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이 행복보다 더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성스러움…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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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빌리티 인문학 mobility humanities


*모빌리티인문학은 기차,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모바일 기기 등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인간, *사물, *관계의 *실재적 · 가상적 이동을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진화 Co-evolution라는 관점에서 사유하고,

모빌리티가 *고도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제안함으로써 생명, 사유, 문화가 생동하는 인문모빌리티 사회 형성에 기여하는 학문이다. - P4

*모빌리티는 기차,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모바일 기기 같은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사람, 사물, 정보의 이동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것으로서 *공간(도시) 구성과 *인구 배치의 변화, *노동과 자본의 변형, *권력 또는 통치성의 변용등을 통칭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동까지도 포함한다.

오늘날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는 인간, 사물, 관계의 이동에 시간적 · 공간적 제약을 거의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발전해 왔다. 개별 국가와 지역을 연결하는 항공로와 무선 통신망의 구축은사람, 물류, 데이터의 무제약적 이동 가능성을 증명하는 물질적 지표들이다.

특히 전 세계에 무료 인터넷을 보급하겠다는 구글Google의 프로젝트 룬Project Loon)이 현실화되고 우주 유영과화성 식민지 건설이 본격화될 경우 모빌리티는 지구라는 행성의 경계까지도 초월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은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삶을 위한 *단순한 *조건이나 *수단이 아닌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 된 시대, 즉 **고-모빌리티high-mobilities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상호보완적 · 상호구성적 *공진화가 *고도화된 시대인 것이다.

*고-모빌리티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 ‘영토‘와 ‘정주‘ 중심 사유의 극복이 필요하다.

지난 시기 *글로컬화, *탈중심화, *혼종화, *탈영토화, *액체화에 대한 주장은 *글로벌과 로컬, *중심과 주변, *동질성과 이질성, *질서와 혼돈 같은 **이분법에 기초한 *영토주의 또는 정주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 역시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와 동시에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고-모빌리티 시대를 사유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글로컬화, 탈중심화, 혼종화, 탈영토화, 액체화를 *추동하는 **실재적·물질적 행위자agency로서의 모빌리티테크놀로지를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첨단 웨어러블 기기에 의한 인간의 *능력 향상과 인간과 기계의 **경계 소멸을 추구하는 *포스트 휴먼 프로젝트, 또한 사물 인터넷과 사이버 물리 시스템 같은 첨단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스마트 도시 건설은 오늘날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인간과 사회, 심지어는 *자연의 본질적 요소로 만들고 있다.

이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모빌리티인문학은 *‘모빌리티‘ 개념으로 *‘영토 와 ‘정주를 대체하는 동시에 인간과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공진화라는 관점에서 미래세계를 설계하기 위한 사유 패러다임을 정립한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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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한다.

**신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창조성이다.

*미학적 인간은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창조성으로 *지혜로운 판단을 하고, *따스한 인정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사람이다.

또 자신의 *잠재 능력을 *극대화하여 *자아실현을 이루고,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개성으로 제 *빛깔을 내는 멋진 사람이다.

그는 항상 *삶을 *긍정하고 *불필요한 *비교로 위축되거나 *열등감을 가지는 일 없이,
가장 *자기다운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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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모빌리티‘ 혹은 **’유목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 *정지를 근원적인 것으로, *운동을 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전통적인 *존재론적 입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지 · 불변 · 존재 · 실체가 기본 상태이고 **운동·변화 · 생성 · 관계는 이로부터의 *‘이탈‘이나 예외로 보는 *정태적관점은 고도 *모빌리티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사회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나아가 *정주주의 사유는 오늘날 *모빌리티가 야기하는 *계층적 서열화 및 *불평등과 같은 문제에 *둔감하다. 이 책은 이러한 정주주의비판을 토대로 사회과학적 모빌리티 연구를 검토하고 인문학적 사유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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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과 잔인함, 요한 스트린드베리


"나는 신을 찾아 헤매다 악마를 발견했다."

스트린드베리가 생각하기에 진실이 잡하지 않는 세계에서 ‘진정한 유효성을 지닌 것은 오직 자아뿐’이다.

그는 세계의 과정이란 흐름과 또 다른 흐름들이 뒤섞이며 소용돌이치는 혼란이라고 확신했다. - P139

그는 ‘’일관된 성격 묘사를. 고수하는 것’이 고전극의 치명적 오류라고 느겼다.

실상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사람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영혼의 수많은 비일관성과 모순을 그려내는 것이다. - P140

동시에 그에게는 ‘**형이상학적 허기’도 있었고, 신비주의자의 기질은 없었지만 현실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경험을 향한, 그리고 피안과의 결합을 향한 신비주의적 충동은 있었다. - P140

우리는 다수의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이 자아들을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이 자아들을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그 생명력에 의지해야만 만족감을 주는 하나의 자아를 발견할 때까지 각각의 자아들을 실험적으로 탐색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탱할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는 또한 *무의식에서 검열 없이 건져 올릴 수 있는 표현만이 온전성을 성취할 수 있고 *욕망의 억제를 해제하고 자아의 정의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식 관점도 견지했다. - P141

/ 조지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는 종교적인 사람이라고도 비종교적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입센은 자기 세대를 *물질주의에서 구출하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을 비롯하여, *인생의 목표는 *자기향상과 *자기실현이라는 것, *도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며,

표준들이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는 성서보다 유럽의 현대 문학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모차르트적 기쁨이 삶의 목표라는 것 들이었다. - P142

*진화가 현실에 심어놓은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삶 자체에 내장된 *영원불변의 *도덕적 명령이란 있을 수 없고, 그 무엇에도 *초월적 타당성은 *존재할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가치 있는 행동을 하려 한다면 반드시 *종교가 있어야 한다. 우리 문명이 현재 처해 있는 *끔찍한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면,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을 양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그의 대단한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P142

그는 *삶의 변화와 *개선 가능성(과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극예술뿐 아니라 정치에도 깊이 관심을 보이고 참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 어떤 ‘황금률도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볼 때 우리가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규칙이나 이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 방식이 인생 자체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효과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했다.

"*인생은 *의지의 성취로 이루어지는데, 의지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며, 어제 성취를 확고하게 해주었던 조건이갖춰졌다고 해서 오늘의 의지가 성취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쇼는 *인생에는 *행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행복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없다. 불행 정도나 예외로 할 수 있을까." - P142

행복은 자기중심적이고 덧없으며 척박하고 창조성이라곤 없는 것이라고 본 반면에 창조성은 높이 샀다.

내가 보기에 종교란 게으름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 내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고 나니 나는 본능적으로 더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세상을 보고 좋았다고 말한 신을 세워놓았으니 말입니다.

쇼에게 앞으로 다가올 삶이란 ‘활동적인 사람에게는 그저 두 번째 죽음일 뿐인 따분한 **지복 속에서… 보내는 *영원’이 아니라, ‘온 세상에 다가올 *더 나은 *삶’이었다. - P143

쇼의 *사회주의와 *페이비언주의는 *점진주의적이었고, 그는 혁명가리기보다는 *진화론자였다. - P144

하지만 쇼가 다윈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다. 쇼는 인간에게 ‘공통제의 삶에서 한 몫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자연선택은 *낭비적이고 *간접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 다수는 자기 *외부의 본질적인 *생명력과 *의지‘
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쇼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부정이나 *자기희생의 행위가 아니라 *창조적인 의무이자 *삶에 대한 믿음의 핵심적인 행위였다. - P145

그 의지가 핵심적인 또 다른 이유는
*‘지식과 문명이 *진보해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필요만 생겨나고 거기에 *새로운 고통과 *새로운 형태의 이기심까지 덩달아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여전히 필요하다." - P145

그리고 "*세계는 인간이 *변변찮고 답답한 *신들의 지배로부터 *세계를 *되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나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면서는 … 결코 어떠한 *행복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좋음이란 결코 멈출 필요도 없고 결코 완결되지도 않는 끝없는 개선의 과정이다. - P146

대체로 작용과 반작용의 변증법을 거쳐 보다 완전한 자기인식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진화를 통하여, 절망을 넘어서서 현실을 새롭고 견고하게 장악하는 종합에 이르는 운동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인생은 행복보다 더 고귀하다.

쇼에게 **희망은 일종의 **도덕적 책임이었다.
지옥은 떠다니는 것(목적의 부인)이며, 천국은 키를 잡고 조종하는 것이다.

쇼의 초인은 니체의 위버멘쉬와 달리 하나의 목표나 최종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과정, 발달의 한 단계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방향이다." - P147

미래는 안정보다 놀라움과 경이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삶이 다가오는 대로 붙잡고 겨뤄라. 단, 삶은 결코 우리가 예상한 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인간보다는 *생명에 대한 믿음, *결과보다는 *노력에 대한 믿음, *선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보다는 *과정에 대한 믿음.

다른 여러 모더니스트들이 그랬듯이, **쇼도 *신이 죽었고 *지복의 내세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대안은 이 삶을 더 *강렬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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