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 곽재구 -
외로운 네가
허공을 향해 조선낫을 휘두를 때
흰옷 입은 우리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사랑과 집념을 위해
아니 그보다는 한 맺힌 네
슬픔과 기다림의 절정을 위해
너는 낯선 땅 힘센 미국 선수의
빛나는 부와 프론티어 정신 앞에
덜그럭거리는 조선맷돌 하나의 힘으로
네 슬픔의 마지막 절정 위에 큰칼을 씌웠다
돈이 많은 나라
자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과 포탄을 쓰는 나라
우리들은 오늘 그 나라 대통령이 원하는
레바논 전쟁에 우리들의 꿈을 팔 것인가 생각하고
아침 저녁 TV는 우리들의 희망 위에
또 한겹 두터운 포장지를 씌우겠지만
너는 부서질 줄을 알고
너는 너의 슬픔의 한없는 깊이를 알고
너는 너의 사랑의 겸허한 목소리를 알고
너를 기다리는 사립문 위
어머니의 오랜 박꽃까지 알면서도
덜그럭거리는 조선맷돌 디딜방아 한 방으로
이 낯선 힘센 나라의 콘크리트
벼랑 위에 부딪쳐 쓰러지는구나
사랑이 많은 나라
그리움이 깊어 속살 푸른 가을하늘의 나라
득구, 너의 고향 북한강에 지금은
늦가을의 골안개 희게 흩어지고
네가 싸운 미국땅 부러우면서도
아무런 부러움도 남길 것 없는 타인의 땅을 생각하며
우리들이 세워야 할 힘센
사랑과 희망의 푸른 그날을 위해
오늘 네 쓰러진 머리 힘빠진 목줄기에
네 어린 날 검정고무신짝으로
네 고향 북한강 푸르디푸른 그리움의 강물을 쏟는다.
엄경희
- 곽재구 -
미스 엄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차라리 서정성을 생각하며
17번 茶順伊라고 불러주어요
춘천을 떠나온 지 칠년
지용의 호수보다 맑은 고향이에요
생각하기 싫어요 식구들의 얼굴
그러나 아버지의 탄광 이야기는 언제나 좋아요
한 주일의 채탄작업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오는 토요일의 황혼이 좋았어요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던 성 교회의
일요일의 평화가 좋았어요
일곱살 적 함백선 어느 작은 산역에서
아버지가 꺾어주던 작고 흰 채송화를
아직 가슴에 새겨두고 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크고 검은
아버지의 손과 눈망울을
끝내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던 그 일요일
흰 눈이 드문드문 날리던 그해 광산촌의
겨울을 사랑하고 있어요
더 이상 죄를 생각하기 싫어요
관광호텔 스카이라운지
피뢰침에 걸려 웅웅대는
저 스산한 죄의 바람소리가 싫어요
지난 가을 그 피뢰침에
목을 걸고 죽은 27번 금희의
벗은 알몸이 싫어요
가까이 와요 문과대학
철학과를 나온 엉터리 시인친구
저 아래 깜박이는 도시의 죽은 눈빛을 보아요
오지 않는 예언자를 기다리며
번듯하게 누워 죽은 도시의 검고 흉한 관들이 싫어요
아무에게나 속고 쓰러지는
착한 별과 꽃들이 추워요
그러나 이제 누구에게나 사랑을 선언할 수 있어요
어둠이 어둠이라면
밝음이 밝음이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나를
이 옥상에서 밀어제껴주세요
펄펄펄 펄펄펄 사랑이라고 평화라고 뉘우치며
하늘의 꽃으로 피어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