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마오쩌둥주의 정체성은 여전히 지킨다>
덩샤오핑과 새 집권층은 4인방을 공개재판에 회부함으로써 1980년대부터 중국의 정치적 수단이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덩은 서방 국가들에게 중국이 법적 절차를 존중한다는 점과 개방에 대한 제스처를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4인방 재판이 공산주의 체제를 구원했다고 평가한다. 공산주의 전체의 치욕을 장칭이 이끄는 극좌파에 죄다 떠넘김으로써 마오 시대의 실정은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약진운동은 물론 실패로 간주되었지만 그 실패의 책임은 자연재해로 돌렸다. 위대한 키잡이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그렇게 보전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적법성도 유지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지금까지도 공개적으로 마오를 비판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오는 스탈린이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했었다. 덩은 마오쩌둥의 행적도 대략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다분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덩샤오핑은 경제 현대화를 신속하게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보수파가 변화의 발목을 잡고 있었따. 1980년대에 **덩은 몇 번이나 타협을 하고, 개혁의 고삐를 늦추고, 개방에 역행하는 이데올로기 선전을 해야만 했다. 그로써 사회에서 가장 개방적인 부류, 즉 청년, 지식인, 개체호라고 불리는 자영업자는 모진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들이 ‘작은 키잡이‘에게 걸었던 희망은 가차 없이 부서질 것이다....
124-129쪽
<‘82 시야가 열리다>
재외중국인들은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뿌리 뽑으려 했던 종교적 전통이나 조상 숭배 풍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이나 외국의 생활방식을 접하면서 **중국인들은 공산주의 모델이 좋은 대안이 아니었으며 자국의 발전이 너무 늦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태어난 **청년 세대는 서구에 대한 신화를 품기에 이르렀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시를 쓰고 싶어 했다. 모두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인정받기 원했다.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시로 표현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새로운 유희가 되었다.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감정과 신념을 감추는 법만 배웠던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131-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