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숫자가 '0'이 되는 날에 너는 자유로워질 거야! ​ 어둠이 내리고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 항구도시 시장은 파장 분위기다. 차에서 내려 오늘의 표적을 찾아 나선 한 남자의 손엔 익숙한 듯 캐리어를 끌고 걸어간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을 지나 그가 도착한 목적지는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들이 무보증 단기임대로 살고 있는 아주 오래되고 허름한 건물 3층이었다. 재에게 사채 빚을 지고 생명보험증에 서명을 한 오십 대 남자가 이곳에 있다. 그는 무섭게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종적을 감췄지만 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능력도 배짱도 삶의 의지도 없는 세상 마지막까지 내몰린 사람들 중 하나겠지만 남의 돈을 빌리고 안 갚았음 죗값을 달게 치워야겠지. 안 됐지만 본인이 선택한 결과니 어쩌겠는가. 그 사람처럼 빚을 갚기 위해 재의 용역에서 일하던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시체와 다름없는 남자를 산속 깊은 저수지에 수장하는 것이다. 이 남자가 마지막이 표적이고 오늘이 지나면 재에게서 나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다. 하.. 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대박 핑계 보소. 잔인하고 흉악한 살인자라고 잔뜩 욕을 퍼부으며 경멸을 해야 되나? 아니면 지난 일은 다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길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지지를 해줘야 되나?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니 정신없다요.

 

그런데 들어선 집안에서 발견된 남자는 경찰에게 신고한 후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고, 곧이어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발소리에 그의 계획은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캐리어 속에 들어 있는 남자를 포기한 체 그곳을 급히 도망쳐 나와 몸을 숨겨야만 했다. 재를 처음 만난 건 열세 살이었고 그는 심부름을 잘할 때마다 숫자가 줄어든다고 했다. 그렇게 열아홉부터 서른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아버지가 진 빚을 대신 갚기 위해 근면 성실하게 숱한 표적들을 처리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제동이 걸렸다. 나는 재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자유로운 삶은 어떨까? 이 끝은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삶이 정말 기구하고 사정이 참 딱하기도 했지만 꼭 그렇게 당하고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을까 싶어 안타까웠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과 가진 힘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미친 척 시도를 해서 발버둥 쳐볼 수는 있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죽기 밖에 더 하겠나..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만 되고 사람이 숫자와 돈으로 보이는 인생이라면 더 미치고 독해지기 전에 죽기 살기로 한번 덤벼보기나 하지. 내가 죽든 니가 죽든 둘 다 죽든 뭔 상관이랴. 연쇄살인범이 돼서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고 틀려진다고. 재의 새빨간 거짓말을 너무도 순진하게 믿은 죄, 그가 혼자 책임지고 감당할 몫이었다.

 

재의 용역이 되었던 그 순간부터 김진우라는 이름을 버린 체 새로운 이름으로 살았고 표적을 처리하고 나면 매번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재는 또다시 뜻밖의 지시를 한다. 버려지고 내쳐질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아무도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세상에서 버려진 B 구역으로 가라고. 결국 나의 끝은 여기가 되는 걸까? 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한 여자가 철거를 앞둔 달동네 그의 집 앞에 찾아와 그의 본명을 말한다. 그녀는 17살 때 재의 지시로 한 달간 감시를 했던 서유리였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친 그녀는 예전과 너무 많이 분위기가 달라졌으며 놀라운 사실과 충격적인 제안을 한다. 처음엔 그 말을 무시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혼란스럽고 생각이 복잡해진 진우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 그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인생. 눈과 귀와 입을 닫은 체  딱 하나만 바라며 지금껏 살기 위해 모든 걸 버티며 달려왔다.

 

그의 삶은 재의 꼭두각시였고 노예나 마찬가지였기에 넘 안쓰럽고 불쌍했다. 부모가 진 빚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연대책임을 지도록 만든 어른들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심보도 기가 막혔지만 장단 맞춰 더 가혹하고 엽기적인 벌을 죄의식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더 끔찍하고 소름 끼쳤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잊혀진 사람들과 목숨을 담보로 돈을 거래하는 어둠의 유혹 앞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그들의 민낯을 들추고 폭로한다. 자신도 모르게 올가미 덫에 씌여 서로를 이용하고 구속하면서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악행의 릴레이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죽기 전에 숨어서라도 한 번쯤은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고픈 이들의 절실하고 애절한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 연민이 느껴졌고 각자 처한 상황이 이해도 되면서 공감도 됐더랬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이름 없는 사람들. 행복하지 않았던 남은 그들이 살아야만 되는 이유를 찾아 새롭게 출발하고픈 희망이 생겨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끔찍했던 세상에 대한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싶다. 결코 저지른 죄는 용서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