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까당스> 창녀에 대한 동정은 데까당과 낭만파에 공통된 것으로, 이 경우에도 보들레르가 매개 역할을 맡는데, 억압되고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동일한 애정관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이 동정은 물론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사회와 부르주아 가정에 기초한 도덕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다. 창녀는 뿌리 뽑힌 자, 사회에서 쫓겨난 자이며, 사랑의 제도적/부르주아적 형태에 반항할 뿐 아니라 사랑의 ‘자연적인‘ 정신적 형태에 대해서도 반항하는 반항아들이다. 이들은 감정의 도덕적 조직을 파괴할뿐더러 감정의 근거 자체를 파괴한다. **창녀는 격정의 와중에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 창녀에 대해 보이는 데까당스 예술가들의 이해심은 이러한 감정과 운명의 공통성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몸을 팔고 어떻게 자기들의 가장 신성한 감정을 희생하며 또 얼마나 값싸게 자기들의 비밀을 팔아넘기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287쪽
역사는 세상의 길에서도 흐르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128쪽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단편 <그 남자네 집>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선생은 정확히 네문장을 더 적는다."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그리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76쪽)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 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 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 131쪽
<박완서, 그 남자네 집 2>"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 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는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 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79~80쪽) 가끔 젊은이들은 노인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재현 권력의 통쾌한 역전이 있다. 132-3쪽
<카뮈, 이방인>캐릭터 박물관 특실편 우리는 소설의 3요소를 ‘주제/구성/문체‘라고 배운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캐릭터 박물관이라는 것이 세워진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 멜빌의 ‘바틀비‘, 그리고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하나의 캐릭터가 소설의 거의 전부다.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이 지독한 문장은 카무의 다른 글에도 있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다. 138-41쪽
<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언어의 이주민을 위하여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심지어는 시베리아 열차도 영혼이 나는 것보다 빨리 간다. 나는 처음 유럽에 올때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오면서 내 영혼을 잃어버렸다." (26-7쪽)154-6쪽
<소설의 인식적 가치>은희경, 태연한 인생 문학작품에는 몇 가지 가치가 있는데, 이를 인식적/미학적/정서적 가치로 명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대에 사람들은 소설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그 시대가 저물면 그 반작용처럼 소설의 ‘미학‘적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때가 온다. 그런가 하면 요즘처럼 멘토/공감/힐링 등의 어휘가 유행하는 시절에는 소설도 그런 ‘정서‘적 맥락에서 많이 읽힌다. 이런 식으로 그 상대적 우열 관계가 변하며 소설의 특정 가치는 주목되거나 간과되거나 한다. (...)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전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어휘를 각자 달리 이해하고 살아내는 인간(삶)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주기 위해 쓰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인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의 한 사례다. 다시 쿤데라를 인용하자면, **소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실존의 어떤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장소다. 소설은 실험실이고 작가는 실험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실험 보고서의 인식적 가치다. 은희경의 이번 보고서는 예리하고 우아하다. 166-9쪽
<제 3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심의 환희에 젖은 채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다. 구름 때문이었겠지만 달빛이 흐려져 있었다. 옆을 더듬었으나 여자의 몸은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없었다. **내 욕망의 끈을 풀게 하고, 내 갈증을 적셔 준 당사자의 부재는, 돌연 **그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에 눈을 뜨게 했다. 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짐승이란 무릇, 교미를 끝내면 쓸쓸해지는 법)이라던가.....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가를 깨달았다. 적지 않게 세월이 흘렀어도 내가 그때 지은 허물에 가슴을 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 한편 나는 그날 밤 느꼈던 환희를 잊을 수 없고, 선하고 아름다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도 죄악일 것이다. 즉, 그날 밤 두 죄인 사이에서는 그 자체로서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나이가 들어서 내 청춘은 참 아름답고 선했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앞에 임박한 죽음에 눈을 돌려야 마땅한 때에 말이다. 당시의 나는 젊었고 따라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445-6쪽
고통은 분노를 낳는다. 그리고 부유한 계급이 이성을 잃거나 잠든 사이에, 그것이 언제나 눈을 감고 있는 것인데, 불행한 계급의 증오심은 한쪽 구석에서 몽상하고 있는 우울하거나 못된 어떤 정신에 횃불을 켜 주고,사회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증오가 행하는 조사, 그것은 무서운 것이다!301-5쪽
전설이란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전설은 다시금 수수께끼 가운데서 끝나야 한다. 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