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8
박영균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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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판사 책세상에서 나온 Vita Activa 개념사 시리즈인가 본데, 작지만 상당히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알라딘 중고서점에 이런 책이 나오면 선뜻 구입하게 된다. 책날개 안쪽을 보니 일단 저자는 마르크스에 대한 탈현대적 모색과 21세기 변혁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진보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박영균 교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노동에 대한 사유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영역과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영역, 그리고 정치경제학적인 영역 전반에 걸쳐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이 세 영역이 어떻게 통합적으로 제시되는지를 살펴보고, 노동가치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따라 관점의 차이점을 드러내며 노동가치의 현재적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왜 노동가치인가: 12,13)고 밝히고 있다.

 

노동에 의해 소유권의 정당화가 이루어진 것이다는 논리는 존 로크(1632~1704)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그러면 자기가치를 증식하는 자본의 소유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노동가치에 대한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아담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인 마르크스(잉여가치론으로 발전)로부터 촉발되었던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이 논쟁은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직후 제기된 여러 논쟁들에서 비롯되었다. 마르크스는 가치와 생산가격의 괴리문제가 개별 자본의 입장에서는 발생하지만 사회적 총자본 이라는 입장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생각을 표현한 것이 바로 총가치=총생산 가격, 총잉여가치=총이윤이다. 그러나 한계효용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뵘 바베르크(1851~1914)1896<마르크스 이론 체계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자본>1권과 3권이 모순적이며 평균 이윤율과 생산가격에 관한 이론 사이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가였던 힐퍼딩(1877~1904)이 즉각 반론을 제기하면서 오늘날 가치 논쟁또는 전형 논쟁이라고 알려진 논쟁이 시작되었다.](131,132)고 한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읽지 못할 마르크스의 <자본>을 당연히 읽어보지 못한 내가 뭐라 말할 입장도 아니고, 이러한 논쟁의 전개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도 없다. 다만 마르크스 입문서나 인터넷 강의를 통해 간신히 알게 된 경제학 기초지식을 동원해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일단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주류경제학은 자본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노동으로 본다.(노동가치설: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 외형적으로 자본으로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노동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절대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로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사회다. 다시 말하면, “과거노동에서 축적된 자본이 현재의 노동을 억압하고 지배한다. 또한 현재 노동이 새로 창출되었다면, 과거노동은 단지 투입물에서 산출물로 이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에서 착취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용가치(노동가격)교환가격(임금=생계비)이다. ,형식적으로 등가 교환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등가 교환인 것이다.(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자본가의 착취방식은 노동자들을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게 한다.(절대적 잉여가치 추구) 이윤추구를 위한 경쟁을 통해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기술 발전노동(가변자본)투입감소’, ‘자본(고정자본)투입증가잉여가치 감소하게 된다.(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 자본가는 고정자본을 늘려 임금만큼의 가치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짧게 만든다.상대적 잉여가치추구.(자본주의는 성장을 멈춘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가 설명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평균이윤율 하락 노동자의 증가 공장규모의 증대 노동자의 조직화 평균이윤율 더 하락.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프롤레타이아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마르크스도 맬서스의 영향을 받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생산물 총액이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임금(소비여력)총액 보다 더 커지게 되는 가치실현의 실패(‘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고전경제학자 세이의 법칙이 깨진다.)를 얘기한다. 그래서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아 필연적이고, 영구적인 공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빈곤 궁핍화테제를 보면, 자본가 계급내 경쟁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산업예비군 증가(실업자) 임금하락(자본가 이윤증가) 빈부격차 증가 로 이어져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통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의 사회화에서 나오는 것, 즉 생산을 둘러싸고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의 사회적 힘이 집약된 결과로 보았고 그래서 생산력 발전의 몫은 인류 공통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사회, ‘생산의 사회화에 조응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조직된 사회, 즉 공동체가 생산 수단을 소유·통제하고, 생산-소비-기획을 공동체 전체가 자치적인 원리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로 제시되었다.](126)

 

마르크스가 꿈꾸는 이러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의 마르크스 비판에 의하면, 19세기말 노동자의 구매력 확산이 발생하였고, 지속적인 기술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 가능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아날학파의 전통에 따라 250년간의 부의집중과 분배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질 경우 불평등 또한 그에 비례해 늘어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하면서 현재의 부의 독점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활한 자본주의는 불평등이 심화돼 붕괴될 조짐이 생기면 또 다른 정책적 결정을 통해 교묘하게 계속 유지해 갈 것이다. 일단 경제적 불평등 해소문제와 관련해서도 피케티가 주장하는 글로벌 자본세는 도입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더라도 체제에 위협이 된다면 모를까.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국을 위시한 국가들의 이해관계로 국가간의 합의하기도 어렵겠지만, 도입되어 일정부분 영향을 준다하더라도 국가간, 계층간 경제적 불평등이 제대로 해소될지도 의문이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의 노동이 자기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통제를 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들의 차이가 생성의 힘이 되는, 역동적인 삶의 공동체다. 이런 측면에서 노동의 종말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강제되는 노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창조된 가치가 오히려 각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권력이 되는 세계, 즉 자본주의의 소유권을 벗어나 노동이 자기 가치화하는 세상을, 사회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서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노동 과 가치가 되는 코뮌을 건설해야 한다는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163, 164) 역사적으로는 실패했다 할지라도 앞으로 언젠가는 나의 노동이 가치있게 대접받는 사회, 마르크스가 꿈꾸는 이런 세상, 이런 공동체가 건설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욕망을 가장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구축해 설사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더라도 그것들을 변형해 스펀지처럼 체제내로 흡수해 버리고 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이 자본주의... 아마도 접두사는 바뀔지언정 결코 붕괴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순진하고, 순박하게 로크 식으로 말한다면, 결국은 체제내에서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등 경제활동 주체 상호간 이기적 욕망을 이성적, 민주적으로 통제할수 있는 사회계약을 맺어 각자의 노동이 가치를 인정받고, 평등하게 존중되는 사회, 인간의 얼굴을 한 ~ 자본주의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과연?...글쎄...

조금 엇나간 얘기긴 하지만, 이익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신의마저 져버리는 자본주의의 교활성은 이번 미국 트럼프의 북미회담 취소통보에도 여실히 드러나는 듯하다.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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