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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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부터 읽어봐야지 싶은 책이었는데,

영화가 개봉한단 소식에 그렇다면 영화를 먼저 보고 읽어야겠다 - 책으로 읽은 거 영화로 봐서 만족스러운 경우는 드무니까-라고 미루어왔는데 어쩌다보니 개봉 직전 그냥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영화는 못 보겠다, 이건... 책으로 읽었으니까라는 이유가 아니라 너무 우웩~스러울 것 같아서.  지저분한 오물 천지 묘사며, 시체가 썩어나는 거리며... 너무 상상하며 읽었나보다. 결말부분이 차이가 있는 모양이라 좀 궁금하긴 한데...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선 며칠동안 밥도 못 넘기는 건 아닐까.... 뭐,내 식탐이 그 정도에 굴할  없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날 한 남자가 아무 이유없이 시력을 잃는다. 그 후 그 남자가 - 볼 수는 없지만 - 볼 수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실명이 전염되고, 전염된 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염된다.

정부는 실명한 그들을 철거예정이던 정신병원 건물에 모아놓고 관리한다.

"정부는 정부의 정당한 의무로 간주되는 행동을 긴급하게 이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위기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민을 보호가기 위한 조치였다."라고 거듭 방송하지만 사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고, 전염이 두려워 아무도 접근해서 연구할 수도 없으니, 실명바이러스(?) 보균자들의 사망과 함께 실명병도 사라지길 바랐던 것일게다.

그러니 그 건물 안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만 모여서 지내게 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사람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 그 안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그녀는 그 모습을 속속들이 관찰하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고, 자신도 보이지 않으니 마음대로 행동하고 수치심을 잃어간다. 그런데 오히려 앞이 보이는 그녀는 그 모습을 보기가 민망하고 고통스럽고 처참한 기분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보이는 나를 봄으로써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는 이야기인가.

여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나타나고, 인간답기 위해선 그에 저항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있는 병실인 우병동 1호실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하게 그들이 소설의 준주인공이니까... 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 아내의 시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시선이란 꼭 육체적인 시각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들은 첫번째 눈먼 사람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작가를 만나게 된다. 그 작가는 자신의 집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자 비어있던 그 집에서 현재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지내고 있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작가라며 자신조차 볼 수 없는 글을 남기는 무의미한 짓을 한다. 자신은 비록 시력과 함께 이성도 잃은 사람에게  자기 집을 빼앗겼지만 현재 사는 집의 주인이 나타나자 원주인과 타협하여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결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할 생각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이성을 기대하고 눈먼 육체에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나오는 걸까. 그게 바로 자신을 보는 시선의 유무가 아닐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보는 눈. 그것은 아마 눈멀었어도 눈멀지 않을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소설대로라면 극히 일부 사람의 경우에만.

 

그냥 한번 너희들을 시험해본 거야...라는 듯이 모두들 이번엔 아무 이유없이 눈 멀었던 순서대로 앞을 보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된 후 한 시기동안 이런 실명상태를 거치게 되고 그동안 남을 믿고 의지해야하고, 다른이들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사람을 도와야만 한다면 어떨까? 이타심과 배려심이 깊어지지 않을까?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전이라고해야하나... 그런 것이 있는데(우리나라에선 예술의 전당에서)  아주 캄캄하게 해놓고 시각장애인들의 상황을 겪어보도록 만든 전시이다. 경험해보면 꽤나 느끼는 것이 많다던데 그런 느낌을 위한 재앙이었던 걸까? 이 재앙 후 사람들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그런데 꼭 실명이 아니더라도 '인생 끝'이라는 느낌의 고통스런 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지만 그 시기를 지난 후 성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망가져버리거나 악해져버리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쓸데없는 상상같기도 하다.

작가는 볼 수 없었다가 다시 보게 된 사람들이 어떠하리라 묘사해 줄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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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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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흔이 넘은 작가가 돌아보는 일생에 걸친 독서의 추억인데 엉뚱하게도 삐삐밴드의 <껌을 씹는 유쾌한씨를 보라>가 떠올랐다.  

껌씹는 방법도 여러가지 앞니로 씹기 어금니로 씹기 송곳니로 가르기 풍선도 불고... 처럼,

책읽는 방법도 여러가지 누워서 읽기, 엎드려 읽기, 소리내어 읽고 눈으로만 읽고, 돌려읽고, 읽은 책 또 읽고, 번개처럼 읽고, 삼단뛰기, 장애물 넘기...

겨울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읽는 안락함 (이건 잠들기 딱인디...) , 처음 학교에 가서 소리내어 읽어제낄때의 자랑스러움, 눈으로 읽다 깜빡 자신을 잊을만큼 빠져들던 추억들을 내 인생은 책이 있어 행복했고 깊어졌지... 하는 기쁨으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클뢰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활동적인 일이나 친구들과 즐길만한 일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내성적으로 책을 끼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푹 빠져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전기에서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보고,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지하생활자의 주인공- 뻔뻔하고 째째하기 그지없는 그 작자에게서도 자신의 모습 중 일면을 발견한다.

여기서 나는? 하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건 나의 이야기야 싶은 책이 있었던가?

어린시절 독서친구였던 동생에게 물어보면 하나 짚어줄 것 같아. 

둘이서 재밌게 본 동화에 <장난꾸러기 마디켄>이라고 있었는데(제목이 맞나 모르겠네) 주인공이 자매 중 언니 쪽이다. 엄청 말썽 피우고 동생에게 누명도 씌우고 동생 간식도  뺏어먹고....  내 동생이 그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같았다고 한 적이 있다. 동생이 언니에게 당할때마다 마구 공감하며, 이렇게 나쁜 언니는 혼나야 되는데,라고 생각하고.

'어이, 난 그렇게 말썽 피우지 않았거든?' 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동생이 그렇게 봤다니 뭐.

내 동생의 시선으로 본 내 이야기는 있는데 내가 받아들인 나의 이야기는....?

죽기 전에 전에 만나게 될까? 나이를 먹으면 근래의 일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어린시절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던데,

할머니가 되면, 잊고있던 나만의 책이  떡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저자도 - 물론 아직 체력이나 정신이나 건강하신 것 같지만 - 나이를 자시니 어린 시절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인지 어린 시절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책 내용의 대부분이다.  아이때의 느낌, 청소년시절의 시선으로 돌아가 당시의 감정에 푹 빠져 쓴 글 같다.

지금의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보통 자신이 읽어낼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책에 둘러싸여 있다.

저자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으니, 척박한 환경- 일제의 억압과 이어지는 전쟁, 전반적으로 열악한 독서환경 탓에 책이 없어서 읽던 책을 다시 곱씹어야만 했고, 빌려보고 돌려보느라 번개처럼 읽어내야만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빨리 읽든, 어려워서 머리를 싸매고 읽든, 읽었던 책을 또 읽든, 한권한권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잘 전해진다. 

그렇지만, 또 그때의 감정에 너무 빠졌는지(!) 소개하는 책에 대한 해설이 너무 평범한 게 불만스럽다. 중고등학생에게 이런 책도 있단다~~ 라고 또래의 감정으로 돌아가 소개해주는 것 같은 내용.  전문성을 살려서 설명하면 너무 어려워질까 저어한 듯한 느낌.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에 볼 책을 몇 권 체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학교 졸업 전의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혹은 저자과 비슷한 연배의 - 근년보다 어린 시절 기억이 더 생생한 분들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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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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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책책책을 읽읍시다'던가....뭔가 오락프로에서 어떤 특정한 책을 읽은 사람을 찾는 코너가 있었다.

예를 들면 <무중력 증후군>이란 책이 그주의 책이면, 먼저 그 책을 읽었냐고 물어보고, 주인공 이름이 뭐냐, 엄마가 가출했다 돌아와서 연 가게이름은 뭐냐, 구보가 입사한 회사에선 뭘 만들었냐.... 등등 내용에 대해 질문해서 옳게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서 척척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와... 난 읽었더라도 기억 못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뒷페이지 읽으면 앞페이지가 지워지는 이 기억력, 대체 지금 책을 읽는 거야, 잊는 거야... 자책하던 나의 독서의 시간들. 

그런데 이책의 저자는 다 그런거야....해주고 있다.

몽테뉴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잊는 건 물론이고, 자신이 쓴 내용조차 잊어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메모를 하며 독서를 해보지만 그게 또 나중에 보면 생경하다. 그렇다면 그는 그 책을 안 읽은 것인가?

난 읽다만 책은 읽었다고 말하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고, 읽은 후 잊어버린 경우는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심지어 귀동냥으로 아는 책, 제목과 배경만 아는 책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논할 자격이 있다고 부추기고, 책 내용에 얽매여 자신의 의견을 잃는 것보다 읽지 않는 편이 낫다고, 그렇게 독서의 무용성, 위험성을 주장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똑같은 책도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그사람 내면의 필터를 거치면서, 각자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이 되기때문이다. 자신은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은 작가가 쓴 바로 그 책일 수 없고, 다른 이가 읽은 그 책과도 같을 수 없다. 따라서 한 책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해도, 실제론 모두 같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 아니게 된다. 또한 읽지 않은 책이라도 제목과 배경 그리고 자신 내면의 책과 합쳐서 개성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으니, 안 읽고서 말해도 결국 마찬가지라는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진실같기도 하고 궤변같기도 한 논리.

아무튼 독서를 멀리하고 독서의 폐해에 대해 말한 작가들이 꽤 있다는 점이 의외.

책에 대한 책들을 보면 어려서부터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이들이 수두룩해 기가 죽기도 하는데, 그런 마음일 때 이 책을 펼쳐보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 힘겹게 3권까지 읽고 언제 저걸 다 읽누...했었는데 나도 바야르 씨처럼 SB & HB를 해볼까.

( * 바야르 식 독서구분 :  SB - 뒤적거려본 책 / HB -  귀동냥으로 읽은 책 / FB - 읽었으나 잊은 책 / UB - 접해보지 않은 책)

사실 난 그런 띄엄띄엄 독서를 예전부터 즐겨해서, 어떻게 책을 중간부터 보냔 소릴 듣곤 했다. 까짓거 중간이 재미있고 앞이 궁금하면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면 간단한 걸 왜들 시끄럽게 구는지... 추리소설도 아닌데 중간부터 보면 어떻냐구.  부분부분 읽어서 끼워맞추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또,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미련없이 중단도 잘 하는 편이고....  SB가 내겐 생소하지 않은 편안한 방법인데 요즘 잊고있던 것같다. 

성실한 독서를 강요받다가 면죄부를 받은 느낌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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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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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무중력증후군의 자가진단용 증세를 들여다본다.
-호흡곤란, 오한, 잦은 기침,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울렁거린다, 환영 또는 환정, 충혈, 초조감, 불면증, 흥분, 충동적 행동
이런 내겐 하나도 없네. 난 지나친 건강체질인게다. 소설에 공감할 수 없을만큼!
대체 어떤 사람들의 증상이지? 홧병이랑, (오염된 공기 속에서 밥도 안 먹고 계속할 정도의) 인터넷 중독, 운동부족을 합치면 저런 증세가 나오려나~~
병명으로 봐선 지구 중력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의 증세인데 말야...
지구를 떠나고 싶어하는, 지구의 중력을 거부하고 무중력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성공적으로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 못한 나로선 공감이 갈만한 배경인데, 왜 이렇게 내 얘기야 싶은 부분이 없는 걸까.  직장 옮겨댄 횟수라면 나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안 되니 신기한 노릇이다.
공감할 거리가 없는 얘기라면 새롭게 '그런 거였어? 아하~' 하고 깨달아지는 부분이라도 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소설 속에서 달은 자꾸만 새끼를 친다.
그러나 새 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작아서 맨눈으론 볼 수 없다고 한다.
천체망원경을 지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보일 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새 달의 탄생, 존재를 믿는다. 뉴스에서 끊임없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대중이 뭔가 새로운 것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명거리. 자신의 일탈을 변명할 이유를.

무중력증후군이란 것도 매스컴에 의해 만들어진 병이었다. 그 병 역시 실재하는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지구의 중력이 버거운 무중력증후군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니 그저 환영할뿐.  
소설을 읽는 내가 두번째 달이 생기고 그때문에 사건이 생기길 바라는 이상으로 그 세계의 거주민들도 뭔가가 생기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새로워지지는 못하고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 대로 행동한다. 만녈필 사건의 유행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하면 만년필을 들고 설치고, 편의점 털이가 기승이라면 편의점으로 몰리고, 무증력증후군이 발생했다고 하면 너도나도 무증력증후군인 것 같다며 병원으로 쇄도하고. 다들 매스컴의 지시대로....
아, 쓰면서 지겹다. 흔히 볼 수 있는 설명이잖아. 매스컴이 상황을 과장해서 쓰면 대중은 그걸 소비하고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진실은 왜곡되고 새로 쓰이고, 뭐가 진실인지 알 수없어지고.... 잊혀지고.... 다시 처음부터....

각각의 에피소드들도 많이 본 듯한 설정, 들어본 유머...
뉴스거리 하나에 우르르 몰려가고 폴짝거리게 만드는, 똑같은 삶의 지루함을 강조하려 했다면 성공이다. 
소설 속 무중력자들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지구의 중력에 얽매여 행동하듯이, 이 소설도 이미 나도는 이야기들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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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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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경과학의 발견들을 예견한 예술가들에 관한 것이다. 이 작가, 화가, 작곡가들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실들을 발견했고, 과학은 그것들을 이제야 재발견하고있다.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미래의 사실들을 예언한 셈이다. (서론에서)

 

저자의 이력부터가 흥미롭기 그지없다. 조나 레러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신경과학을 전공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뉴욕의 일류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자유 편집자로 일하며 인기 과학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보다 한발 앞선 인물로 이 책에 선정된 이는 여덟 명.

월트 휘트먼, 조지엘리엇,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마르셀 프루스트, 폴 세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거트루드 스타인, 버지니아 울프이다.

몸과 감정의 밀접한 관련성,  뇌의 가소성, 맛을 느끼는 방법, 변화하는 기억, 눈과 뇌가 사물을 보는 방식, 청각이 음악을 받아들이는 방식, 언어의 구조, 그리고 변화하는 자아까지 각자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며 과학을 선도해간(실제로 당시의 과학으로부터는 비웃음을 샀지만... ^^;;)  이야기가 펼쳐진다.

 

- 여기서 내가 보기에 튀는 인물이 오쉬스트 에스코피에. 그녀는 요리사이다.  쟁쟁한 예술가들 틈에 웬 요리사인가 싶었다. 저자의 특이한 이력 덕인지 요리의 묘사도 생생하다. 물론 과학적 설명도 충실하고.

과학은 혀가 느끼는 맛은 네 가지뿐이라고 설명한다.  신맛, 단맛, 쓴맛,짠맛을 혀의 어느부분이 느끼는지 교과서에도 나와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진정한 프랑스요리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가 가장 중시하는 육수 만드는 법을 보면 그 네가지 맛내기를 피하는 것만 같다. 오직 고기만 끓이고 태우고 우려내고, 짜투리 야채들을 이용하지만 네가지 주요 맛이 날만한 재료는 들어가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맛이라 인정하기 않지만 그녀는 가장 중시했던 그 고깃속 그 감칠맛의 정체의 과학적 표기는 L-글루타메이트이다. 일본 화학자 이케다 키쿠나에는 육수의 감칠맛 우마미(旨味)를 찾아 연구하다 MSG(인공감미료)를 만들어낸다. 1907년의 일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에스코피에와 이케다는 그것을 확인했고, 대중은 예전부터 느끼고 즐겨왔던 그 맛. 단맛,신맛,쓴맛, 짠맛 이외의 맛을 과학은 21세기에야 인정한다. 2000년에 들어서야 고기맛을 아는 혀의 부분, 즉 글루타메이트 수용체를 발견했고, 그제야 고기맛이란 쾌락주의자의 환상일뿐이라는 과학계의 고집을 포기한 것이다.  

- 과학의 발전으로 눈에 띄게 위기에 몰린 예술이 회화분야였다....고 할수 있을지 모른다. 사진기의 발명으로 말이다.

세상을 그대로 복사하내는 재주야 카메라에 당해낼 수 없어진 상황에서 (전기)인상파 화가들은 순간적인, 빛을 중시하는 화풍을 만들어낸다. 그런 와중에 합류한 (후기)인상파로 불리는 세잔은 '이상한' 그림을 그려낸다.  완전하지 않은 형태, 빈 공간, 길쭉길쭉한 선들이 들어선 그림을. 미완의 그림을. 그렇게 비어있음에도 세잔의 그림에서 우리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에서 산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비판을 면치 못했던 이런 그림이 눈과 뇌의 작용이 많이  밝혀진 오늘날에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된다. 

사물이 수정체를 통해 망막에 거꾸로 맺히는 것까지는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보게되는 것일까? 뇌속에 거꾸로 선 난장이가 있어서 그 그림을 제대로 보고 뇌에 설명해주는 건 아닐테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뇌의 각부분들이 각자 자기가 맡은 것만 수용하고 뇌가 다시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부분은 음영을 파악하고 어떤 데선 색을 파악하고.... 그런 정보들을 종합해서 최종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뇌의 종합력이 고장난 사람들은 (올리버 색스가 소개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처럼) 눈에는 이상이 없으면서, 멀쩡히 보면서도, 전체적인 형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시야 한복판에는  시신경이 망막으로 연결되는 부분에는 눈먼 부분 -맹점-까지 있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우리의 눈먼 부분에 대해 눈 멀어있다. 안보이면서 주위에 보이는 것과 연결지어 보이는 체를 한다. 우리의 뇌는 어떻게든 멀쩡하게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런 연습을 해온 까닭에 세잔 그림의 빈 부분을 채우는 작업도  수월한 것이다. 과학이 설명해주기 전부터.

 

예술보단 과학을 신봉하던 어리버리.... 한때 새로운 형식이던 글과 그림, 음악이 대중에게 수용되는 것은 예술가들의 변덕이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여진 정도로만 생각해왔는데, 치열한 탐구의 과정이었음을 알게되었다. (어째 너무 상투적 독후감 문구같지만, 진실한 고백임.... -.-;;)

이 책의 역자는 후기에서 예술이나 과학이나 궁극적으로는 사물들 사이의 보이지않는 관계, 보이지 않는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하고 있다. 예술과 과학이 조화를 이룰때 진실을 향한 걸음이 더 빨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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