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소피스트 사고와 가치의 전도(顚倒)
이오니아학파의 지혜에 비하자면 소피스트들의 정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 이유는 소피스트들이 다른 대상들을 다뤄서뿐만 아니라 세계 대신에 ‘인간‘이 대상으로 된다 -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의 지난날에 대한 관계는, 웅변가의 연구가에 대한 관계와 같았으며, 직업인의 예술가에 대한 관계와 변호사의 재판관에 대한 관계와 같았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크리티아스, 트라시마코스.
66-67쪽
a) 정치와 수사학
소피스트들이 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이 소피人트들이 도덕교사였다고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말하고있는 덕(Arete)은, 덕(德)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며, 말의 원래적인 뜻으로 새기자면, 숙련(熟練)이라고 번역됨직한 말이다.
즉 이 때에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숙련이다. 시대는 바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새로운 땅을 점령하고 이용하는 사람들과, 의지를 관철하고, 그 무엇인가를 실행하고, 또 그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였다.
소피스트들의 학문은 거듭 말해지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교양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고양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이었다. 소피스트들이 열어놓은 새로운 전망은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도 남음이있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생활양식을 몸에 지닌 사람들을 좋아했다.
목표에 이르는 길은 ‘변론‘이었다. 그런데, 이 변론은 어떠한 변론이었던가? 물론 이 변론은 빛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통달해 있어야만 했고, 항상 모든 것에 관해서 말할 수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변론은 ‘확신‘을 주는 것이어야만 했다.
확신을 주는 기술은 ‘소피스트들의 덕‘이다. 그럼 무엇에 관하여 확신을 준단 말인가? 프로타고라스는 "빈약한 사실을 보다 강한 사실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리고 고르기아스는 변론이란, 그것을 먹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에게) 독을 주기도 하고, 사람들을 호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확신>이란 진리에만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항상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관철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라고는 하지 않고, 설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피스트들은 자기들의 기술을 영혼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영혼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의 기술은 단순한 논쟁술이며, 말을 곡해하게 하는 것이며, 겉꾸밈이다. 객관적인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이해관계가 중요하다. 이렇게 되어서, 소피스트학이라는 말은 오늘날과 같은 나쁜 뜻으로 되었다.
b) 소피스트들의 세계관
- 이들의 학문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형이상학에 나타났던 지혜도 아니며, 엄밀한 뜻의 학문도 아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적인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 그들의 근본적인 사상은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와 권력론이다.
68-69쪽.
이오니아학파는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힘이 없이 철학을 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의문이 나타난다.
프로타고라스는,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대상에 매달려 있지 않다. ‘객관적인 사태‘는 우리들의 정신에 - 어떤 정신에 의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 끌어 들여지지 않고, 항상 주관(주체) 자신이 스스로의 의견을 말하고 있은 뿐이다.
우리는 사물들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나에게는 개별적인 사물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그대로이고, 너에게는 너에게 나타나는 그대로다.(단편 1).
이렇게 해서 인간은, 진리라고말해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척도가 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의 척도요,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있지 않다는 것의 척도다."(단편 1).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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