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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길가메쉬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이름 붙였다. 길가메쉬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문명의 도시국가 우르크의 왕이다. 그는 2/3는 신이고 1/3은 인간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서 신화와 역사 양쪽에 두루 속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폭정을 저지하기 위해 창조된 엔키두와 함께 신들의 산인 삼목산의 산지기 훔바바를 죽이는 등 용맹을 발휘하지만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의 유한(有限)에 절망하게 된다. 길가메쉬는 영생의 길을 찾기 위해 영생자인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머나먼 순례를 길을 떠난다. 우트나피쉬팀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죽음의 바다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의 여인숙을 지키고있는 지혜의 여신 씨두리에게 길가메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소. 내 친구(엔키두)의 죽음이 부른 난제가 나를 압박했소. 내가 죽음일 보지 않게 해주시오. 나는 그것이 정말로 무섭소"
이에 씨두리는 길가메쉬에게 답한다.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영생의 길을 찾는 무모함 대신 이생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씨두리가 말해주었지만 그것이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고자 하는 길가메쉬의 갈망을 단념하도록 하지는 못했다. 결국 씨두리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는 뱃사공 우르샤나비를 소개해주고 길가메쉬는 마침내 우르샤나비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게 된다.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신들이 인간에게 내린 대홍수재앙으로부터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남아 신처럼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길가메쉬에게 늙지 않고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불로초를 선물로 주어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도중에 뱀에게 불로초를 강탈당하게 되고 결국 길가메쉬는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죽음의 잔을 마시게 된다.
모든 인간이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이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길가메쉬서사시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위해 영생을 길을 찾아 헤매는 인간 영혼의 순례도(巡禮圖)이다. 특별히 성경의 창세기설화의 많은 부분들이 이 <길가메쉬서사시>의 히브리적 신화의 변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이 책을 읽는 중요한 즐거움이자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서 자체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서의 설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원형(原型)에 대한 이해는 변형(變形)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창조이야기, 성서의 에덴과 수메르의 에딘, 성서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양치기 두무지와 농부 엔킴두의 이야기, 성서의 바벨탑사건과 신들의 왕 엔키에 의한 인간언어의 혼란, 대홍수재앙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우트나피쉬팀, 그리고 그들이 지은 방주, 인간에게서 낙원의 삶을 앗아가는 뱀의 출현, 성서의 만나와 우트나피쉬팀의 주님이 하늘에서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게 하는 빵,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와 까마귀, 우트나피쉬팀이 날려보낸 비둘기와 제비와 까마귀, 길가메쉬가 우트나피쉬팀에게 얻었다가 뱀에게 빼앗긴 불로초와 성서의 생명나무 등…
<길가메쉬서사시>를 읽다보면 성서의 창세기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성서의 창세설화는 이 수메르신화에 그 신화적 원형을 두고 있다. 창세기의 원본을 보는 지적 재미와 흥분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신들에게는 불멸의 삶을 배정한 신들!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쉼없이 고생하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고생 끝에 네 자신이 완전히 지쳐버리면, 너는 네 몸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너의 긴 인생 항로를 조급히 끝내는 길로 접어든다! 인간! 그들의 자손들은 갈대처럼 부러진다. 잘생긴 젊은이나 귀여운 소녀들도 죽음은… 아무도 죽음을 알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비정한 죽음은 인간을 꺾어버린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 ……………신들이 삶과 죽음을 지정해두었지만, 그들은 죽음의 날을 결코 발설하지 않는다."
영생의 세계로 건너가는 죽음의 바닷가에 여인숙을 지키며 홀로 술을 빗으며 살고 있는 지혜의 여신 씨두리! 그녀가 만드는 포도주는 인간이 안고 있는 죽음의 공포와 생의 허무를 잊게 만드는 망각의 술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이 세상이라는 여인숙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기에 인간의 몫인 이 세상의 삶에 충실하고 감사하며 매일같이 기쁨으로 축제하듯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게 아닐까? 인간은 저마다 언제 이 세상의 소풍이 끝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