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종교의 미래 -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하비 콕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 예수의 신앙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 책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하비 콕스가 2009년 하버드대학 신학교수직을 정년은퇴하면서 내놓은 <The Future of Faith>가 한신대학교 신약학교수를 정년은퇴한 김창락 박사에 의해 번역되어 <종교의 미래>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하비콕스는 이 책에서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신앙(faith)의 시대, 믿음(belief)의 시대, 성령(Spirit)의 시대로 삼분하였습니다. 예수 사후 AD 300년에 이르기까지를 ‘신앙의 시대’로 분류한 하비 콕스는 이 때의 기독교는 예수의 길(Way)을 가고자 했던 순수한 신앙인들이 제국의 위협아래서도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꿈꾸며 자유로운 정신과 협동심, 생명력으로 충만한 역동성을 가졌던 기독교였음에도 4세기에 이르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스스로 권력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길(Way)과는 전혀 무관한 변질된 기독교의 길을 걸어왔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비콕스가 ‘믿음(belief)의 시대’라고 이름을 붙인 이 시대의 특징은 통일된 하나의 교회라는 이름아래 교회가 철저하게 제도화되었으며 이를 위해 성직자계급이 출현하였고, 또한 하나의 교회를 위한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신조(信條)라는 교의가 확립되었고, 그 하나의 교의를 잣대로 무수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잔인하게 처단하였습니다. ‘신앙의 시대’에 가졌던 기독교의 역동성과 생명력은 사라지고 대신 교회 자체가 거대한 권력기구가 되어 권력을 놓고 치열한 교권투쟁을 일삼는 한편 다양성, 자유, 평등에 기초한 교회의 모습 대신 제국의 군대와 같은 엄격한 계급적 질서가 교회의 생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4세기 로마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고 1500년의 세월을 절룩거리며 걸어 왔습니다.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둔갑하면서 부러진 다리는 다름 아닌 ‘예수의 신앙’입니다. 예수는 무엇을 신앙했는가? 예수는 무엇을 희망했는가? 예수가 가고자 했던 길은 어떤 길이었나?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예수의 신앙’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하비콕스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설교가 예수에 대한 신앙의 필요성에 너무 매달려온 결과로 예수의 신앙이 무시되어 왔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선포하고 그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제국종교가 된 이래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선 입을 닫고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를 누구로 믿을 것인가를 놓고 형이상학적인 입씨름에나 매달렸습니다. 삼위일체논쟁이나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한 논쟁 등이 예수의 신앙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논쟁이란 점이 바로 그 점을 말해줍니다.

‘예수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내뱉은 일성(一聲)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신앙의 핵심이고 선포한 메시지의 정수(精髓)입니다. 로마제국의 통치이념과 질서,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그 나라를 이 땅위에 세워나가는데 대한 헌신을 요구한 예수의 삶과 목소리는 지난 1500년의 세월동안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의 중얼거림 속에서 잊혀졌습니다. 하비콕스는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 없이 하나님을 가지려고 하는 동안에, 세속주의자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 정의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예수를 가슴에 모시는 것은 불가피하게 결국 하나의 개인주의적 경건으로 흘러가 버린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 없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예수에 대한 신앙만 가지고 스스로 자족하고 있을 때 수많은 세속주의자들이 지상에 낙원(하나님 나라)건설을 약속하면서 숱한 혁명과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지만 결국엔 낙원대신 재앙만 남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속주의자들이 건설하고자 한 낙원은 하나님 없는 낙원이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신앙’에 눈을 떠야 합니다. 기독교는 지난 1500년 동안 ‘예수에 대한 신앙’에 눈멀어 왔습니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다 보면 눈이 멀듯이 ‘믿음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4세기~20세기 말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만 바라보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정작 예수가 바라보았던 하나님 나라는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라는 예수의 당부대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질서가 오면 낡은 제국의 질서는 사라져야 하는데 지배자의 종교가 된 이래 기독교 스스로가 권력과 특권이 가득히 쌓여있는 자기만의 아늑한 방안에서 깊은 잠을 자왔습니다. 하비콕스는 21세기를 맞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예수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영적회복이 일어나고 있음을 반기면서 새로운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탈권위주의, 다양성, 자유와 평등, 평화에 대한 갈구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예수가 살았던 그 시대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갈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과 제국
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이종욱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신약성서학 및 성서고고학, 인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최근작 <하나님과 제국 God and Empire>는 정의를 구현하는 방편으로서의 폭력의 유용성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크로산에 따르면 성서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폭력적인 하나님의 모습과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비폭력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노아시대 홍수심판은 세상의 죄악을 일소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심하시고 홍수로서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종말의 때에 일어날 큰 재앙과 환란, 그리고 아마겟돈전쟁의 환상 또한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여는데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반면 노아홍수심판 이후 하나님은 돌연이 다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심판하지는 않겠노라며 무지개를 증표로 노아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며 땅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은 믿음을 통해서 악한 인간을 선하게, 불의한 인간을 의롭게 변화시켜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폭력적인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구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크로산은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심을 가장 정확하게 읽고 그 방법으로 불의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폭력이 지배하던 당시에 예수님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회개운동을 계승했지만 곧바로 세례요한과 결별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한 하나님은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폭력적인 하나님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고 선포했으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가차 없는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하나님상(像)이며 로마치하에서 유대종말론자들이 가졌던 하나님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이 하나님상과 결별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노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시는 따뜻한 사랑의 아버지를 역설하셨습니다. 때문에 폭력적인 하나님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겁주지 않았고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방법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시는 순간 대제사장의 종을 칼로 치며 저항하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26:52~53> 또한 체포된 후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빌라도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요18:36> 로마군병에게 체포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폭력적 하나님상과 하나님의 폭력적인 역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뿌리로 하여 출범했으나 유대교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세계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라도 어린아이 시절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과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는 같아도 자녀가 성장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인식의 성숙과 확장이 아버지를 달리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폭력적인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는 유아적인 이해에 머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과 긍휼, 용서와 자비의 아버지로 이해한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가 그보다 훨씬 성숙한 것입니다.


최근 천안함사태의 정확한 원인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북한의 도발로 기정사실화하고 북한의 도발에 군사적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주장들이 보수언론과 일부정치세력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이에 동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의에 폭력적 방법으로 저항하지 않으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교회는 지금 차분하게 잘 살펴야 합니다. 교회마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전쟁불사를 외치는 전쟁의 나팔수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더구나 정확한 책임의 소재조차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불신과 증오심을 부추기고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려고 드는 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교회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교회는 전쟁의 나팔수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평화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와 유다의 밀약 -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지음 / National Geographic(YBM시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오늘날 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종파들간의 교리, 신학, 교권투쟁에서 승리한 자의 교리와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관련 문서중에 투쟁의 승리자의 손에 의해 정경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패배자의 것은 역사속에서 의도적으로 소멸되거나 세월 속에서 잊혀져가야 했다. 대략 1600년만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유다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패배자가 바라본 예수에 대한 기록이다. 승자의 기록인 성서에 가롯 유다는 예수의 배반자로, 사단의 하수인으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주받아 마땅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역사의 패자들의 기록인 유다복음에서 유다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는 제자중 예수 앞에 유일하게 설 수 있는 완벽한 인간성의 소유자요, 예수의 정체를 꿰뚫어 알고 있는 유일한 제자며, 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제자며, 예수를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 구원에 이르도록 도운 예수의 진정한 조력자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유다의  참모습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예수가 누구냐? 구원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종파의 서로 다른 이해와 고백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정통기독교의 기독론, 구원론과 유다복음같은 영지주의문서의 기독론, 구원론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부활, 죄사함과 밈음을 통한 구원 이러한 것들이 정통적 기독교의 교리라고 한다면 유다복음은 이것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지워질 것을 강요당했던 또다른 시선, 예수에 대한, 또 구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만약 구원이 속죄함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참신의 세계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며 혼이 육신을 벗고 부정한 이 세상을 떠나 신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예수의 죽음은 타인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죽음 이전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죽음이 되며 따라서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도움으로 예수의 구원을 이룬 진정한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무엇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오늘 우리의 몫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의 승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닌 승자에 의해 강제로 파묻혀 버렸던 또 다른 한쪽의 이야기, 또 다른 사람들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열어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육신의 새로운 이해 - 다원주의시대의 기독론
존힉 지음, 변선환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전통적 기독론인 양성론에 대한 비판적성찰과 그 대안을 모색한 책이다. 전통적기독론이란 칼케톤회의에서 채택된 양성론, 즉 예수는 참하나님임과 동시에 참인간이라는 고백을 말한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춘 인격이라는 고백이다.

저자는 양성론이 우선 예수 자신의 자의식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지적한다. 예수는 자신을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예비하는 마지막 예언자쯤으로 스스로를 인식했을 뿐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유연한 은유적 표현이었을 따름인데 이것이 후대에 문자적인 의미의 성육신된 하나님의 아들로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다.

저자는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격체에 성육신하였다는 이 전통적인 기독론은 결과적으로 많은 역사적 과오를 초래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우선 예수는 유대인이요, 남자이므로 하나님은 유대인으로, 남자로 성육신한 셈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육신론을 따르면 자연히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죽인 셈이 되며 이것은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반유대주의의 신앙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하나님이 남자로 성육신하였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언제나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남녀간의 가부장적 질서와 성차별적 억압을 신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빌미가 되어 왔다. 또한 전통적 성육신론은 이교도세계에 대한 복음의 전파와 구원을 빌미로 제3세계에 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침탈의 종교이데올로기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자연히 타문화, 타종교와 적대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고 역사적으로 공존보다는 침략과 정복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


저자는 전통적기독론이 가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논구한 다음 그 대안으로서 은유로서의 성육신론을 제안한다. 은유적이란 말은 다원적이란 말과 상통한다. 은유란 여러가지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그 해석의 문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왜 1세기 유대땅의 예수라는 사람에게만 단 일회적으로 유일하게 성육신하셔야만 하는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참되게 알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라면 어째서 하나님은 단 한번 유일무이하게 예수라는 인격을 통해서만 성육하시는가? 어떻게 다른 시대, 다른 문화, 다른 인격을 통해서는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성육하거나 계시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원의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예수의 성육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삶을 살면서 신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그의 삶을 통해서 신의 사랑을 온전히 펼쳐보인 성화된 인간으로 이해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성육신에 대한 이러한 은유적 이해가 다원화된 세계에서 보다 더 구원과 해방의 종교로서 기독교가 긍정적인 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기독론을 불변의 진리로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신성을 모독 내지는 폄하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서 자체의 증언을 뜯어보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원주의라는 말 자체를 불경시하는 신앙풍토에서 이러한 책이 일반대중에게 폭넓게 읽혀지고 받아들여지기는 어렵겠지만 양식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 그리고 신학생들은 꼭 한 번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왜 다원주의가 문제인가? 삼위일체! 이것부터가 다원주의적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 왜곡의 역사 -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
바트 D. 에르만 지음, 민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일반독자에게는 다소 낯선 성서비평학, 사본학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관심있는 일반독자들도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책의 내용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장점을 높이 사고 싶다. 다루는 내용은 대단히 학술적인 전문적 내용이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난해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책의 내용에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씌어진 절대무오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성경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사실은 얼마나 허구에 가득찬 것인가를 보여준다. 예수 사후 두 세기동안 예수에 대한 수많은 문서들이 기록되었고 문서들만큼이나 다양한 신앙공동체들이 존재했었다. 이들 신앙공동체간의 고백과 신학의 차이는 수많은 교리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교권투쟁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결국 교리논쟁과 교권투쟁에서 승리한 신앙공동체의 고백과 신학이 정통이 되었고 패배한 신앙공동체의 고백과 신학은 이단이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 과정에서 성서를 필사하던 필사자들은 때론 단순한 실수로, 때론 분명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성서의 본문을 첨삭하거나 왜곡하였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에 부합하도록 본문을 왜곡하기도 하였고 교리를 뒷받침할 목적으로 기존에 없던 본문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이단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어 보이는 본문은 과감하게 삭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16세기 목판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책의 출간과 유통은 전적으로 책을 읽을 줄 알고 베껴쓸 줄 아는 소수의 필사자들의 손에 달려있었기에 이런 왜곡과 조작의 역사는 얼마든지 가능해던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정통으로 인정하는 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절대불변의 진리로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던 시기에 벌어졌던 치열한 교리와 신학논쟁, 그리고 교권투쟁에서 승리한 자의 전유물이며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므로 성서본문을 절대무오한 신성물가침의 말씀으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가급적 후대에 의해 왜곡첨삭되지 않은 성서 본래의 본문을 찾아 그 참뜻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며 여기에 성서비평학과 사본학이라는 학문의 유용함이 있는 것이다. 축자영감, 절대무오라는 신화의 안경을 벗고 성서를 볼 때 오히려 교리와 신학으로 가리워진 성서의 진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가르침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est7key 2022-06-2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 최고의 본문비평 학자는 긴 버선이니 좀 더 알아보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성경의 양면적인 그 시작은 세상의 300종이 넘는 성경들 중에서 실제로 모든 성경들은 단 두 종류로 나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안디옥(다수사본, 시리아) 사본 계열입니다.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소수사본) 계열입니다. 첫 번째 안디옥 사본 계열은 역사적으로 그 사본들을 보존했던 크리스챤들이 최대 1억 5천 만명이 순교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서 승자들의 역사에서 지워지는 듯 했으나 알비젠스 왈덴시스 몬타니스트 재침례교인 등 역사의 조명은 남아서 그들을 비춰줍니다. 성경은 두 종류입니다. 변개 된 성경과 온전한 성경. 왜 그 많은 사람들이 2000여 년간 지금 이 순간에도 온전한 성경을 위해서 목숨들을 내놓을까요? 어떤 사본이 온전한 것인지 알기위해서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한 상태로 읽혀지고 양심으로 분별하게 된다면 아마 새로 태어남을 실제 경험을 하실겁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