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들에게 - 2006 제5회 이수문학상 수상작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갑자기 문단 성추행,성폭력 등과 관련해서 최영미 시인이 인터넷에 자주 등장한다. 흥미롭게 검색은 해보았지만 사실관계나 최영미 시인의 인간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무지한 내가 뭐라 언급할 사안은 아니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투운동이 확산되어 우리 사회에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이상 고통과 피해를 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때마침 뒤져보니 집에 사다놓고 읽지 않은 그녀의 시집 [돼지들에게]가 있어 펼쳐봤다. 이번 사태를 접하고 나서 표제작인 '돼지들에게'를 비롯한 돼지연작을 읽어보니, 우리사회의 허위와 탐욕을 은유와 알레고리로 풍자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평보다 문단 성폭력문제를 훨씬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묘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돼지들'이여 각성하라!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적이 잇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비를 피하여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타협했다. 두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번만 달라고...

- <돼지들에게> 11~15쪽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그는 진주를 한 번 보고 싶었을 뿐,

두번 세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하려 왔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돼지의 본질> 24쪽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후 그녀의 시세계는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예술가적 기질 때문이겠지만 그녀는 무척 예민하고,자아가 강하며,정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한편에선 사회성이나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하겠지만... 얼마전에 읽은 톨스토이 소설[안나카레니나]에서 귀족사회의 가식과 허위를 못견뎌 하는 '레빈'이나 '안나' 와 닮은 구석이 있다.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는 "산다는 것이 내게 치욕이다. 시는 그 치욕의 강을 건너는 다리 같은 것.내가 왜 어떤 항구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방랑자가 되었는지,돌아갈 고향이 없는 나그네처럼 떠돌았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직이 풀어놓을 힘이 내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바람 부는 날.의 시작 노트>.51쪽) 는 고백처럼 세상살이에서 겪는 고독과 치욕이 클수 밖에 없으며 이들에게는 삶이란 '시쓰기'로 간신히 버텨가는 고통의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서른, 잔치는 끝났'음에도 여전히 허위와 가식에 찬 인간과 세상에 대해 "그처럼 당연한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했던가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과대포장했다 ~관념으로 도배된 자기도취와 감상적 애국이 종이로 인쇄되어 팔리는 이것이 진보라면 밑씻개로나 쓰겠다 아니 더러워서! 밑씻개로도 쓰지 않겠다"(<시대의 우울>93쪽)라며 세련되지 못한 저주를 퍼붓고, 사랑과 믿음에 배신당한 스스로를 일깨운다.


또한 지치고, 나이들어 상처에 굳은살이 생기면서 "잔치가 끝난 뒤에도 설거지 중인 내게 죄가 있다면, 이세상을 사랑한 죄 밖에...한번도 제대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세기말, 제기랄>55쪽)고 되돌아보며 자책하다가  "나 또한 그처럼 어리석었으니, 재능은 발자크에 못 미치나 어리석음에서는 그에 못지않았다. 다시 살아야겠다. 써야겠다. 싸워야겠다."(<발자크의 집을 다녀와>79쪽)라며 여전히 서툰 시로나마 삶에의 투쟁의지를 이어갈 것임을 꿋꿋한게 다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위의 다짐과 각오처럼 최영미 시인이 앞으로도 더욱더 열심히 시를 쓰고, 상처를 이겨내 앞으로는 그녀의 시세계가 보다 웅숭깊고,여유로워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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