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과 잔인함, 요한 스트린드베리
"나는 신을 찾아 헤매다 악마를 발견했다."
스트린드베리가 생각하기에 진실이 잡하지 않는 세계에서 ‘진정한 유효성을 지닌 것은 오직 자아뿐’이다.
그는 세계의 과정이란 흐름과 또 다른 흐름들이 뒤섞이며 소용돌이치는 혼란이라고 확신했다. - P139
그는 ‘’일관된 성격 묘사를. 고수하는 것’이 고전극의 치명적 오류라고 느겼다.
실상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사람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영혼의 수많은 비일관성과 모순을 그려내는 것이다. - P140
동시에 그에게는 ‘**형이상학적 허기’도 있었고, 신비주의자의 기질은 없었지만 현실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경험을 향한, 그리고 피안과의 결합을 향한 신비주의적 충동은 있었다. - P140
우리는 다수의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이 자아들을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이 자아들을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그 생명력에 의지해야만 만족감을 주는 하나의 자아를 발견할 때까지 각각의 자아들을 실험적으로 탐색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탱할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는 또한 *무의식에서 검열 없이 건져 올릴 수 있는 표현만이 온전성을 성취할 수 있고 *욕망의 억제를 해제하고 자아의 정의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식 관점도 견지했다. - P141
/ 조지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는 종교적인 사람이라고도 비종교적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입센은 자기 세대를 *물질주의에서 구출하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을 비롯하여, *인생의 목표는 *자기향상과 *자기실현이라는 것, *도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며,
표준들이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는 성서보다 유럽의 현대 문학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모차르트적 기쁨이 삶의 목표라는 것 들이었다. - P142
*진화가 현실에 심어놓은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삶 자체에 내장된 *영원불변의 *도덕적 명령이란 있을 수 없고, 그 무엇에도 *초월적 타당성은 *존재할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가치 있는 행동을 하려 한다면 반드시 *종교가 있어야 한다. 우리 문명이 현재 처해 있는 *끔찍한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면,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을 양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그의 대단한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P142
그는 *삶의 변화와 *개선 가능성(과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극예술뿐 아니라 정치에도 깊이 관심을 보이고 참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 어떤 ‘황금률도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볼 때 우리가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규칙이나 이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 방식이 인생 자체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효과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했다.
"*인생은 *의지의 성취로 이루어지는데, 의지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며, 어제 성취를 확고하게 해주었던 조건이갖춰졌다고 해서 오늘의 의지가 성취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쇼는 *인생에는 *행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행복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없다. 불행 정도나 예외로 할 수 있을까." - P142
행복은 자기중심적이고 덧없으며 척박하고 창조성이라곤 없는 것이라고 본 반면에 창조성은 높이 샀다.
내가 보기에 종교란 게으름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 내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고 나니 나는 본능적으로 더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세상을 보고 좋았다고 말한 신을 세워놓았으니 말입니다.
쇼에게 앞으로 다가올 삶이란 ‘활동적인 사람에게는 그저 두 번째 죽음일 뿐인 따분한 **지복 속에서… 보내는 *영원’이 아니라, ‘온 세상에 다가올 *더 나은 *삶’이었다. - P143
쇼의 *사회주의와 *페이비언주의는 *점진주의적이었고, 그는 혁명가리기보다는 *진화론자였다. - P144
하지만 쇼가 다윈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다. 쇼는 인간에게 ‘공통제의 삶에서 한 몫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자연선택은 *낭비적이고 *간접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 다수는 자기 *외부의 본질적인 *생명력과 *의지‘ 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쇼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부정이나 *자기희생의 행위가 아니라 *창조적인 의무이자 *삶에 대한 믿음의 핵심적인 행위였다. - P145
그 의지가 핵심적인 또 다른 이유는 *‘지식과 문명이 *진보해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필요만 생겨나고 거기에 *새로운 고통과 *새로운 형태의 이기심까지 덩달아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여전히 필요하다." - P145
그리고 "*세계는 인간이 *변변찮고 답답한 *신들의 지배로부터 *세계를 *되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나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면서는 … 결코 어떠한 *행복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좋음이란 결코 멈출 필요도 없고 결코 완결되지도 않는 끝없는 개선의 과정이다. - P146
대체로 작용과 반작용의 변증법을 거쳐 보다 완전한 자기인식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진화를 통하여, 절망을 넘어서서 현실을 새롭고 견고하게 장악하는 종합에 이르는 운동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인생은 행복보다 더 고귀하다.
쇼에게 **희망은 일종의 **도덕적 책임이었다. 지옥은 떠다니는 것(목적의 부인)이며, 천국은 키를 잡고 조종하는 것이다.
쇼의 초인은 니체의 위버멘쉬와 달리 하나의 목표나 최종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과정, 발달의 한 단계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방향이다." - P147
미래는 안정보다 놀라움과 경이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삶이 다가오는 대로 붙잡고 겨뤄라. 단, 삶은 결코 우리가 예상한 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인간보다는 *생명에 대한 믿음, *결과보다는 *노력에 대한 믿음, *선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보다는 *과정에 대한 믿음.
다른 여러 모더니스트들이 그랬듯이, **쇼도 *신이 죽었고 *지복의 내세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대안은 이 삶을 더 *강렬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