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힝거의 핵심개념은 ‘허구 fiktion’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철학은 ‘허구주의 fiktionalismus’라고도 불린다.

허구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고안, 꾸며냄, (순진한) 가정’ 등을 뜻한다 (영어에서는 순수문학은 fiction이라 부른다)

*학문 영역에서 허구란, *그 자체로는 *비개연적이거나 심지어 *불가능하다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보조 개념으로 사용되어 *충분한 역할을 해내는 가정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fiktion은 우리말에서 ‘의제 擬制’라 번역한다 - 옮긴이) - P867

그러나 의제는 ‘가설 hypotheses’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가설도 그 궁극적 진리가치를 반드시 확신해야 할 필요는 없는 직업상의 가정이다. 그렇지만 가설의 경우, 우리는 이를 검증과 경험재로에 의해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발겨혀지기를 기대한다.

*의제의 경우에 우리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제가 거짓이거나 최소한 모순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하며 또 효과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듯, 이미 칸트는 저작의 중요부분에서 ‘마치 ~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그는 영혼, 세계, 신이라는 이성의 ‘규제적 이념’을 설명할 때 이 표현 형식을 동원했다. - P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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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윌리엄 제임스)

이 책에서 윌리엄 제임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 삶의 다양한 현상들이란 삶과 유리된 관념이나 논리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현상을 파악할 때 우리는 다른 현상들과의 *상호관련성이나 *맥락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그 현상의 *실재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226

제임스에게 *종교의 근원적인 의미는 지성적이고 객관적인 표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표현들을 존재하게끔 해준 종교적이고 *내적인 경험들,

이를테면 양심의 갈등, 죄의식, 구원받았다는 확신, 소망, 기쁨, 감사, 겸손, 자비, 공허감 등등 인간 *개개인이 표현하는 *감정들과 *행위들 *속에 놓여 있다. - P226

/ 인간 삶의 근원적인 요소로서 존재하는 종교현상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19세기 과학주의자들이 흔히 예상했듯이 종교현상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악화되거나 없어질 미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해왔듯이 지구가 없어질 그날까지 계속 존재할 것임을 종교사의 구체적 이해를 통해서 깨닫는다.

종교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인간 삶의 *근원적 요소로서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도대체 *무엇이 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가? 그리고 *그토록 종교를 살아 있도록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 목적은 무엇인가?

전자의 질문은 종교의 의미나 원천에서 이미 대답을 하였다. 그 대답은 바로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객관적으로 보인 *종교현상을 *역동적으로 살아가게끔 해주었다는 해석이다.

만일 그 현상을 통해서 또는 위해서 인간 자신이 어떤 *본질적 삶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 P230

제임스는 *인격의 *내면 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의식적이지만 현실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이지만 매우 이상적 자아이다.

일반적으로 그 두 개의 자아는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투쟁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현실적 자아가 이상적 자아를 억누르면 평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실질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상적 자아를 누르고 있어서 *심연의 깊은 *고통을 갖고 있다.

그 반대로 이상적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억누르게 되면 황홀감을 줄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 도피적 삶을 살아간다. - P230

제임스는 그 분열되어서 *상호투쟁 관계에 있는 *자아를 *통합하여 조화로운 상태, 즉 *평형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종교적 경험의 목적으로 보았다.

특히 현실적 자아의 억누름 때문에 갇힌 다양한 무의식적 충동들을 의식적으로 소화시켜서 보다 내면적 평온을 되찾게 하는 것이 그 경험의 목적이다.

특히 현실적 자아의 억누름 때문에 갇힌 다양한 무의식적 충동들을 의시적으로 소화시켜서 보다 내면적 평온을 되찾게 하는 것이 그 경험의 목적이다.

계속해서 종교가 회심자에게 분열되었떤 자아를 통합하도록 하나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다한다면 그 회심자의 삶은 계속해서 헌신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기능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그 회심자는 다시 회심 이전 의 상태인 분열된 자아의 고통을 더욱 깊게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불행이란 *내면적 자아의 *분열 그 자체도 *인식하지 목하는 삶의 태도이다.

오히려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는 보다 넓은 의미의 *자아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므로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니다.

즉 *억눌린 *무의식적 본능들을 *의식적으로 순화시키려는 삶의 태도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이러한 *통합의 경험은 *회심이라든가 *신비주의의 경험 속에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회심의 경우에는 내면적 투쟁을 삭감하여 그 분열된 자아를 연결시켜주는데 이른바 외면적 종교가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되는 *통합적 인격을 만들어주는 *매개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종교적 상징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여 *원형적 자기를 경험하게 해주듯이, 회심자에게는 자신이 고백적으로 받아들인 종교를 *내면화시켜서 자신의 *분열된 인격을 *연결시켜 *전인적 삶을 살아간다. - P231

그런 회심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은 회심을 하기 전에는 종교의 다양한 요소들이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어서 의식의 *주변부에 놓여 있지만

*회심 후에는 정반대로 모든 삶의 *중심이 받아들인 *종교의 의미에 모아져 있다. 더 나아가서 전인격을 모아서 그 의미를 구체적 삶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종교적 경험 이전에는 삶의 모든 에너지를 세상적 일에 쏟아부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에는 종교적 삶에 쏟아 붓는다

*계속해서 종교가 회심자에게 *분열되었던 자아를 *통합하도록 *하나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다한다면 그 회심자의 삶은 *계속해서 *헌신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기능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그 회심자는 다시 *회심 이전의 상태인 *분열된 자아의 고통을 *더욱 깊게 받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비주의 경험의 경우에는 어떤 *매개물을 통해서 *분열된 자아를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자아를 *통합시킨다.

이 경우 *의식적 자아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이상적 자아가 주도가 되어서 일어나는 통합과정이다. 이러한 통합의 경험은 *종교전통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다양한 형태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제임스는 그 통합의 경험은 두 가지 형태를 띠면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하나는 *점진적 통합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통합과정이다.

전자는 *의식적이고 자발적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면, 후자는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붙잡혀서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제임스는 스타벅의 연구를 참고하고 있다. 스타벅은 전자의 통합을 ‘*의지적 유형’ volitional type으로 후자를 ‘자기포기의 유형’ the type of self-surrender으로 명명하였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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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원자

같은 탄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연필심과 다르게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무수히 많은 원자들이 특별한 **결합과 **배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무수히 많은 *원자들의 성질과 그 *결합 규칙에서 오는 **자기 조직화의 원리, 그리고 그에 따른 *패턴을 연구하는 것은 응집 물질 물리학과 성공적으로 함께 발전한 *통계 물리학의 고유 영역이다. - P150

사회 문제도 결국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회적 원자’인 개인과, 그 상호 작용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물론 물리적 원자와 사회적 원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리적 원자는 언제나 같지만,
*사회적 원자인 사람은 변하고 적응하며 사회 조직에 반응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 개인의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사회 현상에 대한 물리학적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원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패턴을 따른다! - P150

/ 사람도 원자처럼 패턴을 따른다

최근 심리학의 결과들은 인간을 *합리적인 계산 기계보다는 *유연한 사고 본능을 가진 존재로 본다.

대니얼 카너먼의 **두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시시때때로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의 생각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겪으면서 *형성된 뇌의 구조와 기능 속에 그 단서가 있다. - P151

인류는 *역사의 *99퍼센트를 *소규모 집단으로 방랑하면서 *수렵과 채집에 적당하도록 적응하면 살아 왔다.

현재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 *조상들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던 *본능은 *이성적인 계산과는 거리가 멀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싫어한다. - P151

이렇게 변덕스럽고 복잡해 보이는 사회적 원자의 특징을 무조건 모두 반영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전체의 패턴에 기여하는 *핵심적인 요소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버리는 *단순화가 바로 사회 물리학의 강점이다.

물리학의 강점은 언제나 어림짐작에 있다.

(물리학에서의 중요한 결론들은) 잡다한 세부 사항에 의존하지 않는다. 핵심은 과도하게 단순화된 모형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중요한 몇몇 세부 사항을 제대로 짚은 모형은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내 안의 유인원

유독 진화 생물학에서는 인간 본성을 *폭력성과 이기성만으로 규정하는 이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의를 제기할 적마다 자연 선택에는 도덕이 없다고 강변했다. 바라는 바를 바탕 삼아 자연을 보지 말라는 뜻이다. - P89

왜 진화 생물학자들은 인간 본성의 폭력성과 이기성에 방점을 찍어 왔을까. 저자 프란스 드 발은 "가장 문명화된 사회라 여겼던 유럽의 심장부에서 자행된 만행"에 대한 과학적 변명이라 본다.

"문명의 얇은 단판을 뚫고 나와 인간의 고결한 성품을 밀어낸 것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숨어 있던 동물의 본성과 비슷한 무엇가가 틀림없다"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 P90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펴내며 "진화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에 이기심은 우리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원동력"이라 말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렛 대처가 사회 해체를 선언하며 극단적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던 때와 일치한다. - P90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성을 뒷받침한 유인원인 *침팬치다.

이들은 *폭력적이고 *권력에 굶주려 있으며, 지극히 *수컷 중심이다. 침팬지가 원숭이를 사냥해 두개골을 박살 내 산 채로 잡아먹었다는 보고도 있다.

또 자신의 세력권 너머까지 방심한 적을 뒤따라 포위한 뒤 잔인하게 때려죽이는 모습도 관찰되었다. 이때 폭력은 동족을 대상으로 행해진 것이다. 이른바 도살자 유인원의 면모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인의 후예’인 셈이다. - P91

/ 침팬지와 보보보 사이에서 인간 본성 탐구의 균형을

저자는 침팬지 집단에서 나타나는 폭력성과 이기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가 함께 주목해야 할 유인원으로 내세운 것은 *보노보였다.

이 유인원은 침팬지와 전혀 달랐다. 보노보끼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이나 사냥이 없었다. 또 수컷의 지배도 없었다. 오히려 *암컷의 지배, *협력적인 성격, *사회 조화를 목적으로 한 섹스가 특징이다.

*침팬지가 종횡무진 서부를 누린 *무법자 형이라면, *보노보는 낭만과 쾌락을 즐기는 *히피 형이라 할 만하다. - P91

(…) 하지만 진화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폭력과 이기성만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협력과 유대, 그리고 *이타성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 P92

*요점은 *인간이 *침팬지와 *보보보의 집단 간 행동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의 관계가 *나쁜 경우는 침팬지 집단 사이보다 *훨씬 나쁘지만,

*관계가 좋을 경우에는 *보노보 집단들 사이보다 *훨씬 좋다.

우리의 전쟁은 침팬지의 *동물적인 폭력을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웃간의 좋은 관계에서 주고받는 이익은 보노보 집단 사이에서 보다 훨씬 크다.

인간 집단은 단순히 섞여 어울리면서 섹스를 나누는 것 이상으로 큰 일들을 할 수 있다. - P92

뇌과학의 발전은 인간 본성을 규명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도덕적 딜레마를 던져 주고 실험자를 뇌 판독 장치에 집어넣었다.

실험 결과, *도덕적 결정이 확장된 *새겉질 표면에서 일어나지 않고 *과거의 *감정 중추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도덕적 결정이 *수백만 년 전에 일어난 *사회적 진화의 *결과라는 뜻이다.

저자는 이 사실이 다윈의 진화론과도 맞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게임 이론도 이기성과 이타성을 규명하는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죄수의 딜레마이든 최후통첩이든, 인간에게는 이기성도 이타성도 있음을 증명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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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오르고 싶으면 그대들 자신의 발을 사용하라!
결코 실려서 오르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 P9

차라투스트라가 그 옛날 에덴 동산의 뱀처럼 다가와, 신의 모든 말씀이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가치와 신념들을 조롱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 자신을 비웃기도 할 것이다. - P9

"*사물들의 *질서가 *뒤바뀌며 *순식간에 인간적 노력의 모든 체계가 전복될 것이다

니체는 전체집합 U를 미지수 X로 바꾸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 적혀 있던 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지수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미지수 X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 P11

*정해진 답에 *삶을 꿰맞추는 건 끝났다.

이제 우리 *삶을 위해 *답이 *수정될 것이다.

체험 erlebnis은 일반적인 경험 erfahrung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후설이나 딜타이에 따르면, *체험은 *개개인이 *스스로 *자기 삶을 *형성하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 P22

니체의 주요 개념들, 가령 긍정의 권력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등은 모두 1881년 이후에야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 P25

니체는 당시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기술하면서 그 핵심에 기독교가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잇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삶이란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그 이유를 오직 우리가 지은 죄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 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 P27

기독교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악의 잣대로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움츠러 들게 하는 *도덕주의자들이나,

*영원한 *보편적 진리를 들먹이며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의 가치를 무시하는 철학자들도 생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이다.

니체는 근대 유럽인들이 자기 삶에 필요한 가치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에게는 도덕도 진리도 하나의 보편적 명령으로서 부과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도덕과 진리를 모두가 떠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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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끊임없이 도덕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그와 동시에 사회는 난폭해진다. 공손함이 사라진다. 진정성 숭배는 공손함을 경멸한다. 아름다운 교제 형식들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형식에 적대적이다.

도덕은 사회의 야만화를 배제하지않는 것으로 보인다. 도덕은 형식이 없다. 도덕적 내면성은 형식 없이 작동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도있을 것이다. ‘사회는 도덕화 경향이 강할수록 더 불손하다. 이런 형식 없는 도덕에 맞서 아름다운 형식의 윤리를 방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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