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는 부끄러움과 작은 기쁨, 후회와 희미한 기대처럼, 양가적인 감정들을 동시에 느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가장 끔찍한 참상 속에서 자신의 밑바닥을 직시했고, 자신의 가장 높이 날았을 때를 기억했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가결한지. 무엇을 견딜 수 있고, 무엇을 잃으면 미치는지.

애정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젖어 있는 눈동자에 저만 비치니, 그렇게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일렁이는 촛불과 푸르스름한 달빛이 서로 다른 색으로 시야를 물들였고, 일리야는 자신의 그림자 아래에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 순간의 기쁨은 퍽 순수한 감이 있어서, 그는 일리야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어린애처럼 행복감을 표했다.

일리야가 악의를 품고 있어서. 그 성정을 도무지 교정할 길이 없을 만큼, 지능적이면서도 타고나길 성악(性惡)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토록 일리야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대체 부성애가 무엇이기에, 갱생의 여지도 없는 자식을 위해 평생 지켜 온 지위와 충성조차 내던질 수 있는 걸까.

기억을 잃은 후 내가 그를 버리려고 했을 때. 건국기념일 이후 그를 피해 다니던 나를 찾아왔을 때. 호수에서 나를 구해 주던 밤에, 그리고 내가 암흑가에 다녀온 후 겨우 의식을 찾았던 순간에도.

어차피 ‘불온한 무리’의 유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칼을 들이밀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입 아닌가? 황제는 그것을 나에게 가르쳤다.

……그 후에는 얼어붙은 용광로처럼 가슴속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다만 거스러미처럼 남은 존재를 인식했다

대체 부성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이토록 어리석게 만든단 말인가?

가장 완벽한 제좌를 넘겨줄 수 있다. 그리하여 영원히 그의 그늘 아래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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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최애 빙의가 너무해! 3 [BL] 최애 빙의가 너무해 3
seawolf / BLYNUE 블리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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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에 그녀가 수많은 지탄을 감수했던 것처럼. 황제 또한 그리하면, 많은 것을 잃더라도 가정만큼은 지킬 수 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리석다. 괴람하기 짝이 없는 기대다.

황제는 애초에 사랑을 한 적이 없었다. 이용하고 그 대가를 지불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반문이었다.

황태자도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저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당신의 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위선일 뿐이다. 그렇게 냉소했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불시에 찾아와 나를 둔중하게 치고 지나갔다.

"…그래, 뭐. 참고로 이제 어지간한 기억은 다 떠올랐어. 여전히 당신과 관련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현생의 삶을 대강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는 돼."

평소에 보여주던 것과는 결이 다른 온화한 미소였다. 내 말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지독할 정도로 메마른 환희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신화는 거의 전승되지 않는다. 당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의 관점에서 본 인간은, 개미와 다를 바 없는 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시종일관 어른들의 추잡한 면만을 보며 자란 일리야 브리테논이, 일찍이 미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저 신이 애정을 쏟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저 남자의 말은 합리적이다. 더 안전하고, 고통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죄를 짓지 않아도 된다.

인격이 변한 것도, 기억을 잃은 것도 별일이 아니다. 그 또한 당신의 일면이니 괜찮다고.

……이 삶에는 나를 위해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남자와, 내 마지막 생을 영원히 태워버릴 수 있는 화마가 함께 존재한다.

이리저리 요동치던 모든 끔찍한 기억들과 좋지 않았던 감정들이, 고마움을 닮은 감정의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 나갔다.

대신 비어버린 그 자리를 또 다른 부채감이 차지했다. 내가 이 고마움에 보답하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해서. 그래서 슬퍼졌다.

감정에는 언제나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나조차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삶을 책임질 것을 결심했었다고. 이 삶에서 내게 허락된 사람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시선이 아니다. 대화가 통하고 유추가 가능한 정상인의 시선과는 결이 다른, 어딘가 뒤틀리고 광적인 눈빛이었다.

마치 도미노 같다. 시작점은 내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중간의 어딘가를 쓰러트렸기 때문에 연이어 쓰러지는 도미노.

하지만 이 변수가 다시 운명서의 내용대로 돌아가려는 ‘일종의 관성’이라면 무작정 방치할 수도 없다. 이미 내 기억이 너무 많이 돌아왔기 때문에…….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죽으면 이번 세대에서 끝날 테니까.

"지금의 내가 신념에 반하는 선택을 한다면, 그렇게 산 미래의 내 삶은 결코 떳떳하지 못하겠지."

세상 만물이 나의 죽음을 바라고, 당신의 미래를 축복한다. 그래도 나는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계속해서 죽음으로 내모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노라고. 그것이 원죄(怨罪)라면 그 또한 평생 짊어지고 가겠노라고.

그는 각인된 습관처럼 품에 들어온 사람을 마주 앉았다. 단편적인 행동에도 날것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내면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순수한 비탄이, 울컥 솟구쳤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지독히도 슬펐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범람해서, 파도처럼 가슴 속에 쌓여 있던 화를 지워버렸다.

처음 그 상처가 생겼을 때, 소년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아파도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움직여야 했을 것이고, 밤이 오면 그제야 혼자 끙끙 앓으며 붕대를 감았을 것이다. 해가 뜨면 다시 전선에 나서고, 또다시 다치기를 반복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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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BL] 더 할로우 페어리 테일 (The hollow Fairy Tale) (총3권/완결)
돌체 / 비하인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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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작가님의 소설 <더 할로우 페어리 테일>을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판타지 차원이동, 빙의물, 삼각관계 등 키워드가 재미있어보여서 구입했어요. 사실 1권이 잘 안읽히고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아서 답답했는데 3권 중반부터 소름돋는 복선회수와 한 번에 몰아치는 깨달음이 소름 돋을만큼 짜릿했어요. 주인공들도 그렇고 등장인물들도 어느 하나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이 매력적입니다. 삼각관계에서 망한 주식 잡은 걸 나중에 알았지만 아쉽지는 않아요. 초반부터 확 몰입되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차곡차곡 서사 쌓아가다 확 터지는 스타일이라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운이 남는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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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BL] 더 할로우 페어리 테일 (The hollow Fairy Tale) (총3권/완결)
돌체 / 비하인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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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차곡차곡 쌓이다가 한번에 터지는 느낌이 좋아요. 초반에는 여러 단서와 정보들이 두서없이 느껴지는데 읽다보면 갑자기 이해가 되는 신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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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최애 빙의가 너무해! 3 [BL] 최애 빙의가 너무해 3
seawolf / BLYNUE 블리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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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내게 가장 나을지도 모를 미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라 마지않을 정도로.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게 될 테지? 현생의 기억이 돌아올수록 너는 현생을 책임지려 할 테니까."

장난스러움이 사라진 얼굴은 세상의 진리를 꿰뚫어 보는 현자 같기도 하고, 혹은 세상에 다시없을 사기꾼 같기도 했다.

세 살 어린 동생은 몸을 웅크리면 쿠션에 가려질 만큼 작아서, 소파 위에 앉혀 두고 봉제 인형을 가득 안겨 주면 그 틈에 숨어 있는 인형으로 보였다.

의심을 하는 것조차 그릇되다 느낄 정도로 친애하는 사람들. 그들은 단 한 번도 사르페딘의 앞에서 나쁜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왜 나는 아무것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조차도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이라 허울 좋은 변명을 할 셈인가?

절대적인 시간이 쌓아 올린 관계에 대한 질투, 열등감과 당연함이 주는 좌절감, 불안과 걱정…… 한심하기 짝이 없고, 스스로가 싫어지는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처럼,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구성물이 나를 밀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가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강제로 ‘내’가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은, 공허와 우울로 이루어진 파도 같았다. 계속해서 내게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

나는 언제까지 이런 끔찍한 혼란과 막연함 속에서 표류해야 한단 말인가.

존재하지 않는 탈출로를 만들기 위해 맨몸으로 천장을 치는, 좌절로 점철된 삶. 그게 이 현생의 전부였다.

연회장 안의 모든 인간군상이 난파선의 파편에 매달린 채 처참한 혼란에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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