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해방과 새로운 출발
1. 해방과 교회 재건
한국교회는 8.15 해방을 하나님이 민족에게 준 특별한 선물로 받아들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 당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던 교단 조직은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었다. 이 조직은 1945년 7월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교단이었다.
정부수립의 주도권을 가질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이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따라서 그들을 지원하고 국가 재건의 이념을 제공하려면 각 교파로 환원하기보다 통합된 교단으로 남아 강력한 세력을 구성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회는 일제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가졌으며,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하는 등 여러가지 사업을 결의했다. - P16
1946년 4월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제2차 남부대회가 열렸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남부대회 *해체를 위한 모임이 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였다.
조선기독교남부대회는 해체되었으나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1946년 가을 교파연합운동 기구로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에 참여하여 연합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감리교 재건파에는 일제 말기 친일적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소외당했거나 휴직, 파면 등의 조치를 당했던 교역자들이 많았다.
복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은 상호 비방과 교회 쟁탈전으로 비화하였다.
장로교의 경우 경남노회를 시작으로 지방노회 재건이 추진되어 1946뇬 초까지 남한 지역의 노회 재건이 사실상 완결되었따.
북한 5도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이었다.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던 사람들과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장로교는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기 때문에 교단의 *지도층에 속한 인물 가운데 *신사참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소수의 인물들은 *치안유지법이나 *불경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들 중 옥중에서 사망한 이도 있지만 *20여 명은 해방 후 출옥하여 *출옥성도 혹은 옥중성자라고 불렸다.
이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와 자숙 · 정화운동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 P22
이렇게 주장한 대표적인인물이 이기선 · 채정민 · 한상동 등이었다. 이들 출옥성도의 주도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모였던 평양노회 회원들은 교회재건 문제를 논의한후, 9월에 교회 재건에 관한 5대 원칙을 발표했다.
이 원칙에는 신사참배를 행한 목사에게 최소 2개월 동안 휴직하고 통회자복(痛海自服)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도 있었다.
그러나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고난을 받았다는 *도덕적 우위를 갖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여서 교회 재건작업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일제에 순응했던 교계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숙안을 반대한 사람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감옥생활 한 사람들만큼 고생했고, 도피했거나 은둔했던 사람보다도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신사참배와 관련된 회개와 책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친일과 신사참배 문제를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 교회제도의 유치 차원에서 해석하는 태도는 이후의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되었다.
마침 한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했던 미국정청이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의 가치를 점차 알게 되면서 선교사들이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열렸다.
해방 직후 호남지역은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띠며 선교사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그로 인해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와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4. 신학교의 재건
북한 지역에서 신학교 재건과 운영이 외부적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면 남한지역에서는 교회 내부 문제가 갈등과 마찰의 주요 원인이었다.
해방될 당시 남한지역 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는 서울의 조선신학원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신학원의 진보적인 경향에 반발했거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남한에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48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 내의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조선신학원과 장로회신학교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자 *1951년 장로회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들은 장로교가 분열되면서 각각 다른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따.
이처럼 신학교가 교단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총회 직영 신학교를 졸업해야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교가 *총회 직영이 되면서 *교단 지도부를 구성하는 *정치세력의 *신학적 성향이 *신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고 신학교가 *교단 정치에 휩쓸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감리교 교세 면에서는 복흥파가 우세하였지만 신학교의 실질적 운영권은 재건파가 독점하고 있었따.
결국 복흥파는 1948년 9월 서울신학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교단 통합이 이루어지자 서울신학원이 *감리교신학교로 흡수되었고, 류형기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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