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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ㅣ 살림지식총서 25
이경재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평점 :
요즘 중세에 대해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입문서 수준의 맛보기용으로 훑어봤다. 흔히들 중세는 서로마제국 멸망(476년)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세가 시작된 15세기 또는 1453년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멸망까지의 약1,000년을 일컫는다. 이러한 시대구분에 대해 유럽에만 한정할 뿐 동양사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도 생성되지 않는 암흑기는 아니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당연하다. 아무리 중세가 암흑시대라 한들 그 시대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고,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니 학문과 예술이 신 중심의 가치관으로 교조적이며 단순하다 할지라도 나름의 삶의 방식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신학을 비롯해서 교부철학이니 스콜라 철학이니 하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거야 중세를 전공하는 학자나 작가 등 중세로 먹고 살아야 하는 자나 무조건 중세(또는 그 분위기)가 좋다는 중세 덕후들의 몫이지 나같이 근·현대의 산출물에 대해서도 허덕대고 있는 일반독자에게는 중세일반에 대한 인문학 고전이나마 찾아 읽는 것도 벅찬 듯 하다.
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 전공자 답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이어받은 아퀴나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이란 동물적 욕망덩어리나 신의 지시에 의한 기계적 도구가 아닌 도덕적인 선의지를 가진 자율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고 하는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는 언술과 신 존재 증명 논쟁 등을 통해 종교가 앎의 영역인지, 믿음의 영역인지와 관련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역설적'으로 중세는 이성을 매우 중요시한 시대였음을 역설한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세를 인간중심의 휴머니즘 시대라거나 이성중심의 부흥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역사를 통시적, 정량적으로 보는 시대구분으로서의 중세는 공시적, 정성적 구분으로서 암흑기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겠는가?
요즘 학계나 출판계의 중세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는 어쩌면 유행했던(하고 있는)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전복적 사고와 더불어 중세를 전공한 학자들과 불황에 시달리는 출판계의 ‘영역(파이) 키우기’를 위한 공급측면이 중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수요측면의 독자들을 이끌고 가는 양상으로 1,000년이라는 기나긴 시대의 축적물에 대한 부분적 연구성과와 게임, 영화 등을 통해 새로움(마술적이고, 기괴한)에 대한 호기심에서 일어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니면 자본의 생리상 더 이상 우려 먹을 게 없는 학계나 출판계에서 중세가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등장한 것이 아닐까? 삐딱하게 생각해 본다. (이런 삐딱함은 최근 북미회담의 성사를 두고, 트럼프가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북한의 부동산가치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어 가능하지 않았을까? 중국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외 향후 북한의 부동산가치와 무역이익이 더 탐났을 수 있지 않았을까? 로 이어진다)
내가 살고 있는 현대는 근대 르네상스 이후 이성중심,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 확실하다. 하기야 그 근대라는 것도 중세라는 보이지 않는 수면아래의 거대한 빙산에서, 수면위로 간신히 드러난 일각에 불과하다는 주장에는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이 게으른 독자는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1,2,3,4」은 도대체 언제쯤 읽을 수 있으려나? 에코의 중세는 1,000년처럼 너무 길어 엄두를 낼 수 없고, 하위징아는 왠지 가을에 읽어야 분위기가 살 것 같긴 한데, 올가을쯤에나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되면 내년 가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