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작가 이언 매큐언의 이 두꺼운 장편소설을 작년에 앞부분의 분수대 장면까지 읽다가 말았는데, 이 참엔 맘먹고 완독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처음부터 읽어야 했는데, 다시 읽으면서 내가 왜 읽기를 중단했는지 알겠다. 이 소설에 대해서 언론을 포함한 권위자들의 찬사를 보니 작가의 문체에 대해 섬세하고 장중하다고 평가한다. 영어 원본을 읽지 못해(능력도 안된다.)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섬세하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로 지루하다는 인상이고, 장중하다는 의미는 엄숙하고 묵직하며 지적이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역자후기를 보니 브리오니의 생각을 묘사한 부분은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를 연상시킨다고 하는데 역시 의식의 흐름기법을 써서 그런지 초반이 다소 지겹기는 하지만, 1부 후반부터는 이 소설의 미덕인 감동적인 스토리와 예기치 않은 반전을 맛 볼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영국 남부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13살 소녀인 브리오니와 23살인 언니 세실리아, 그리고 세실리아와 사랑을 막 시작한 파출부 아들 로비. 이렇게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1,2,3부와 에필로그 등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공상과 글쓰기를 즐기는 사춘기의 브리오니는 언니의 연인이 된 로비를 사랑했던 것인데, 1부에서는 로비를 사이에 둔 자매간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연애 소설인가 싶다가 분수대 장면과 서재 장면을 거쳐 사촌 롤라의 성폭행 장면에 이르기 까지 영화 라쇼몽을 연상시키는 시점변화가 이채롭다.브리오니의 의도된(?) 판단착오로 억울하게 성폭행범으로 몰린 로비가 체포된다. 2부에서는 작년에 본 영화 덩케르크를 떠오르게 하는 전쟁 소설인 듯도 한데, 브리오니의 일관된 진술때문에 강간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후 3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로비.그가 화자로 등장하면서  전쟁터로 떠나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독일에 패퇴한 후 귀국을 위해 덩케르크를 향해 가는 1940년의 상황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속죄의 의미로 수련간호사라는 고행의 길을 가는 브리오니를 중심으로 하는 메디컬 드라마가 연출되다 후반엔 진짜 성폭행범이 누구인지 밝혀진다. 용서를 빌기 위해 언니 세실리아를 찾아간 집에서 브리오니는 로비와도 재회한다.그리고, 마지막 편 에필로그에서는 운명의 1940년으로부터 59년이 지난 1999년 런던을 배경으로 77세의 유명소설가가 된 브리오니의 시점에서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이 소설을 꼼꼼하게 의미를 되새기며 다 읽고 나니 세련되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서사의 구성적 묘미가 압도적일뿐더러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와 정보를 취합하고 공부했을지 짐작 될 만큼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과연, 이언 맥큐언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가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인상적인 몇 장면을 꼽아본다.

 

결국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이별장면.

[그녀는 그의 뺨에 눈물을 흘렸고 그런 슬픔 때문에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버스가 다시 도착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의 손목을 꼬옥 쥐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지켜 보았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자신도 버스에 올라 병원까지 그녀와 함께 갔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따라 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차도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탄 버스는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고 곧 의사당 앞 광장으로 사라져 버렸다.(292)

 

로비가 겪는 전쟁의 비극과 무참한 죽음을 묘사하면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서술하는 듯하지만 후반의 반전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장면.

[전쟁은 전쟁광들의 취미일 뿐 심각할 건 없었다. 사냥개를 풀어 미친 듯이 사냥감을 쫒는 동안, 울타리 저 너머로 지나가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여자는 뜨개질에 여념이 잆었고, 새로 지은 집의 휑한 정원에서는 한 남자가 아들에게 공차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쟁기질은 계속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농작물을 거둬들여 빻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을 먹고..... 모두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332)

 

후반의 반전이 돋보이는 이 소설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면, 초반에 이미 복선이 깔려있음을 알수 있는데 분수대 장면을 두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서술한 부분을 살펴보자.

[이 어린 소녀가 창가로 되돌아가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자갈길에 생겼던 젖은 자국은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이제 기억을 빼고는, 세 명의 마음속에 남은 같은 일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빼고는, 분수대 옆에서 일어난 무언극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진실은 허구만큼이나 붙잡을 수 없는 유령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브리오니는 지금 당장 작업에 착수 할 수 있었다. 우선 자신이 본 내용을 글로 옮기는 것, ~ 그리고 나서는 세실리아 언니의 눈을 통하여, 그 다음에는 로비의 눈을 통하여 그 장면을 재구성하면 될 것이었다.](68)

 

이렇게 독자의 글 읽기를 방해하는 듯한 갑작스런 작가의 틈입은 '기억과 진실'이라는 문제에 대해 파고들면서 '왜곡과 오류'의 가능성을  내비치다가 결국 이 소설을 소설이란 무엇인가? 또는 소설가는 누구인가? 하는 매우 본질적인 물음과 함께 이야기의 중첩성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소설()() 위한 철학적,우화적 소설로 읽히게 하는 역할까지도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 소설의 에필로그 마지막 페이지에 솔직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을 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라는 소설속의 소설가인 브리오니의 진술을 빌어 이언 매큐언의 철학이 언급된다. 따라서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기에 이 소설에서 브리오니의 잘못()() 결코 용서받지도, ‘속죄되지 못한다. 그래서 브리오니는 다시 이 소설의 결말을 아래와 같이 재구성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생일 축하파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낼 힘이 있다면.....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불가능하지는 않다.](521) 아마도 브리오니가 한숨 자고나서 다시 손을 댄다면 이 소설의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결코 결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않았다). 지금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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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모카 2018-06-24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부분 읽다가 손을 뗐는데 꼭 읽고싶은 작품이에요. 스포가 될까봐 첫부분만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후기 제대로 읽겠습니다^^

sprenown 2018-06-24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꼭 완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