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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 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
런즈추.임국웅 지음, 임국웅 옮김 / 들녘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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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 후진타오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오름으로써 13억 중국인민의 영도자가 된 후진타오는 과연 누구인가? 런즈추와 윈쓰웅 두 명의 저널리스트가 공저한 이 책은 후진타오의 출생에서부터 국가부주석에 오르기까지 후진타오의 정치여정을 추적한 책이다. 책은 무려 660페이지에 달하는 결코 단번에 읽기에는 만만치 않은 책이다. 그러나 향후 족히 10년은 거대중국을 이끌고 갈 후진타오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한번은 읽어 보아야할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대부분 정치인에 대한 평전처럼 후진타오에 대한 찬양일색의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저자인 런즈추와 윈쓰웅은 중국공산당에 대해서 사뭇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저널리스트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후진타오 개인의 정치적 부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난한 시골 찻집출신의 촌뜨기가 어떻게 중국최고권력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것을 가능케 한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지구상 현존하고 있는 가장 거대한 공산주의국가의 영도자는 과연 어떻게 세워지는가? 이 책은 후진타오 개인의 정치사뿐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권력구조와 그 승계과정의 내막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 따르면 후진타오가 최고권력자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다. 
1. 칭화대학을 나왔다는 점.
후진타오는 1959년 칭화대학 수리공정학부에 입학하였다. 칭화대학은 중국의 MIT로 불리는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이자 중국공산당 차관급이상 정치지도자 300명 이상을 배출한 정치명문이다. 후진타오는 이곳에서 공산당조직에 의해 일찌감치 양성요원으로 주목을 받게 되며 졸업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에 정식 가입하게 되고 졸업 후엔 저학년의 정치지도를 맡는 정치보도원이 되는 등 훗날 정치지도자로서의 싹을 틔우게 된다. 또한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류잉칭[劉永淸]을 이곳에서 만났고 훗날 칭화방이라 불리는 칭화대학 출신의 정계의 인물들과 직간접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후진타오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중국공산당지도부의 세대교체바람
후진타오의 정치여정을 보면 천운이 따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이 채택한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혁명화, 연소화, 지식화, 전문화"를 결의한 이른바 사화(四化)표준의 채택이다. 이것은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혁명2세대가 자신들의 개혁개방정책을 계승할 후계권력집단의 양성을 위해 주도한 공산당의 세대교체바람인데 이를 통해서 후진타오같은 전문적인 지식과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젊은 정치인들이 약진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3. 덩샤오핑과 쑹핑 등 혁명2세대의 낙점
후진타오는 1992년 14차 중국공산당대표대회에서 정치국 7인 상무위원에 당선됨으로써 장쩌민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사실상 지명되었다. 혁명2세대에 의해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이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당의 원로인 혁명2세대에게 후진타오는 당에서 배치하면 어디든 달려가서 충성을 다한 당성이 강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원로들은 후진타오가 변방 티베트와 빈곤한 벽촌 구이저우에서 묵묵히 일한 경험을 높이 샀다. 특히 티베트에서의 독립시위를 계엄선포로 강경하게 진압함으로써 당중앙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준 것은 그에 대한 원로들의 신뢰를 한층 더하여 주었고 무엇보다 덩샤오핑이 그를 4세대의 핵심인물로 주목하게끔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4. 신중한 성품과 친화력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후계자로 낙점된 후로 10년을 후진타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을 후계자로 발탁해준 혁명2세대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했고 현 집권자인 장쩌민 등 3세대의 눈밖에도 나서는 안되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가라앉힐 수도 있다"는 것을 후진타오는 잘 알았다. 이런 외줄 타기와 같은 상황 아래서 후진타오는 특유의 신중함과 겸손함으로 양쪽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신중함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과 관련한 어떤 일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피했으며 정치적 논쟁이 되는 정치현안에 대해서는 당 원로들의 뜻에 반하는 의사를 표명하는 일 따위는 일체 하지 않았다. 또한 아랫사람에게 군림한다는 인상을 결코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랫사람의 고충을 이해하고 배려함으로써 따뜻하고 자상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 앞에서 중국공산당의 당의 정체성을 수호하면서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개발을 이어갈 수 있는 적임자로 후진타오를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후진타오의 어깨 위에는 두 가지의 무거운 짐이 놓여있다. 하나는 덩샤오핑이래 계속되어온 경제개발과 성장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개발과 부의 불균형문제와 부패문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처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후진타오는 이전 장쩌민과는 다른 길을 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200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서 원자바오총리는 그동안 개혁개방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농민. 농업. 농촌을 진흥하기 위한 이른바 3농(農)정책을 제시했다. 이는 그동안 동부연안도시의 우선적이고 집중적인 개발과 불균형 성장을 주장해온 장쩌민 등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의 정책과는 분명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발과 분배의 균형성장을 초점으로 하겠다는 후진타오의 정책이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후진타오는 최근 <사회주의적 조화사회론>을 정치지도의 새이념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부(富)의 균형적 분배를 바탕으로 한 중국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후진타오의 또 하나의 과제는 밀려드는 사상적 자유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요구 앞에서 어떻게 중국공산당의 정치이념과 정체성을 지켜내느냐이다. 후진타오는 과연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처럼 정치제도의 개혁을 통한 사회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답은 글쎄? 후진타오는 정치적으로 안정보수주의자이다. 그는 당을 개혁하되 개혁이 당을 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오쩌뚱의 사상과 덩샤오핑의 중국식 사회주의건설의 이론을 사상적으로 수호해온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 생각에는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사람이다. 따라서 경제정책과는 달리 정치개혁에는 상당히 미온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중국공산당이 정치와 경제, 군사와 문화 모든 것을 지도하는 중국의 특색상 중국의 향후 행보를 이해하는 데 그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를 아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 책은 후진타오가 키를 잡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가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갈 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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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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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반이자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홍콩태생의 중국인 학자 빅터 챈이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의 저자가 달라이 라마, 빅터 챈 공저라고 되어 있지만 책의 전개는 달라이 라마와의 인터뷰내용을 중심으로 하면서 달라이 라마의 일상의 모습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빅터 챈의 소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북인도의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의 거처에서 이루어졌다. 대화는 빅터 챈이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를 강제점령하면서 수많은 티베트인을 학살한 중국인에 대해서 증오심을 가져본 적은 없는지 다소 단도직입적인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한번도 분노와 증오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며 마음의 평화를 깨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용서와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고 답하였다. 빅터 챈은 달라이 라마의 이 용서의 힘의 실체와 근원이 무엇인지를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깨달아 알기를 원했고 인터뷰를 진행해가며 달라이 라마의 용서에 대한 지혜에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인간들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안에 내재한 미움과 원망, 질투와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이야말로 인간을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인데,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용서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인데 그래서 용서는 수행을 필요로 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 대목에서 용서 자체가 종교적으로 가장 큰 수행임을 강조한다. 어떻게 수행하라는 것인가? 미움이나 분노,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마음속에서 제거하려면 그 반대되는 감정, 즉 사랑과 자비, 친절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키워나가는 훈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치 새벽녘에 동이 터오며 빛의 기운이 강해질수록 어둠의 기운이 물러가듯이. 달라이 라마는 그 자신 주고받기명상법이라고 부르는 명상을 통해 자신 안에 긍정적인 감정을 키워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행복이나 애정, 친절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부정적인 감정을 자신에게로 흡수하는 그런 상상을 통해 자신 안의 선한 감정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나의 내면세계의 선하고 긍정적인 감정들을 발달시킴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에 내면이 잠식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인간세계를 포함한 자연계의 기본법칙은 상호의존이라고 믿는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연결된 유기적 통합체이다. 그러므로 달라이 라마는 누군가를 독립적인 악의 실체로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후세인을 예로 들었다.
"사담 후세인의 독재는 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사담 후세인은 독재자이고 침략자이며, 나쁜 사람이지요"
"하지만 나쁜 일들은 그의 군대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의 군대가 없었다면, 무기가 없다면, 그는 그런 종류의 침략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무기들은 이라크인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온 것입니다. 서양의 무기회사들이 이 침략자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죠.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서방세계에서 볼 때 이라크의 후세인은 잔인한 독재자이지만 그런 후세인을 가능케 만든 것은 후세인에게 무기를 팔아먹은 미국 같은 서방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후세인을 악의 화신으로 여기며 그를 멸절시키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독립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상호의존적인 실체로 볼 때 악에 대한 복수심대신 악에 대해 책임감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책임감의 공유는 악에 대한 용서의 마음을 열어준다.
또한 모든 생명체의 세계를 상호의존의 세계로 이해할 때 누군가를 자신의 적으로 여기고 그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곧 적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설사 적으로 여기는 자에게라도 그의 행복을 위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와 자비를 그래서 한 차원 높은 자기사랑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달라이 라마에게 용서는 단지 개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한 종교적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미움과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인간 모두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요 상생의 길이다. 중국을 향한 티베트의 투쟁이 폭력투쟁으로 가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공존하고 상생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한 자유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달라이 라마의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분노와 미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삶에서 그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가. …진정한 승리자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미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끔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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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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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길가메쉬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이름 붙였다. 길가메쉬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문명의 도시국가 우르크의 왕이다. 그는 2/3는 신이고 1/3은 인간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서 신화와 역사 양쪽에 두루 속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폭정을 저지하기 위해 창조된 엔키두와 함께 신들의 산인 삼목산의 산지기 훔바바를 죽이는 등 용맹을 발휘하지만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의 유한(有限)에 절망하게 된다. 길가메쉬는 영생의 길을 찾기 위해 영생자인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머나먼 순례를 길을 떠난다. 우트나피쉬팀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죽음의 바다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의 여인숙을 지키고있는 지혜의 여신 씨두리에게 길가메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소. 내 친구(엔키두)의 죽음이 부른 난제가 나를 압박했소. 내가 죽음일 보지 않게 해주시오. 나는 그것이 정말로 무섭소"

이에 씨두리는 길가메쉬에게 답한다.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영생의 길을 찾는 무모함 대신 이생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씨두리가 말해주었지만 그것이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고자 하는 길가메쉬의 갈망을 단념하도록 하지는 못했다. 결국 씨두리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는 뱃사공 우르샤나비를 소개해주고 길가메쉬는 마침내 우르샤나비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게 된다.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신들이 인간에게 내린 대홍수재앙으로부터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남아 신처럼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길가메쉬에게 늙지 않고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불로초를 선물로 주어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도중에 뱀에게 불로초를 강탈당하게 되고 결국 길가메쉬는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죽음의 잔을 마시게 된다.

모든 인간이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이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길가메쉬서사시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위해 영생을 길을 찾아 헤매는 인간 영혼의 순례도(巡禮圖)이다. 특별히 성경의 창세기설화의 많은 부분들이 이 <길가메쉬서사시>의 히브리적 신화의 변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이 책을 읽는 중요한 즐거움이자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서 자체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서의 설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원형(原型)에 대한 이해는 변형(變形)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창조이야기, 성서의 에덴과 수메르의 에딘, 성서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양치기 두무지와 농부 엔킴두의 이야기, 성서의 바벨탑사건과 신들의 왕 엔키에 의한 인간언어의 혼란, 대홍수재앙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우트나피쉬팀, 그리고 그들이 지은 방주, 인간에게서 낙원의 삶을 앗아가는 뱀의 출현, 성서의 만나와 우트나피쉬팀의 주님이 하늘에서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게 하는 빵,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와 까마귀, 우트나피쉬팀이 날려보낸 비둘기와 제비와 까마귀, 길가메쉬가 우트나피쉬팀에게 얻었다가 뱀에게 빼앗긴 불로초와 성서의 생명나무 등…
<길가메쉬서사시>를 읽다보면 성서의 창세기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성서의 창세설화는 이 수메르신화에 그 신화적 원형을 두고 있다. 창세기의 원본을 보는 지적 재미와 흥분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신들에게는 불멸의 삶을 배정한 신들!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쉼없이 고생하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고생 끝에 네 자신이 완전히 지쳐버리면, 너는 네 몸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너의 긴 인생 항로를 조급히 끝내는 길로 접어든다! 인간! 그들의 자손들은 갈대처럼 부러진다. 잘생긴 젊은이나 귀여운 소녀들도 죽음은… 아무도 죽음을 알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비정한 죽음은 인간을 꺾어버린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 ……………신들이 삶과 죽음을 지정해두었지만, 그들은 죽음의 날을 결코 발설하지 않는다."

영생의 세계로 건너가는 죽음의 바닷가에 여인숙을 지키며 홀로 술을 빗으며 살고 있는 지혜의 여신 씨두리! 그녀가 만드는 포도주는 인간이 안고 있는 죽음의 공포와 생의 허무를 잊게 만드는 망각의 술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이 세상이라는 여인숙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기에 인간의 몫인 이 세상의 삶에 충실하고 감사하며 매일같이 기쁨으로 축제하듯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게 아닐까? 인간은 저마다 언제 이 세상의 소풍이 끝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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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가 21세기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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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저자가 하버드대학교 학부과정에서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제목으로 가르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매사에 보다 윤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윤리적 지침과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은 가능하고 적절한가?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절대불변의 고정된 윤리적 지침과 교훈을 구하는 것은 접근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서두에 밝히고 있다.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르게 접근해야 한다. 저자는 예수를 절대진리의 창시자 혹은 전달자로 보지 않고 1세기 유대라는 구체적 시공간 속에서 유대전통의 신앙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애썼던 유대교 랍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를 유대교 랍비로 볼 때 비로소 예수의 가르침의 본래적 성격과 의미가 밝히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랍비는 히브리전통에 충실한 유대교 지도자이다. 랍비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 가능한 보편 타당한 절대 진리나 규범을 창시하거나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의 문제들과 고민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인간 스스로가 매상황마다 최선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영적 교사이다. 랍비는 그 방법으로 이야기와 비유, 또는 질문을 통해서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도왔다. 저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많은 비유와 이야기는 바로 이런 랍비적 전통에 의거한 것임을 주목하고 있다.

왜 예수는 랍비의 교수방법을 택했을까? 그것은 고정화된 강령이나 지침보다는 이야기나 비유가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인간에게 상상력을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열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고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랍비들이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 구속되지 않고 그 문자너머에 있는 의미의 핵심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와 설화 비유 등을 주저없이 첨가하기도 하고 해석의 확대 및 다양한 변주를 서슴지 않았던 마드라쉬의 전통을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은 오늘 우리가 복음서의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본래의 의미를 밝히는 최선의 길이라는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예수가 랍비의 교수방법인 마드라쉬를 가르침의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가 절대적 규범이나 윤리를 말하고자 한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예수의 말씀을 절대불변의 규범으로 고정화시키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불경시하고 있는가? 이런 점에서 예수를 랍비로 본 저자의 주장은 예수의 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점을 지적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 책의 장점은 평소 신앙의 영역에만 머물러왔던 성서의 주제를 우리의 일상의 문제와 연관하여 사고해보도록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 점은 저자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궁극적으로 목적한 바일 것이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동정녀임신 사건을 통해 현대의 대리모 임신에 대해 윤리적 사고를 해보도록 유도하는 것, 또는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해야 했던 예수의 피난사건을 통해 20세기 정치적 박해와 전쟁 등으로 인한 난민의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성서의 예수 이야기를 그 때 그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오늘 여기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게 만들어준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여인을 먼저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우선권을 두셨다는 것이나 예수의 치유사건을 단순히 치유능력을 가진 개인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우주 안에(자연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죽음에 맞서는), 선한 에너지(질병이라는 악한 에너지에 맞서는)의 발현으로 본 저자의 통찰을 읽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학문하는 자의 정직한 자세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진정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진정한 학자이다. 학자는 무엇을 아는 사람이기에 앞서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독일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일성(一聲)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공부해서 알게 된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정 우리에게 재앙이 되는 것은 학자의 무지가 아니라 학자의 착각이다. 모르면서 알고 있다는 착각!
저자는 부활에 대해 자신이 모르므로 한동안 강의에서 부활에 대한 언급은 일체 회피해왔다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부활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은 어쩌면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불확실성의 요소를 안은 채 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부활이 불멸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교가 창안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욕구와 희망이 담긴 신앙적인 상징 혹은 이야기(혹은 사실)이라고 보았다. 저자는 위르겐 몰트만의 "부활은 영생에 대한 염원이 아니라 공의에 대한 목마름이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부활을 예수의 개인적인 회생이야기로만 보지말고 불의한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를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이야기로 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악에 대한, 불의와 폭력에 대한 선과 공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해주는 희망의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야기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강시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적 희망의 메시지로 읽을 때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교회는 부활절을 맞게 된다. 불의한 폭력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야 했던 예수를 다시 살리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의 세력이 짓눌렀지만 스프링처럼 다시 일어난 예수! 나는 그래서 봄이 좋다. 봄은 스프링이니까! SPRING ! 생명은 다시 솟아오른다. 새싹도 솟아오르고 강아지도 기지개를 편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도 봄이 되면 기지개를 켜고 새롭게 솟아오른다. 4.19도, 5,18도 아니 동학혁명도 생명의 힘으로 죽음의 세력을 밀어붙이며 스프링하지 않았던가? 겨울동장군의 시퍼런 칼날로도 꽃피는 봄 대지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새싹을 막을 수는 없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꽃피는 봄은 반드시 온다!!

부활절을 앞두고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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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神話다 - 기독교 탄생의 역사를 새로 쓰는 충격보고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도올 김용옥의 최근 처서 <도올과 달라이라마의 만남>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 책 3권에서 도올은 티벳망명정부의 정치적 수반이자 환생한 부처라고 숭상되는 달라이라마와의 대화를 다루고 있는데 도올은 대화의 초반부에 이 책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언급하며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를 달라이라마에게 전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믿어온 기존의 정통적인(!) 믿음을 근본에서부터 흔들 위험(!)이 있는 이 책은 그러나 정통적인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1. 그리스도교는 신성하고 유일무이하며, 이교신앙은 무조건 원시적이고 악마적이라는 믿음 자체가 반역사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신인(神人)의 이야기는 오직 그리스도교가 지적재산권을 가지는 독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있던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초역사적으로 돌연변이처럼 생겨난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인의 신에 대한 추구와 그에 대한 참 앎의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영적인 이해의 한 변용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즉, 예수는 신화적 존재이나 그를 꾸며낸 그리스도교 자체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2. 영지주의는 초대기독교의 이단이다라는 기존의 상식이 사실은 허구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단은 정통을 전제로 한다. 이단이란 무엇에 대한(!) 이단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이단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최소한 영지주의 이전에 어떤 기독교적 가르침이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영지주의가 우리가 정통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영지주의가 이단이 아니라 뒤에 출몰한 기독교적 가르침이 영지주의의 이단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은 기존의 우리의 신앙상식과는 달리 영지주의가 초기기독교의 이단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정통으로 인정받는 문자주의적 기독교의 가르침보다 앞선 그야말로 원시 그리스도교의 원형임을 밝히고 있다. 영지주의 현자 도시테우스는 최소한 주전 100년경 이전의 사람이다. 예수보다 100년이나 앞서 산 사람이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말이 성립되지를 않는다.

또한 이 책에서 영지주의자로 새롭게 자리 매김을 하는 바울의 진정서신마저도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쓴 네 복음서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섰다는 단순한 이 사실은 시기적으로 정통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영지주의가 출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으로 문자적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역사화를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즉 사실은 문자적 그리스도교가 영지주의의 타락한 분파였다는 걸 알 수 있다.

3. 로마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문자적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인정되어 권력을 잡은 후 자행된 영지주의와 이교도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말살은 찬란한 문명을 일구었던 이교도의 과학적 탐구의 산물과 영적인 가르침의 지혜서들도 사악한 악마의 것으로 불살랐다. 인간을 참된 지혜로 안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강요한 문자주의적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무지몽매했으며, 그 무지가 인류사에 얼마나 참혹하고 어리석은 죄악을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

믿음이란 맹목이 아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그것 자체가 미신이다. 믿음이란 참 앎을 통하여 얻어지는 그 무엇일 뿐이다. 앎이 없는 믿음은 허구일 뿐이고 그것은 참으로 공허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믿음에서 맹목의 꺼풀을 벗겨내고 참 편견 없는 눈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책이다. 신앙인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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