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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평점 :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첫 권 [빅 슬립]을
읽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요즘의 범죄 스릴러에 비하면 늘어지는 전개, 건조하고
딱딱한 묘사 등으로 ‘역시 하드보일드는 나랑 안 맞아’를
되새기게 한 작품이다. 그래도 끝까지 읽게 만든 원동력의 8할은
시니컬한 유머감각에 나름의 기사도와 철칙을 지닌 터프가이 필립 말로 때문이다.
수사관 생활을 하다 말을 안 들어 해고 당했을 정도로 거칠고 제멋대로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겉은
차갑고 냉정한 듯 보이지만, 안은 낭만과 의리를 간직한 사나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이기에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냉소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돈, 여자,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신념에 따라 의뢰인을 보호하며 사건을
파해쳐 나간다. 권말 해설에서 역자가 표현한 대로 필립 말로는 ‘고독하고
초라한’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와 같은 캐릭터다. - 183센티의 큰 키에 잘생긴 33살 미혼남이라는 설정은 덤이다.
But, 매력적인 필립 말로 캐릭터를 제외하면 작품 전반적으로는 루즈한 느낌이다. 스토리도 딱히
트릭이나 반전이랄 것이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하드보일드의 고전답게 생생한 캐릭터와 치밀한 전개로 읽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스토리는 크게 스턴우드 장군이 의뢰한 협박건을 해결하는 전반부와 러스티 리건의
행방을 조사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챈들러 특유의 문체와 느릿한 전개로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에 속도가 붙으며 결말이 궁금하게 만든다. 세밀한
묘사와 건조한 문체 역시 처음에는 낯설지만, 중반쯤 지나면 익숙해지면서 나름의 쿨함과 스피디함을 맛
볼 수 있다. 특히 필립 말로의 냉소적인 캐릭터가 드러나는 위트 있는 대사는 전개의 지루함을 보상하고도
남는 재미가 있다.
힘겹게 완독한 만큼 씁쓸한 여운도 짙다. 나머지 시리즈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