 권력의 힘이었다.

 

나는 나의 가치관에 의해서 공동의 선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기여한다면 나는 도대체 뭐가 좋아질까?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었다. 승진? 돈? 바로 평판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평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마음에 저장된다. 그래서 무섭다. 오로지 좋은 평판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공동의 선에 기여했을때 주어지는 보상이 권력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내 가치관에 나름 이유가 있었다는 안도감도 생겼다. 정말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