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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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미국 흑인여성 문학의 어머니라 불리는 조라 닐 허스턴의 대표작이라 한다.

책 뒤편 작가 연보를 보니 허스턴의 출생연도가 불명확하여 1891년에서 1901년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는데 아무래도 생전에 별로 주목받지 못한 흑인 여성작가라는 점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래도 미국 최초의 흑인 자치도시인 플로리다 이튼빌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시장직을 역임하였다고 하니 꽤 유복한 환경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어머니 사후에 유랑극단을 따라 고향을 등지고, 갖은 허드렛일을 하며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고달픈 삶을 살았겠지만, 어릴 때의 흑인 공동체문화는 긍정적이고,자립적인 삶의 자세,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자전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 그녀의 이러한 성향이 드러나 있는데, 그녀가 그리고 있는 인간적이고 낙천적인 흑인상(특히 세번째 남편 티 케이크)에 대해 당시 흑인 남성 비평가들은 백인들의 구미에 영합하였다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었던 모양이다.

 

흑인여성 3대의 고난에 찬 삶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도 인종 및 계급갈등, 사회변혁을 위한 선명성과 투쟁성 등이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할머니를 통해 노예신분 흑인 여성(3중 약자)으로서의 고통스런 삶 그리고 주인공이 느끼고, 깨닫는 주체적 자아로서의 각성을 묘사하는 부분은 특히 아름답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아가, 이 할미가 알고 있는 한에는 백인이 이 세상의 지배자다. 백인은 자기 짐을 팽개치며 흑인에게 그걸 주워들라고 한다. 다른 수가 없는 흑인은 그걸 주워들지. 하지만 자기가 그걸 져 나르진 않아. 자기 여자한테 넘겨버리지. 내가 아는 한 흑인여자는 이 세상의 노새다.”(26)

 

무엇 때문에 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새로 태어난 듯 변신을 한 듯한 느낌에 전율했다. 그녀는 당장 대문을 걸어나와 남쪽을 향해 갔다. 설사 거기 조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 하더라고, 이것은 그녀에게 더 나은 변화일 수 밖에 없었다.(46,47)

 

고향 아프리카에서 포획되어 끌려오든지, 싼값에 팔려오든지 노예의 삶을 살다 차별철폐투쟁을 거쳐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법적인 평등을 보장받기까지 얼마나 가열차고, 고통스런 희생이 있었겠는가 마는 이 인종차별문제가 계급문제와 뒤섞이면 복잡해진다. 같은 흑인끼리도 갈등과 반목이 있기 마련이다.(우리나라 일제 강점기때의 친일, 부역세력이나 노동자 계급끼리의 다툼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 소설에서 흑인혼혈 터너부인의 허영심...마치 미국에 이민가서 백인, 흑인 밑에서 괄시와 차별을 받으면서도 동포들을 무시하며 잘난 척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터너 부인 자신의 눈에 그녀의 체형과 이목구비는 완벽했다. 그녀의 콧날은 살짝 날이 서있었고 그럼으로 해서 그녀는 자부심을 가졌다 얄따란 입술은 언제 보나 매혹적이었고, 얕은 돋을 새김 양식의 밋밋한 엉덩이조차 그녀에게는 긍지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검둥이들로 구분시켜주는 증표들이었다.

 

검둥이들이 그렇게 많지만 않았으면 인종 문제도 없었을 거야. 그랬더라면 백인들도 우릴 자기들 가운데 끼워줬을 테고. 그런데 그 검둥이들이 그걸 가로막고 있단 말이지.~ 가난이 문제가 아니고, 피부 색깔과 생김새가 문제인 거야. 세상에 어떤 사람이 유모차에 깜둥이 아길 태우고 싶겠어.~ 날 좀 보라구! 내 코가 어디 납작하고 내 입술이 어디 검붉고 두터운가. 난 제대로 모양이 잡힌 여자라구. 내 눈 코 입은 백인의 것 그대로야. 그런데도 난 다른 모든 검둥이들과 똑같이 취급을 당한단 말이야.”(180,181)

 

이 소설은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의 틀을 뛰어넘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서양소설을 읽으면서, 사랑(부부애)을 이렇게 아름다운 대화문장으로 묘사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허리케인이 덮치기 직전, 주인공 부부의 대화장면)

 

고마워, 여보. 하지만 당신이 죽게 된다고 해봐. 지금. 그래도 당신 내가 당신을 이리 끌고 온 데 대해 화나지 않겠어?”

 

아니, 당신과 2년을 함께 살았잖아. 사람이 아침 해가 돋는 걸 볼 수 있다면, 저녁이 돼서 죽는 것도 상관없을 거야. 세상엔 아침 해를 구경도 못 해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어둠 속을 더듬어 헤매고 있었지. 그런데 신이 내 앞에 문을 열어주셨어.”(203)

 

어떠한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그러하다. 뜬금없고 견강부회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논어>에 나오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구절이 떠오른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공자의 이 말은 남녀평등페미니즘, 미투운동을 뛰어넘는 보편성- 진리(또는 )에의 추구-을 뜻하는 것이다.(개인적으로 우리 소설 '토지'의 최고 장면으로 꼽는 용이 품에 죽어가는 월선. " 임자, 여한이 없제?" "여한 없습니더."도 생각나는 대목이다)

 

허스턴의 소설이 인종 및 계급에 대한 투쟁성이 부족하고, 사회개혁의 수단으로서 미흡하다는 비판은 당시의 운동성과를 담보하기 위한 절박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부관계를 포함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한 보편적 사랑, 자연과 인간 존중, 생명에의 연민등 그녀의 신념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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