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이 책에서 저는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두 가지 극단적 입장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훌륭한 정치적 원칙들을 뒷받침하는 애국심 및 여타 감정들의 함양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불화나 비판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독재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감정을 함양하는 방식입니다. **현명한 정책이란 이 두 극단 사이에서규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입장은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토대와 힘을 무력화하는 태도이고, 두 번째 입장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품격 있는 민주적 정치 문화라는 목표는 당대의 정치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비판적으로사고하며, 변화와 개혁의 방식에 대해 토론하는 시민들이 있어야 도달 가능합니다. 

동시에 이들은 최선의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에 매진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가진 시민들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균형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에서 바로 이 균형에 이르는 올바른 방식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논의를 다루면서 저는 장자크 루소와 오귀스트 콩트가 **유의미한 반대 의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지나치게 독단적인 방식으로 **감정의 동질성 homogeneity 을 추구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반면 존 스튜어트 밀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기르는 풍부한 감정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비판 정신과 자유를 지지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균형을 잘맞춘 사례로 분석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저는 현명한 국가라면 **지고한 이상을 향한 열망을 굳건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비판의 목소리를 수호하는 정치적 집단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는 사법적 독립성이라든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현명한 국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비판 정신 자체를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양심적인 반대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선의에 기반한 오류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진실성과 비판의 자유라고 하는 서로 양립 가능한 개념을 필요로 합니다.


8-11쪽

<1장 자유주의 역사의 문제>



**공적 감정은 대개 강렬하여 국가의 진보에 있어 거대한 변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국가가 정해놓은 목적을 추구하는 데 새로운 활력과 깊이를 제공하는가 하면, 차별, 위계, 무시, 둔감함 등을 강화함으로써 본래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정치적 원칙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오랜 세월에 걸친 안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감정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모든 **품위 있는 사회는 *공감과 *사랑의 정서를 적절히 함양함으로써 *사회적 분열과 *계층의 분리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등한 기회를 열망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감정의 정치적 함양을 위해 두 가지 과제가 요구된다. 

하나는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요하는 유의미한 기획에 대해 사람들의 강력한 헌신을 촉구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재분배,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이들의 완전한 참여, 환경 보호, 해외 원조, 국가 안보 등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편협한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쉽게 **자아도취적 기획에 갇히며, 자신의 협소한 굴레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의 요구는 금세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국가적 차원의 목표를 향한 감정들은 흔히 사람들로 하여금 좀더 **거시적으로 사유하게 만들고, 좀더 넓은 **공동선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공적 감정을 함양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과제는 **나약한 자신을 보호하고자 타인을 *폄하하고 *무시하려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사회 안에,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 안에 도사리고 있다. (칸트는 이러한 경향을 *‘근본악‘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에 대한 해석에서는 나와 차이를 보인다)

**혐오나 시기,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욕망 등은 모든 사회에, 좀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제어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다. 특히 이런 것이 입법과정이나 사회 형성 과정에서 하나의 지표로 작동한다면 그 피해는 더 커진다.

**역사 속 위대한 민주적 지도자들은 적절한 감정의 함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대체로 이 주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5-19쪽

<1장 자유주의 역사의 문제 (2)>



칸트는 로크보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 더 깊이 탐구했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사회 내에서의 악행은 사회적 조건이 만든 단순한 가공품이 아니라, **타인을 이용하려는 경향성-타인을 그 자체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을 내포한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이러한 경향성을 **‘근본악‘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악한 경향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타자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그렇기에 칸트는 개인들이 각기 가진 **선한 경향성-타인을 선하게 대하는 태도- 을 강화하는 집단에 참여할 윤리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으며, 그럼으로써 악한 경향성을 물리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칸트가 보기에 올바른 형태의 **교회는 사회적 도덕성을 지탱하는 구조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교회에 가입할 윤리적 의무를 지닌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자유주의 국가 그 자체는 근본악과의 전쟁에 있어 **극도로 제한된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칸트는 **국가의 첫째 임무란 모든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국가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심리적 조치를 취하고자 할 때, 국가는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라는 고유의 책무에 손발이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껏해야 정부는 칸트가 선호했던 인간의 평등을 가르치고 도덕률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인간 종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에게 재정 보조금따위를 제공할 뿐이다.

  칸트는 자신의 근본악에 대한 관점의 주된 원천이기도 한 앞선 세대의 위대한 철학자 장자크 루소를 계승하면서도 그와 대결하고자 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훌륭한 사회란 자신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국가 안보와 같은 사회적 희생을 수반하는 일들을 촉구하기 위해 ‘시민 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시민 종교란 사회적 감정‘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 인간은 선량한 시민도 충실한 국민도 될 수 없다)

20-22쪽

이 책은 길고 두껍기 때문에 몇몇 중요한 문제의식을 미리 언급함으로써 오독을 방지하고 주요 논의가 누락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정치적 감정에 대한 설명은 **규범적인 맥락을 전제한다. 

군주정이나 파시스트 그리고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개념은 공공 문화 속에 감정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두고 각각의 원칙이 갖는 안정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 전략들은 각각의 특정한 목표에 의존한다.

  5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이 책의 논의는 일련의 정치적 원칙들을 명시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뉴딜의 목적,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의 정치적 개념들, 많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지향점과 더불어 (이보다 것이긴 하지만) 내가 다른 책에서 주장했던 바와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

47쪽

(계속)
 이러한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치 문화가 지향하는 목표들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규범적 논의를 설명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물으려는 것은 그러한 원리들이 감정을 통해 어떻게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양한 정치적 규범을 포용하는 사람들 또한- 비록 그들 스스로가 선호하는 규범들을 지지하기 위해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야겠지만- 이러한 설명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 ‘정치적 자유주의‘ 를 수용함으로써 논의의 기틀을 마련한다. 

5장에서 상세한 논의가 이뤄지겠지만, **규범적 이상은 특정한 *종교적 또는 *세속적 (롤스의 개념을 빌려) 포괄적 교리comprehensive doeurine‘를 정립하지 않는 *일련의 원리들이며, 이것은 최소한 잠정적으로 시민들에 의해 수용된 포괄적 교리들 중에서 (서로 평등한 시민으로서 상대를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시민의 ‘중첩적 합의‘를 통해 선정된 목적이 된다.

이러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장을 택함으로써 내 논의는 루소가 말한 ‘시민 종교‘와는 차이를 가지며, 오귀스트 콩트와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인간 종교‘와도 결별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시민적 감정을 현존하는 종교의 대체물로 설명했으며, 이러한 감정은 사회가폄하하거나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8쪽

 3. 감정들: 포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나는 동정심, 두려움, 시기심, 수치심과 같은 감정이 어떻게 이 규범적 개념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지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감정들은 군주정, 파시즘, 자유주의 체제 등 다양한 정치 문화의 유형 속에서도 작동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정들은 마치 다용도 공구키트와 같다. (혐오의 감정은 예외라 할 수 있다. 나는 ‘투사적 혐오 projective disgust는 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낭비와 부패에 대한 일차적 혐오는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 종 차원에서 내가 상상하는 자유주의 사회는 고유한 김정들의 집합을 활용한다. 자유주의적 관점이든 비자유주의적 관점이든 **동기 부여를 위해 *수치심을 활용하지만 *각자의 수치심은 분명 다른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탐욕과 이기심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피부색이나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는 얼굴을 붉힐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감정들은 또한 각기 다른 의미에서 일반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에 대한 개별적인 동정심은 좀더 넓은 의미를 가진 국가적 원리에 대한 동정적인 포용의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나의 이러한 기획은 롤스의 논의를 대체하기보디는 그를 보완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48-9쪽

4. 이상과 현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정치적 원칙과 제도들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을 개선하고 또 완성하기는 지속적인 작업이 요구될 텐데 나의 논의는 근본적으로 좋은 제도란 존재하며 또 분명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전제한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사회와 실재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미 달성된 정의보다는 이상적인 정의를 향한 열망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역사적 사례는 이상이 아닌 현실을 다루는 것이며,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규범적인 비전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은 심지어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것들을 옹호한 링컨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을 재건하며 이를 자신이 묘사했던 모습 그대로의 국가로 다시 그려냈기 때문이다.) 혹자는 내가 그리는 사회의 도래를 가로막는 비감정적인 요소들(예를 들면 경제적인 요인들)이 있지나 않을지 물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그리는 사회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이미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와 흡사한 형태가 언젠가 또 어디에선가 존재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런 의문은 여기에 제시된 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며 나는 그러한 장애물은 없다고 믿는다.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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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사회의 각성>


쌀, 밀가루, 육류, 달걀 같은 기본 식품은 여전히 배급권으로 구입했지만 수백 가지 상품의 가격이 자유롭게 정해졌다.

중국 정부는 당시 264달러에 불과했던 1인강 국민소득을 2000년까지 4배인 천 달러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목표는 초과 달성되었다.

‘개체호‘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이 탄생했다. 개체호는 주로 국가산업체제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청년들이었다. 대담한 자영업자들은 온갖 사업기회를 잘 살려 부를 거머쥐었고 도시의 풍경도 크게 변했다.

금기였던 전통이 다시 나타났다. 매장, 집안 간의 온약, 여아 살해, 성대한 장례 풍습과 함께 불교, 도교, 유교, 민간 신앙도 풍리지리나 조상숭배 등과 결합하여 다시금 등장했다.

145-50쪽

<‘86 최초의 학생운동>


- 후야오방에 대한 보수파의 공격이 거세지다

중국 두뇌들의 집합소라 할 수 있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정치학 전문가들도 미국식 연방제가 각 지방 및 신장, 티베트, 대만 같은 변경의 자치구를 통합하는 위대한 중국을 재건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모든 금기, 섹스와 돈과 정치

서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서구를 모든 자유와 가능성의 상징처럼 이상화했다. 학생들은 밤마다 모든 금기를, 섹스와 돈과 정체를 이야기했다. 대학생들은 덩샤오핑에게 ‘작은 병‘이라는 장난기 어린 별명을 붙여주었다.

학교 교육은 한참 괴리가 컸다. 아직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역사학이 주를 이루었고 매주 정치교육도 실시되고 있었다.

155-6쪽

<‘87 보수파, 부활하다>


- 후야오방의 사임과 단속의 고삐

학생 시위는 엄청난 여파를 불러왔다. 1월 16일에 후야오방이 사임했다. 이 소식은 단두대의 칼날처럼 지식인들을 내리쳤다.

덩은 보수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첫째가는 후계자를 경제개혁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당 내의 다른 조직들도 이처럼 개혁파와 보수파의 균형을 추구했다.

157-60쪽


<‘88 개혁의 여파, 심각한 인플레이션>


- 생필품 보조금은 더 이상 없다

생필품 보조금이 중단되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농민들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도시를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단농업생산제가 해체된 후 일거리가 없어진 농민들도 많았다.

농촌 젊은이들은 대도시에 대한 선망을 키웠고 1986년부터 이농 현상이 두드러졌다. 사회 부패도 심해졌다. 이때부터는 상당한 액수의돈, 해외여행 등을 제시해야만 했다고 사업가들은 증언한다. 고위 지도자들의 측근은 이런 저런 스캔들에 휩싸였다.


- 개혁파 자오쯔양의 실각, 보수파 리펑의 부상

160-3쪽

<‘89 텐안먼의 허상과 트라우마>


1989년은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 개방이 잠시 멈추고, 중국 사회에 의미심장한 전환점이 되는 때였다. 텐안먼 사태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도 텐안문 사태는 금기시되는 주제다. 이 트라우마는 1960년대에 태어난 이들의 정체성의 일부이자, 한 시대의 종말, 즉 적극적인 정치활동의 시대가 마감되었음을 알리며, 중국 사회의 행동 양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4월 15일에 예기치 않게 후야오방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거는 텐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후야오방의 추도식이 있었던 4월 24일에는 50만 명이 텐안먼 광장에 모였다. 5월 1일에 모인 시위대는 2백만 명이 넘었다.

개체호들은 ‘비호‘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텐안먼 광장에서 인스턴트 라면과 음료를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았다. 베이징 시민의 75퍼센트가 단식농성을 지지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자오쯔양은 평양에 가서 힘겹게 의사를 타진하는 동안, 리펑은 덩샤오핑을 찾아갔고 <런민르바오>에는 이 운동을 ‘반혁명적‘이라고 규탄하는 사설이 실리게 된다. 민주화 운동을 반혁명적 운동으로 규정한 이상, 리펑은 강경 수단을 동원할 명분이 생긴 셈이다.

중국의 공식 발표는 7백 명이라고 하나 인권 단체들이 발표한 바로는 삼아자는 2천 명, 부상자는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텐안먼 사태는 ‘부랑배와 반혁명분자‘ 몇몇이 일으킨 소요쯤으로 치부하며 역사를 조작하려고 했다.

서방 국가 대사들은 어려움에 처한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비자 발급을 도와주었다. 약 2년간 카나리아 작전으로 불린 이 사건은 외국 기자, 중국 학자, 외교관 등이 모여서 중국 경찰과 실랑이를 벌여가며 텐안먼 사태에 관련된 지식인, 대학생, 민주화 운동에 동조하는 인물을 수천 명이나 해외로 빼돌렸다.

6월 말에 유럽공동체 가입 국가들은 중국의 무력 진압을 비난하고 대중국 무기 수출 금지 조치를 가결했다. 미국의 금지 조치는 첨단 기술 분야도 포함했다. 공식 방문도 중단되었다.


170-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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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십대는 사회적 약자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 시대의 희생자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십대가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또 누구는 아픔을 겪는 이십대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젊은 사회학자 오찬호는 대학에서 학생들과 직접 만나며 이런 생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십대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회구조로 인한 불이익을 마치 자기 책임인 양 수긍하면서, 자신들도 경쟁의 패자들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차별하고 멸시하는 매몰찬 모습이었다. 

오찬호는 차별과 배제의 법칙을 내면화하여 새로운 ‘윤리‘ 를 신봉하게 된 이십대들의 현재를 보여주면서, 무엇이이들을 이렇게 내몰았는지 탐구한다. 이것은 이 암울한 시대에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들의 슬픈 몽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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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허가된 자유>


6월 대도시에서 처음으로 자유 시장이 허가를 받았다. 시장은 즉시 크게 성황을 이루었고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출 장소가 되었다.

국유 기업은 좀 더 자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엄격하게 추진되던 5개년 계획은 약간 느슨해졌다.

경제 개혁이 추진되는 동안 자오쯔양은 행정 개혁을 통해 탈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과거에는 베이징의 통제를 받았던 지방 부처들이 지방 정부의 소관으로 넘어갔다.

**중국을 다시 일으키고 19세기의 치욕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홍콩 반환은 중대한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1984년 12월 19일에 마거릿 대처와 자오쯔양이 체결한 반환 협정은 덩샤오핑의 새로운 구상, 즉 ‘**일국양제‘를 바탕으로 했다.

영국 여왕은 중국이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와 영국인들이 설계한 행정 및 사법조직, 자유 언론, 태환화폐(홍콩 달러)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1997년 7월 1일자로 홍콩에 대한 권리를 명백히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대륙의 공산주의 체제와 공존시키기로 한 것이다.

1980년대 말까지 매년 홍콩주민 6만 5천 명 이상이 홍콩을 떠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홍콩 반환과 아시아 금융위기가 지나가자 홍콩의 자본주의를 대륙과 공존시키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를 확인하고 다시 돌아왔다.

1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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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마오쩌둥주의 정체성은 여전히 지킨다>


덩샤오핑과 새 집권층은 4인방을 공개재판에 회부함으로써 1980년대부터 중국의 정치적 수단이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덩은 서방 국가들에게 중국이 법적 절차를 존중한다는 점과 개방에 대한 제스처를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4인방 재판이 공산주의 체제를 구원했다고 평가한다. 공산주의 전체의 치욕을 장칭이 이끄는 극좌파에 죄다 떠넘김으로써 마오 시대의 실정은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약진운동은 물론 실패로 간주되었지만 그 실패의 책임은 자연재해로 돌렸다. 위대한 키잡이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그렇게 보전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적법성도 유지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지금까지도 공개적으로 마오를 비판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오는 스탈린이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했었다. 덩은 마오쩌둥의 행적도 대략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다분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덩샤오핑은 경제 현대화를 신속하게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보수파가 변화의 발목을 잡고 있었따. 1980년대에 **덩은 몇 번이나 타협을 하고, 개혁의 고삐를 늦추고, 개방에 역행하는 이데올로기 선전을 해야만 했다. 그로써 사회에서 가장 개방적인 부류, 즉 청년, 지식인, 개체호라고 불리는 자영업자는 모진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들이 ‘작은 키잡이‘에게 걸었던 희망은 가차 없이 부서질 것이다....

124-129쪽

<‘82 시야가 열리다>


재외중국인들은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뿌리 뽑으려 했던 종교적 전통이나 조상 숭배 풍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이나 외국의 생활방식을 접하면서 **중국인들은 공산주의 모델이 좋은 대안이 아니었으며 자국의 발전이 너무 늦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태어난 **청년 세대는 서구에 대한 신화를 품기에 이르렀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시를 쓰고 싶어 했다. 모두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인정받기 원했다.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시로 표현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새로운 유희가 되었다.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감정과 신념을 감추는 법만 배웠던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131-135쪽

<‘83 이데올로기는 포기할 수 없다>


수만 명의 사회부적응자들이 체포당해 노동교양소로 끌려갔다. 훗날 덩샤오핑은 "닭 몇 마리의 목을 따야 원숭이들을 겁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당시 정치 흐름을 보면 이런 처사가 설명된다. 덩은 보수파에게 다시 공격을 당하면서 그들에게 경고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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