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인간성의 파멸을 멈출 변화
/ 홍세화


정치적 미아가 되어 프랑스 파리에 떨어진 우리에게 우유를 사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산 나날이 있었다.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내 의식을 지배한 것은 **불안이었다. *실체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영혼을 무겁게 옥죄는 그 검은 그림자는 나에게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 P4

내가 기본소득 시대가 열리기를 열망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본소득이 수많은 인간 존재들에게 드리워진 *불안의 무게를 덜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불안을 완전히 없애줄 수는 없을지라도.

**불안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에 갇히면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전망할 여유를 잃는다.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평정심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인 항산이 항심을 낳는다"는 맹자의 말씀이 이 점과 연관디고,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우리 옛말도 마찬가지다. - P5

그러나 "제 코가 석자"인 사회, 불안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전인적 인간을 지향하게 하는 대신에 **경제적 존재로만 머물게 함으로써 *참된 의미의 *자유에서 멀어지게 하고 *연대와 *공존의 가능성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소유적 존재 양식의 인간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에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에서,그리고 결국 *정복하고 약탈하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나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행복은 사랑하고, 나누며, 베푸는 것에 놓여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소유적 인간들로 넘쳐난다.

소유욕의 포로가 되어 *자본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거나 굴종한다.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오늘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지나친 소유욕에 의해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 P6

3포(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서 5포(3포 + 취업, 주택 구입 포기)와 7포(5포 + 인간관계, 희망 포기)를 지나 ‘n포’의 헬조선이다. - P6

이처럼 소유 집착의 시대에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부의 대물림 쪽에 있다. 부가 대물림된다면 그 반대편에 가난의 대물림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차피 사회적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부러움이든 시기든 관심이든 부의 대물림 쪽에 집중한다.

가난과 그 대물림은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우리는 *작은 일에만 주로 분개한다.

작은 도둑들이 빠짐없이 법말에 걸릴 때 큰 도둑들은 법망도 잘 피하는데 우리가 냉대하고 피하는 쪽은 큰 도둑이 아니라 작은 도둑들이다.

실상 한국은 토지, 금융, 지식재산, 전파, 데이터 등 공유재로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고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의 조세만 부담해도 당장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 재원 조달이 가능하다.

북유럽 나라들의 수준으로 부담하면 월 50~60만 원의 기본 소득 재원 조달도 가능하다. - P9

이미 줄어든 일반사무직과 제조업 기술자는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다.

앨버트 허시먼의 반동의 수사법 세 가지 규칙

새로운 사회정책 아이디어는 초기에
*불가능성(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왜곡(의도하지 않은 부정적 결과를 낳을 것이다)
위험성(다른 목표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의 근거로 공격받는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실업수당, 1930년대의 가족수당과 노령연금 제도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 P11

/ 21세기 자본주의의 흐름과 기본소득의 탄생, 홍기빈


BIEN의 창시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가 제시하는 기본소득의 이념은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real freedom for all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기본소득은 궁핍에 처한 이들을 사회가 돕는다는 *도덕 경제 moral economy의 원리를 배경으로 한 *공공 부조 public aid와 분명히 다르며, 수혜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미래에 당하게 될 각종 리스크를 공유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사회보험 social insurance과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 P22

이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혹은 *미래의 불안에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것 등의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 자유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사회정책 범주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다음의 네 가지의 특징이 도출된다.

첫째, *현금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둘째, *개인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셋째, *아무 조건 없이 지급되어야 한다.
넷째, *수혜자의 재산이나 소득 상태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지급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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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처음에는 듣는 것에 민감해지고, 더 잘살게 되면 냄새에 민감해진다.

1980년대가 되자 매일 샤워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 남자도 향수를 쓰기 시작했다. - P34

건축에서 가장 *큰 변화는 건축 *재료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유렵은 일 년 중 *비가 시기적으로 *분산되어 *적당하게 내리는 기후다. 그래서 땅이 *단단한 편이다. 재료도 우리나라의 단단한 *화강석과는 달리 가공이 수월한 *대리석이 많다.

그러다 보니 서양 건축은 *돌이나 벽돌 같은 *무거운 재료를 사용했고 그런 재료를 만들어진 *벽이 *지붕이 받치는 구조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벽이 구조체다 보니 *창문을 크게 뚫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내부와 *외부가 명확하게 *구분된 건축이 만들어졌다. - P49

동양에서는 비가 많이 오는 기후여서 돌 같은 무거운 건축 재료를 사용하면 *장마철에 지반이 약해졌을 때 벽이 넘어져서 집이 무너진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가벼운 재료인 *나무를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무 기둥이 지붕을 받치는 건축물이 만들어졌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커다란 창문을 만들 수 있었다.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큰 창문이 있다 보니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건축이 발달했고 이는 *풍수지리라는 이론까지 나오게 했다. - P49

20세기에 들어 건축은 **철근 콘크리트와 *강철이라는 새롱ㄴ 재료를 맞이하게 된다.

콘크리트 기둥과 철골 기둥으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근대적 개념의 *학교는 최소한의 교사로 최대한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산업화의 *효율성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천 명 이상의 규모인 조직은 *군대, 회사, 학교 정도밖에 없다. - P91

학교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지식 전달의 기능,
둘째, 또래들간 *사회 공동체 경험의 장으로써의 기능
셋째, 낮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 주는 *탁아소의 기능이다.

온라인 강의가 아무 때나 필요할 때 들을 수 있느냐, 아니면 생방송이냐에 따라서 선생님의 *권위는 차이가 난다.

아무 때나 볼 수 있을 때와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마치 *한정판 제품(리미티드 에디션)과 같은 개념이다. - P94

장기적으로 보아 선생님의 역할이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지식 전달의 기능은 일타강사나 유튜브상의 각종 동영상 자료로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교육은 지식 전달이 전부가 아니다. 선생님은 지식 전달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해답은 *대화에 있다.

대화를 통해서 학생들 내면의 것들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 될 것이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두레박이다.

학생들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을 긴 줄에 매달린 두레박으로 길어 내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 P95

(…)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가 즐기는 것은 *콘텐츠 자체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동일한 이벤트나 사람을 보고 집중하고 열광하는 것은 인터넷상으로는 **대체하기 힘든 경험이다. - P99

가상 현실 vr, 증강현실 ar, 홀로그램 같은 기술들이 발전하고 있지만 실제로 체험해 보면 너무 *조악한 수준이라서 *현실 경험을 *대체하기에는 십 년 내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기술적 부족은 현재 수준의 vr체험은 5분 내외의 짧은 **일방향 경험이라는 것이다. - P101

다른 플레이어와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우연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VR 콘텐츠는 두 번 세 번 하면 같은 체험이라는 것에 질리게 된다.

우리가 *온라인상에서 *실제 같은 *다이내믹한 경험을 주려면 *참여한 사람에 의해서 변화하는 *변수가 필요하다.

온라인 수업으로 학교를 대신하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의 결핍이 있다.

온라인 수업만 들은 학생들은 추후에 사회에 나가서 *더불어 사는 경험을 두려워하는 시민이 될 가능성이 많다.

젊은 세대들은 대화나 전화를 두려워하고 문자로 소통하는 것을 선호한다.

*미묘한 감정이 실리는 *실제 표정이 아닌 *단순화된 아바타의 표정을 통해 *소통하게 됐을 때 *대인 관계의 훈련 정도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화가 아닌 문자로 대부분의 소통을 한다. 이럴 경우 표정보다는 *이모티콘으로 *나의 감정을 *대신한다. 표정은 *수천 가지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지만 이모티콘은 많아야 *수백 종류다.

**내가 아는 단어만큼만 나를 표현할 수밖에 없듯이객관식으로 골라야 하는 이모티콘에 의해서 내 감정은 단순화되고한정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점점 퇴화되는것이다. - P102

앞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주제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늘어날 때 학생들에게 어떻게 대면 대인 관계와 공동체훈련의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인을 양산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누군가에게 조종되기 쉬운 대중으로 구성된 사회이거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세상이 되기 쉽다.

서울의 경우 전체 연면적의 50퍼센트 정도가 주거고, 30퍼센트가량이 상업 시설이다. - P107

같은 시공간에서 일하면서 만들어지는 공동체 의식과 놀면서 만들어지는 공동체 의식은 다르다. 공통의 목표와 성취에 기반을 둔 공동체 의식은 같이 여행을 간다고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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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건
당신 스스로 주워 담은 수많은 광경이 만든 세상이다.
그 속의 생각과 느낌은 표현되길 기다린다.

- 미야자키 하야오 - P52

마야자키의 작품은 대부분 판타지나 공상과학 장르지만, 그의 *정치적, 사회적 태도와 *개인적, 직업적 관계가 *투영돼 있어 *‘실제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 P18

나라가 무너졌다
남은 건 산과 강뿐이네

-두보 - P28

*1930년대 말 일본 제국은 세계 곳곳에서 부러움과 공포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학자 로저 루이스가 말했듯 "*백인 남성으로 이뤄진 제국 지배 클럽"에 가입할 자격을 얻었다. - P30

미야자키 감독은 제로센의 팬벨트를 만드는 공장이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소유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미야자키와 스튜디오 지브리 동료들은 젊은 세대가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폭격으로 검게 물든 비를 맞으며 새벽까지 몸을 웅크리고 떨었다.

결론은 단순했다.
"그런 공포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어떤 면에서 보면 미야자키의 예술은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피어났다. 천재를 탄생시키는 데에는 가족, 유년기, 교육, 문화 같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C. S. 루이스는 열 살에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환상의 세계를 만들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롤링은 해리 포터 시리즈에 가족을 떠나거나 괴롭히는 아버지를 등장시켰다.

예술가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초월하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촉매제로 해 고통을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 P34

미야자키는 트라우마보다는 인내의 미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처를 지울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견디는 수밖에 없다. 치유할 방법은 없다.

그는 강정의 상처가 "인간존재의 기본 요소"이므로 "그저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 P35

초기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만화 버전부터 가장 최근작 <바람이 분다>의 마지막 대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마다 등장하는 *"살아야 한다."라는 주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인내,
견딤, 수용은 미야자키 세계의 중요한 주제다.

미야자키는 *고통이 아닌 **회복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그의 삶과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너무 가까이 있는 뭔가는 종종 제대로 보기가 힘든 법이다.

미야자키 작품들이 일본과 전 세계 관객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는 희망과 회복이다. - P39

미야자키의 여러 걸작에서 주인공은 가족과 이별하며 *소우주의 종말’을 맞는데, 어느 일본 비평가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에게 이는 *"세상이 끝나는 사건"이다.

미야자키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결핵에 걸리는 소우주 종말을 경험했다. - P40

그의 기억에서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비현실적인 아이를 발견한다.
미야자키 세계의 아이들은 어른이 부담해야 할 책임을 마다하지 않는다. - P47

상실은 애도를 넘어서 예술의 동기가 된다. - P49

*학교에서 만화를 보는 학생은 나뿐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직접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날 바보 같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물론 이미 난 괴짜 취급을 받고 있었기 대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만화의 *잠재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야말로 *바보라고 생각했다. - P54

미야자키는 나이가 들수록 "내 안에서 어린 시절을 지우려고 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를 성공한 예쑬가이자 애니메이터로 성장시켜준 도구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다.

미야자키 역시 점령군의 교육 방식으로 문화적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일본을 증오하게 됐다.

미야자키는 전쟁의 공포를 알리기 위해 오히려 전쟁의 역동성을 치밀하게 그린다.

독서와 그림은 창의력의 분출구이자 점점 공허해지는 집에서 느껴지는 공포에서 벗어날 탈출구였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네 가지를 두려워했는데 그건 천둥, 불, 지진 그리고 아버지였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허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어머니가 한 말 중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어."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연합군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일본을 왼쪽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냉전과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개혁의 물결은 한순간에 멈췄다.

*안정이 변혁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점령군은 *역행 정책을 펴면서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전쟁 범죄자였던 정치인들을 다시 불러 요직에 앉혔다.

노사 협상 테이블에서 노동자들은 힘을 잃었고, 기대감에 부풀었던 많은 일본 시민은 점령군의 이 같은 노선 후퇴를 민주화와 서구 사상에 대한 희망의 *배반으로 여겼다. - P71

미야자키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필수 경제학 과목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전쟁 후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다.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이후에는 점령군의 역행 정책에 실망한 지식인들이 전쟁 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섰던 얼마 안 남은 *진보주의자들은 다시 *규합할 *또 다른 *이념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 P72

미야자키는 사회문제에 관해 진보적 태도를 고수해왔지만, 쉽게 *냉소주의나 싸구려 *허무주의에 빠지는 건 경계했다. - P75

원화가가 원화를 그리고 중간 동작을 그리는 동화가들이 원화와 원화 사이를 잇는 수많은 장면을 채웠다.

마지막에는 채색 담당자가 마무리했다. 이 과정은 그림 실력은 물론이고 속도도 중요하다. - P85

미야자키 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파괴된 비행기는 죽을 때까지 싸웠지만, 마음속으로는 살고 싶었던 젊은이에 대한 애도다. - P112

한편 미야자키의 말처럼 *"기계가 아직 재미의 대상"이던 증기기관 시대를 그린 공상과학 장르 *스팀펑크’의 시각적 미학은 베른에게 받은 독특한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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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해방과 새로운 출발


1. 해방과 교회 재건

한국교회는 8.15 해방을 하나님이 민족에게 준 특별한 선물로 받아들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 당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던 교단 조직은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었다. 이 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교단이었다.

정부수립의 주도권을 가질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이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따라서 그들을 지원하고 국가 재건의 이념을 제공하려면 각 교파로 환원하기보다 통합된 교단으로 남아 강력한 세력을 구성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회는 일제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가졌으며,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하는 등 여러가지 사업을 결의했다. - P16

1946년 4월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제2차 남부대회가 열렸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남부대회 *해체를 위한 모임이 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였다.

조선기독교남부대회는 해체되었으나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1946년 가을 교파연합운동 기구로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에 참여하여 연합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감리교 재건파에는 일제 말기 친일적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소외당했거나 휴직, 파면 등의 조치를 당했던 교역자들이 많았다.

복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은 상호 비방과 교회 쟁탈전으로 비화하였다.

장로교의 경우 경남노회를 시작으로 지방노회 재건이 추진되어 1946뇬 초까지 남한 지역의 노회 재건이 사실상 완결되었따.

북한 5도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이었다.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던 사람들과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장로교는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기 때문에 교단의 *지도층에 속한 인물 가운데 *신사참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소수의 인물들은 *치안유지법이나 *불경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들 중 옥중에서 사망한 이도 있지만 *20여 명은 해방 후 출옥하여 *출옥성도 혹은 옥중성자라고 불렸다.

이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와 자숙 · 정화운동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 P22

이렇게 주장한 대표적인인물이 이기선 · 채정민 · 한상동 등이었다. 이들 출옥성도의 주도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모였던 평양노회 회원들은 교회재건 문제를 논의한후, 9월에 교회 재건에 관한 5대 원칙을 발표했다.

이 원칙에는 신사참배를 행한 목사에게 최소 2개월 동안 휴직하고 통회자복(痛海自服)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도 있었다.

그러나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고난을 받았다는 *도덕적 우위를 갖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여서 교회 재건작업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일제에 순응했던 교계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숙안을 반대한 사람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감옥생활 한 사람들만큼 고생했고, 도피했거나 은둔했던 사람보다도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신사참배와 관련된 회개와 책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친일과 신사참배 문제를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 교회제도의 유치 차원에서 해석하는 태도는 이후의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되었다.

마침 한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했던 미국정청이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의 가치를 점차 알게 되면서 선교사들이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열렸다.

해방 직후 호남지역은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띠며 선교사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그로 인해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와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4. 신학교의 재건

북한 지역에서 신학교 재건과 운영이 외부적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면 남한지역에서는 교회 내부 문제가 갈등과 마찰의 주요 원인이었다.

해방될 당시 남한지역 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는 서울의 조선신학원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신학원의 진보적인 경향에 반발했거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남한에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48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 내의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조선신학원과 장로회신학교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자 *1951년 장로회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들은 장로교가 분열되면서 각각 다른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따.

이처럼 신학교가 교단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총회 직영 신학교를 졸업해야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교가 *총회 직영이 되면서 *교단 지도부를 구성하는 *정치세력의 *신학적 성향이 *신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고 신학교가 *교단 정치에 휩쓸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감리교 교세 면에서는 복흥파가 우세하였지만 신학교의 실질적 운영권은 재건파가 독점하고 있었따.

결국 복흥파는 1948년 9월 서울신학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교단 통합이 이루어지자 서울신학원이 *감리교신학교로 흡수되었고, 류형기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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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지상에 자리 잡은 지옥

맨체스터와 시카고 1830~1914년


지옥의 문이 열렸다!

면직공업 도시이기도 한 *맨체스터는 세계 직물업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적 *산업화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었다.

토크빌은 여기서 인류의 *가장 완벽한 발전과 *가장 미개한 것을 이룬다. 문명은 기적을 일으키고, 문명화된 인간은 야만인으로 되돌아가다시피 한다. - P360

공장주들은 임금이 더 싸고 더 쉽게 훈련시킬 수 있는 여자들과 여자아이들을 선호했다.

아침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했어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지작을 하면 어떻게 됐니?
채찍으로 맞았어요

먼지투성이였죠. 먼지 때문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어요.

뼈가 비틀어지고 말았어요.

지금은 어디 사니?
구빈원에요.

공장 노동자들은 주로 16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들이었다.

전체 고용인의 40퍼센트가 비정규직이었고, 60퍼센트가 최저임금을 받고 있었다. - P361

철학자 이폴리트 텐은 "이보다 더 치욕적이고, 타고난 인간의 본능에 어긋나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조시아 스트롱은 시카고가 문명에 폭풍을 일으킬 중심지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사회적 다이너마이트가 수북이 쌓여 있다.:

1851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회지와 도시에 살았다.
이제 영국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농촌보다 도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가 되었다.

시카고는 1830년에 인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1880년에는 50만 3,000명, 1900년에는 170만 명으로 늘어났다. 세계 역사상 그토록 빨리 인구가 증가한 도시는 없었다. - P363

프런티어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도심의 상업지구는 신속하게 복구되었고, 이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건축 및 토목공사를 거쳐 재건되어 19세기의 상징적인 세계적 대도시라는 지위에 올랐다.

시카고의 선진적인 *철도 산업을 통해 이룩된 *철강 분야의 발전에 힘입어 더 얇은 벽체를 지탱할 수 있는 *강철 들보가 생산되었다.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강철 들보는 화재에 강했다. *전기 관련 기술 덕분에 **승강기, 전구, 전신, 전화 그리고 난방 및 환기장치 같은 *고층건물 내부에서의 업무가 가능하게 해주는 최신 발명품들이 등장했다. - P364

마천루는 *건물인 동시에 *기계였고, 19세기 기술의 정점이었다. 모나드노크Monadnock(1889년 착공, 1892년 완공) 같은 *16층짜리 건물의 간결하고 단순한 정면 외벽은 흔히 기계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도시들에는 총 *42억 명이 살고 있다. 맨체스터와 시카고는 19세기의 충격 도시‘ 였다. 그 두 도시는 **산업혁명뿐아니라 **도시 혁명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맨체스터와 시카고는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연구 대상으로 각광을 받았다.

네이피어 장군이 맨체스터를 통렬하게 묘사하고 나서 3년이 흐른 뒤, 22세의 청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에르멘 앤드 엥겔스.irmen &Eingels(그의 아버지가 공동으로 소유한 면사 방적 회사)의 사무실에서 일하기위해 독일에서 맨체스터로 건너왔다. 엥겔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산주의 신념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맨체스터로 보냈다.

그러나 엥겔스는 산업자본주의의 발상지인 그 도시에서 산업자본주의의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다.

오염된 물과 배설물, 쥐 때문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이질, 디푸테리아, 천연두, 역리 등이 창궐했다.

영국 농촌 지역의 전체 유아의 32퍼센트가 생후 5년에 이르기 전에 사망했고, 기대수명이 약 40세였다.

한편 맨체스터와 시카고의 경우에는 생후 5년 전의 유아사망률이 60퍼센트였고, 기대수명이 26세에 불과했다.

런던과 버밍엄의 기대수명은 37세였다.
19세기 중반의 산업도시들보다 사망률이 높은 곳은 없었다.

근대 대도시의 교통수단에 힘입어 그 같은 격리 방식이 가능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터벅터벅 걸어 출근했고, 오염된 환경에서 살았다.

반면, 중산층과 부유층은 교외에서,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은 호수를 굽어보는 노스쇼어 지역의 그림 같은 마을에서 통근할 수 있었다.

도시 공동체의 파편화 현상과 하나의 도시가 계급 기반의 주거 구역들로 서로 엄격하게 차단되는 현상으로 인해 상황은 한층 더 악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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