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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놀라운 치유력
보리스 시륄니크 지음, 임희근 옮김 / 북하우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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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신경정신의학자의 저작으로, "불행을 겪은 사람"이 다시 원상 회복이 되는 과정과 추진력을 "복원력"이라는 물리학 개념을 빌어 소개한다. 왜 어떤 사람은 끔찍한 경험을 겪고도 다시 회복되어 정상적이거나, 오히려 더 능동적인 삶을 영위하는가? 왜 누구는 그렇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라는 주제는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오래된 주제이다. 일부 학자들은 환경적 요인으로 인간행동을 설명하려 하고, 또 일부의 학자들은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를 중요시한다. 누가, 왜 그런것일까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학자의 욕심이겠지만,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이론은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힘들것이다. 인간이 한줌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존재는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시퀼니크라는 이 프랑스인 의학자는 인터뷰와 관찰을 통해 흥미로운 주제에 접근한다. 비록 복원력이 어디에서, 어떻게 기원하는가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복원력이 정신적 외상이나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복원력의 작용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능동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기술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서두에서 가장 공을 들여 주장하는 바는, 복원력에 대한 주장이 결코 "불행"자체를 미화하거나, 공격자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상 가장 오해되는 부분중의 하나가, 성폭행으로부터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려하면,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중의 하나가, 그 성폭행이 가지는 의미를 격하하거나, 상처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여 즉시 맹렬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를 부정하며, 상처는 결코 미화될 수 없으나, 인간 내면에 온존하는 이 긍정적이면서 도움을 주는 내적 에너지에 대해, 부정하거나 덮어두지 말것을 조용히 주장하고 있다. 불행이나 학대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촛점을 좀더 복원력에 맞추고, 인간의 성품과 성격을 치유하는 힘에 집중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였지만, 번역은 매끄럽지 못하다. 불어원저가 다소 난삽한 서술인것인지, 아니면 불어식 표현을 좀더 우리말 표현에 가깝게 풀어내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능한 우리식표현에 가깝게 단어를 표현하려고 한것은 좋은 시도였으나, 얼른 읽어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단어의 사용은 해독에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새로이 시도되는 심리학적 개념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설명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케이스를 이해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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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비언 사회주의 대우학술총서 신간 - 사회과학(번역) 580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고세훈 옮김 / 아카넷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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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페이비언"이란, 오늘말로 "점진주의자"란 뜻이다.  페이비언(Fabian)이란 이름은, 카르타고의 침략에 대항해서 지구전을 주창했던 고대 로마의 파비우스(Fabius)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당면한 사회적,경제적 모순에 대해서 급격한 혁명과 투쟁에 의해서보다는, 꾸준한 연구와 작업들을 통해 대중과 지도층을 설득해서 점차적으로 제도를 개선해나가는 것이 더 옳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자신의 이론을 완성시키고, 엥겔스가 이를 출판하였으나 정작 마르크스의 이론은 영국에서는 결국 환영받지 못했다. 극단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자본주의의 계급적 사회구조와 질서를 깨뜨릴수 있다는 발상이,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급격한 혁명보다는 점차적인 개량을 더 선호하는 영국인들로부터 거부되었기도 하지만, 사실 거기엔 사상적이고도 철학적인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수십년동안 미래 영국사회를 준비했던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 두뇌집단(Thinktank)인 페이비언 협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임의 주축을 이루었던 버나드 쇼는 유명한 극작가이자, 사회개혁가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은 당시 노동문제에 관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회개혁가들로, 이들에 의해 1895년에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가 세워지기도 했다. 당대에 그들은 지성이었을 뿐 아니라, 방법적으로도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갈등을 막는 행동방식을 채택함으로서, 비록 수십여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1.2차 세계대전을 거친 영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급격한 변혁이 초래하는 혼란이나 반개혁적 흐름을 차단하고, 한번 사회가 방향을 정하면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확실히 지식층과 일반대중을 설득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하에서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페이비언들의 명백한 거부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 ....협회 출범 당시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자로 추앙받던 월리엄 모리스가 "노동자들에게는 혁명외에 희망이 없다"고 말했을 때, 페이비언 협회의 명실상부한 지성으로 간주되던 쇼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자들에게는 진정 희망이 없다"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그는 촉구했다. 노동자들은 의회, 지방정부 그리고 선거권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이 책은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만큼이나, 개량에 의한 변혁을 확신한 페이비언들의 연구들을 모은 것으로, 1889년에 초판이 나왔고, 계속하여 발간되었으며 저자들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버나드 쇼가 살아있던 1948년 다섯번째 최종적인 개정판이 나왔다. 페비언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초석을 닦은 복지국가의 모델은 그후 전세계 여러나라로 퍼져 자본주의에 대한 중대한 수술을 단행함으로써 이제는 복지국가는 하나의 확립된 정치사상이 되어, 사실상 전후 영국사회뿐만이 아니라, 현대 복지국가의 모든 사상적인 지주역할을 담당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백년이 넘는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영국지성들이 고민하던 문제는 자본주의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이기에 이 책이 던지는 화두는 의미심장하다. 더우기, 제도와 법률이 본래의 "정신성"과 "철학적인 뿌리"를 망각하고 점점 기술적이거나 사변적인 사안으로 환원되는 이 시기에, 다시 그 본질을 돌이켜볼 생각이라면, 오래되었다고 낡은 책으로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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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
허구생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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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복지제도에 관한 역사적 배경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이다.

사실 현대 복지제도는 100년도 안된 비교적 “최근에 정립된 제도”이지만,
서구유럽에서 그 뿌리는 상당히 깊다. 각 나라마다 일종의 복지제도가 있었고, 삼한시대는 물론, 중국, 지중해연안, 그리스-로마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는, 문명과 사회형태를 갖춘 곳에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제도로, 법적인 테두리안에서 분명한 일관적인 체계를 가지고 정책의 하나로 도입한 곳은 유럽인데, 이 맥락에서 유럽의 중세사회는 복지의 빠질 수 없는 요람으로 봐야한다.

이 책은 역사를 전공하던 학자의 눈으로 복지정책발달에 대한 분석을 한 연구서인데, 중세유럽과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떨어져 있기에 막연하기만 하고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사회 복지의 발달에 관해 역사적인 맥락들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베버리지 보고서 이전에, 이미 중세와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나온 튜더왕가의 빈민법을 근대적 사회복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중세사회의 복지, 즉 교회와 사회공동체적 전통에서 나온 “자치적 복지”에서 비로소 법률을 통한 “제도적 복지”로 바뀌고, 국가가 빈곤과 복지에 대한 의도적인 개입을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사회복지의 원형을 제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복지의 기원과 발달과정에 관해 근대이후 영국이나 독일의 산업사회를 논한 책은 많지만, 중세를 조명한 책은 한국에 많지 않다. 그러나, 중세는 오늘날의 유럽을 있게해준 원형이었다. 근대 합리론자에 의해 "온정주의"로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중세공동체는 빈곤으로 인한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역할을 했으며, 이 책은 중세사회가 어떻게 복지에 대해 대처했는지, 그 기반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교회와 사회공동체가 담당하던 복지의 역할이 국가의 역할로 옮겨갔는지에 대해 잘 얘기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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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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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를 다녔던 저자가 비행기안에서 우연히 옛스승을 만나서 나눈 얘기가 인상적이다. 다른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학창시절 학교에서 "은혜"에 대해서는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노라는. 생각해보면 가장 은혜가 가장 많을 것 같은 장소에, 은혜가 없었노라는 말은 흔한 일인데도, 곱씹어 볼만한 사실이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율법적인 태도에 가깝다. 죄에 대한 적의는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사람에게 품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비추어본다면 참으로 어긋난 이야기다. 저자는 자신의 믿었던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고백할 때, 겪게된 혼란과 더불어 따뜻한 시선을 공유한다. 그들의 행위와 태도는 반대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고, 한걸음 한걸음 차분히 설득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인종차별에 대한 자신의 허물을 공개한다. 흑인들에 대한 멸시와 경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자신을 드러내면서, 신앙을 지녔다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한, 은혜없는 믿음을 지닐수 있는지를 잠잠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고발한다. 은혜없는 삶, 은혜없는 사회, 은혜없는 교회.

이 주제는 귀에 익었으면서도, 낯선 주제이다. 은혜란, 단지 달착지근한 설탕크림이 아니라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임도 드러낸다. 나치의 박해를 경험했던 폴란드인들이 전후 사과를 하는 독일인들에게 용서할 수 없노라고 돌아섰던 사건은 이를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녀를, 남편을, 아내를, 아버지를, 어머니를 죽게한 일본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노라고 치를 떠는 우리 아버지나 할머니 세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게 갈 것이다.

그래도 용서할 수 있는가? 은혜를 베풀수 있는가?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기교의 문제가 아닐것이다. 이처럼, 가슴을 울리는 글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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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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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정밀한 역사의식과 로마에 대한 애정, 그리고 치열한 탐구가 녹아든 글이다. 6년전인 대학 3년 즈음에 첫권을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 9권째다. 목표로 하는 분량의 반은 이미 넘어섰지만, 어쩐지 이번 권이 반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1권의 기세등등한 시작, 2권과 3권의 시원시원한 전개와 더불어 4권과 5권에서는 걸출한 인물이면서 공화정과 제정의 분수령을 자신의 인생속에서 우뚝 일으켰던 카이사르를 통해 로마사가 가지는 최대의 매력과 흥분을 폭발시켰다. 6권에서는 그 못지않은 긴장감과 흥분을 가지고 아우구스투스를 서술하는데 성공했고, 7권과 8권을 다루면서 제정으로 이행한 로마가 든든한 뿌리를 내리는데 성공했음을 알린다.

그러나, 아뿔사-이 기막힌 말대로-이제까지 작가에게 영감과 현장감있는 역사장면을 제공해주던 믿음가는 선배 역사가가 사라져 버렸다. 타키투스라는 역사서술의 명장이 이 시대의 글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로마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훗날의 작가가 독자적으로 역사서술을 전개시켜야 한다. 비단 타키투스만이 영감의 원천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뛰어난 역사자료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앞의 경우는 역사의 현장자체를 수월하게 넘나들 수 있었던 동시대인이 전해주는 사실자료와 그의 비평자료를 기반으로 더 생생하고 한편으로 이전의 비평을 총괄하거나 전혀 새로운 각도로 평가를 하는 고난도작업을 할 수 있게 하지만, 그 뒤의 경우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 어쩌면 역사자체에 접근한 자료가 통합되어있지 않는 이상, 사실과는 전혀 딴 판으로 서술할 위험도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9권은 다른 권에서 볼 수 있었던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도발적이고 과감한 평을 찾기가 어렵고, 있더라도 매우 조심스럽다. 특히 다키아 전쟁을 서술한 저술이 없어 업적을 새긴 원기둥을 중심으로 장소도 인물도 뚜렷하게 내놓지 못하고 다만 사건의 경과만을 중심으로 전개를 이끌고 나간 것은 글짓는 작가의 고충을 짐작하게 한다. 소설을 쓰는 거라면, 차라리 창작의 계기가 되기라도 하련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때문에 이 권에서는 작가의 독자적인 역사접근과 평가를 맛볼 수 있다. 먼저의 노작이 있었으면 물론 더 깊이있고 풍부한 전개가 되었을 터이지만, 그것이 없으니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결단으로 유물과 유적, 지도, 편지글형식의 보고서 등을 토대로 트라야누스, 하이드리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시대를 종합해나간다.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시대를 거치면서 확고한 제정의 발판을 다진 로마가 네르바를 거쳐 평화시대-로마의 평화시대-를 지나가는 과정을 선보인다.

여기서도 로마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보이고 있고, 다소는 과도하리만치 친로마적이다.그렇다해도 근대의 문학작품을 빌어서까지 로마인에게 다가서려한 것은 파격적인 역사에 대한 접근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대중에게 매력적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그러나 전작들이 후세에 지은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역사현장에 바짝 붙어서 쓴 글처럼 보였다면, 이번 편은 가까이 갈 길을 차단당한 채 먼 발치에서 서술하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참고로 할 역작이 없기때문일까? 글의 풍부하고 자신만만한 품이 다소 소침하게 보인다.

역시 반환점을 돌 때는 속도가 떨어지기 마련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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