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V양 사건 초단편 그림소설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고정순 그림, 홍한별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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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것만큼 쓸쓸한 일은 없다고들 말한다. 이런 주제가 소설에도 종종 나오는데 역력한 비애감을 담곤 한다.”

버니지아 울프는 주제를 선언하고 짧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런던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단언하지만 누구나 안다. 150년 전의 런던이든 2024년 현재의 한국 어디든, 아니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나는 일임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V양은 ’촘촘히 짜인 인간관계의 그물망에서 떨어져 나가고, 모두에게 영영 걸러지는 존재가 되고 만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V양도 늘 함께 있지만 그들은 그림자나 가구 같은 존재일 뿐이다. 마주치면 살갑게 안부를 묻지만 그 이상은 없는 관계.

V양과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짧은 연극’을 해왔던 ‘나’는 더는 V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가 없어졌다. 불편한 마음이 불면으로까지 이어진 ’나‘는 그림자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그림자를 만날 수 있나, 이 만남을 준비하는 것을 허황되게 생각하면서.

V양의 부재에 허전함을 느낀 ‘나’ 조차도 회색 그림자, 가구, 커튼, 벽에 걸린 그림, 무언가로 그녀를 칭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권리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대가 그랬듯이 V양은 이름도 불리지 않은 채 희미한 그림자로 거기 있거나 없다.

“지금 의자를 쳐서 바닥에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면 적어도 아래층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겠지.”

소설 속 화자인 ’나‘는 군중 속에서 소외되고 무시받는 운명을 끔찍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는 것도 의자를 쓰러뜨리는 것일까.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인사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없는 생활. 런던처럼 발전된 도시가 아니라도 고립될 수 있다. 군중이 있어서, 군중이 없어서. 짧게든 길게든 소외와 고독을 느끼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고정순 작가의 그림에는 ‘역력한 비애감’이 잘 묻어난다. V양과 V양의 언니인 듯, V양과 나인 듯, 당신과 당신인 듯 쓸쓸하고 아름답다. 그림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고정순 작가의 그림 전시회에 초대된 것 같다. 게다가 작가의 짧은 소설 <이름이 되어>가 이어지며 이 땅에 발 붙인 이름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나무의 이름을 모르는 ’내‘가 모르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떠올리는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비애감은 고정순 작가를 통해 삶의 고독을 끌어안는 농담처럼 다가왔다. 곰팡이 냄새와 화장품 냄새와 벚꽃 향이 나는 이야기가, 그림이 오래도록 책을 매만지게 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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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인생그림책 12
박희진 지음 / 길벗어린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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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으슬으슬하다며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손녀가 찾아왔다. 손녀의 손에는 할머니를 위한 파이가 들려있지 않다. 가벼운 수영가방 하나만 어깨에 걸려있다. “할머니, 수영장 가요!”

싫다 싫다, 하는 할머니를 이끌고 수영장에 간 손녀는 결국 혼자 물에 뛰어든다. 풍덩! 수영장에 뛰어드는 사람들로 꽉 채워진 장면에는 어떤 글자도 없지만, 수영장의 냄새와 공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웅웅거리며 울리는 물소리와 뛰어드는 사람들의 활기찬 기운까지.

그제야 할머니는 빨간 망토처럼 두르고 있던 이불을 벗어놓고 슬그머니 수영장에 발을 담근다. 심드렁하기만 하던 눈빛은 조금씩 빛나고 처져있던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바라보는 내 얼굴도 함께 펴졌다.

물속에서 할머니는 자유롭게 유영한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은 가벼워지고 한 마리 새처럼 훨훨 날아다닌다. 이불 속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책장을 펼치고 또 펼치면 꿈결처럼 아름답고 포근한 물속 세상이 드러난다. 그 속에서 할머니는 안온하다.

싫다, 하며 이불을 감고 있는 할머니. 수영장 물을 빼꼼 들여다보는 할머니. 살짝 발을 담가 보고는 어(괜찮은데?), 하는 할머니. 모두 낯설지가 않다. 한 걸음 나아가기가 귀찮아서, 두려워서, 자신 없어서 주저앉아 있다가도 살짝 새로운 맛을 보면 오, 괜찮은데 하면서 슬쩍 일어선다. 결국에는 푹 빠져 즐거워하며 웃는 할머니 얼굴이 우리 아이들 자라가는 모습과 꼭 같다.

박희진 작가의 <물 속에서>는 시원한 수영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왠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더 크게 다가왔다. 배경으로 차가운 하얀색보다 미색이 많이 사용되었고 물속 세상도 물기가 많은 파랑에다 옅은 노랑과 분홍이 고루 칠해져서인가 보다. 발장구 끝에서 퍼져나가는 분홍이 할머니의 두 뺨까지 물들여 발그레한 미소를 띠며 손녀와 눈을 마주치는 장면은 정말로 사랑스럽다.

글자로 쓰인 이야기와 함께 그림으로 많은 것을 들려주는 <물속에서>. 이 여름이 지나가도 수영장 속 할머니를 자주 들여다볼 것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나 한 발 내디딜 작은 용기가 필요할 때, 아니면 그저 부드러운 물속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할머니처럼 쉬고 싶을 때도.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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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점 두고두고 보고 싶은 그림책 149
김지영 지음 / 길벗어린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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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아이는 거울을 보다가 얼굴에 생긴 빨간 점을 발견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빨간 점만 보입니다. 친구들이 놀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됩니다. 씻으면 지워질까 박박 씻어도 봅니다. 하지만 빨간 점은 점점 더 커지고 걱정스런 마음도 자꾸만 커져갑니다.

딩동, 친구들이 놀러 왔습니다. 당황한 아이는 점을 꽁꽁 숨기기로 합니다. 불안한 마음까지 숨겨지지는 않습니다. 친구들이 빨간 점을 알아채고 놀릴까 봐 놀이터에서도 자꾸만 조심하게 됩니다. 그네를 타면서, 미끄럼틀에서도 마음을 졸이고 노는데 갑자기 빨간 점이 삐져나옵니다! 숨바꼭질을 하자며 빨간 벽 뒤로 숨어보지만 결국 빨간 점이 펑, 하고 폭발해 버립니다. 빨간 점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빨간 점>의 첫 장에서 놀람과 걱정으로 거울을 보던 아이의 얼굴이 마지막 장에서는 개운한 미소를 짓는 얼굴로 바뀝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아이의 표정이 바뀐 걸까요? <내 마음 ㅅㅅㅎ>김지영 작가님의 신간 <빨간 점>에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 숨바꼭질 장면에서 숨어있는 친구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저희 아이들은 이 장면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고 즐거워했습니다.

++ 빨강과 파랑 두 색만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강렬하면서도 시원하고 간결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더욱 잘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판화 기법으로 표현한 단순한 형태의 매력적인 그림이 자꾸만 책을 펼치게 합니다.

* 본 리뷰는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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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모양 인생그림책 36
이혜정 지음 / 길벗어린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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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집은 집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서요! 집이 집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니,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습니다.

따뜻하고 아늑한 집을 찾아 떠나는 길에 달팽이를 만납니다. 달팽이는 ‘마음의 모양’에 맞는 집이 진정한 집이라고 합니다. 달팽이가 알려준대로 마음의 모양을 찾으러 가며 애벌레, 벌, 해달, 할머니, 아이를 차례로 만납니다. 그 만남들을 통해 파란집은 결국 알게 됩니다. 자기 마음의 모양에 딱 맞는 집이 어디에 있는지.

지붕 페인트가 바랜 파란집이 두 다리로 집을 찾아 ‘가출’하는 그림을 보며 귀엽기도 하고 측은한 맘이 들기도 했습니다. 긴 모험을 끝내고 따뜻하고 아늑한 자기만의 집을 찾은 파란집처럼, 우리 모두 마음의 모양에 딱 맞는 안온한 집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바코드라니요!

#마음의모양 #이혜정 #길벗어린이
#서포터즈 #서평단

#오후두시의책장
#오후두시의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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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파란, 나폴리 작가의 작업 여행 1
정대건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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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의 파란, 나폴리> 서평단에 선정되었다. 작가의 장편소설 <급류>를 읽은 뒤라 책이 무척 기다려졌다. 사실 순서는 반대였다. 안온북스 계정에서 정대건 작가의 <나의 파란, 나폴리>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먼저 보았고, 도서관 한국문학 코너에서 정대건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 책을 집어든 것이었다. 대출해 온 날부터 급류에 휘말리듯 읽어내린 소설에 나는 마음을 푹 담그고 있었다. 그러니 서평단 신청을 할 수 밖에.

드디어, 마포구 서교동의 고래빌딩에서 경주의 바닷마을에 다다른 책의 포장을 풀었다. 출판사 계정에서 보았던 표지가 파랗게 드러났고 비행기 탑승권 디자인의 띠지에 곱게 접은 종이비행기가 끼워져있었다. 날개 끝에 네잎클로버를 달고서. 펼쳐보니 간단한 책 소개와 서평 작성 안내가 적혀있었다. 이토록 다정한 안내문이라니!

자, 탑승권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정대건 작가의 파란 나폴리로 떠날 시간이다. 영화감독으로, 작가로 살며 프리랜서의 불안과 자기 의심을 안고 지내던 날들을 지나 나폴리에 도착한 한국의 소설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려 했고 개인주의를 선호하던 그는 낯선 곳에서 90일 동안은 다르게 살아보기로 한다. 걷고,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떠나며 나폴리의 파란 빛에 물들어간다. 다정한 사람들의 친절과 이방인을 향한 환대 앞에서 보드라워지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맛있는 커피와 피자,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바다와 여행지 사이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지난 날의 작아졌던 마음과 나폴리에서의 부풀어오른 감정들과 소설들의 뒷이야기, 떠올린 영화의 장면들까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듯 읽어갔다. 읽어가며 나는,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나폴리로 떠난 남자의 이야기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열정과 푸르름을 담은 사랑 이야기가 작가의 소설로 태어나기를, 어느덧 바라고 있었다.

살아온 날과 놓여진 자리가 달라도 인생을 살며 마주하는 감정은 비슷한걸까. 불안, 두려움, 기대, 설렘, 실망, 행복, 그리움, 기쁨, 연민, 망설임, 후회, 응원을 보내는 마음, 사랑, 사랑, 사랑… 이 책을 읽는 누구든 교집합의 동그라미를 그려보며 작은 위로를 경험하며 자기만의 파란, 하얀, 혹은 빨간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작가님의 인스타 @dacapo119 하이라이트에 있는 사진과 영상을 함께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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