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그녀가 수많은 지탄을 감수했던 것처럼. 황제 또한 그리하면, 많은 것을 잃더라도 가정만큼은 지킬 수 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리석다. 괴람하기 짝이 없는 기대다.
황제는 애초에 사랑을 한 적이 없었다. 이용하고 그 대가를 지불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반문이었다.
황태자도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저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당신의 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위선일 뿐이다. 그렇게 냉소했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불시에 찾아와 나를 둔중하게 치고 지나갔다.
"…그래, 뭐. 참고로 이제 어지간한 기억은 다 떠올랐어. 여전히 당신과 관련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현생의 삶을 대강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는 돼."
평소에 보여주던 것과는 결이 다른 온화한 미소였다. 내 말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지독할 정도로 메마른 환희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신화는 거의 전승되지 않는다. 당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의 관점에서 본 인간은, 개미와 다를 바 없는 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시종일관 어른들의 추잡한 면만을 보며 자란 일리야 브리테논이, 일찍이 미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저 신이 애정을 쏟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저 남자의 말은 합리적이다. 더 안전하고, 고통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죄를 짓지 않아도 된다.
인격이 변한 것도, 기억을 잃은 것도 별일이 아니다. 그 또한 당신의 일면이니 괜찮다고.
……이 삶에는 나를 위해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남자와, 내 마지막 생을 영원히 태워버릴 수 있는 화마가 함께 존재한다.
이리저리 요동치던 모든 끔찍한 기억들과 좋지 않았던 감정들이, 고마움을 닮은 감정의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 나갔다.
대신 비어버린 그 자리를 또 다른 부채감이 차지했다. 내가 이 고마움에 보답하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해서. 그래서 슬퍼졌다.
감정에는 언제나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나조차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삶을 책임질 것을 결심했었다고. 이 삶에서 내게 허락된 사람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시선이 아니다. 대화가 통하고 유추가 가능한 정상인의 시선과는 결이 다른, 어딘가 뒤틀리고 광적인 눈빛이었다.
마치 도미노 같다. 시작점은 내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중간의 어딘가를 쓰러트렸기 때문에 연이어 쓰러지는 도미노.
하지만 이 변수가 다시 운명서의 내용대로 돌아가려는 ‘일종의 관성’이라면 무작정 방치할 수도 없다. 이미 내 기억이 너무 많이 돌아왔기 때문에…….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죽으면 이번 세대에서 끝날 테니까.
"지금의 내가 신념에 반하는 선택을 한다면, 그렇게 산 미래의 내 삶은 결코 떳떳하지 못하겠지."
세상 만물이 나의 죽음을 바라고, 당신의 미래를 축복한다. 그래도 나는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계속해서 죽음으로 내모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노라고. 그것이 원죄(怨罪)라면 그 또한 평생 짊어지고 가겠노라고.
그는 각인된 습관처럼 품에 들어온 사람을 마주 앉았다. 단편적인 행동에도 날것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내면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순수한 비탄이, 울컥 솟구쳤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지독히도 슬펐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범람해서, 파도처럼 가슴 속에 쌓여 있던 화를 지워버렸다.
처음 그 상처가 생겼을 때, 소년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아파도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움직여야 했을 것이고, 밤이 오면 그제야 혼자 끙끙 앓으며 붕대를 감았을 것이다. 해가 뜨면 다시 전선에 나서고, 또다시 다치기를 반복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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