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세상의 길에서도 흐르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128쪽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단편 <그 남자네 집>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선생은 정확히 네문장을 더 적는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그리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76쪽)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 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 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
131쪽
<박완서, 그 남자네 집 2>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 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는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 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79~80쪽)
가끔 젊은이들은 노인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재현 권력의 통쾌한 역전이 있다.
132-3쪽
<카뮈, 이방인> 캐릭터 박물관 특실편
우리는 소설의 3요소를 ‘주제/구성/문체‘라고 배운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캐릭터 박물관이라는 것이 세워진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 멜빌의 ‘바틀비‘, 그리고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하나의 캐릭터가 소설의 거의 전부다.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이 지독한 문장은 카무의 다른 글에도 있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다.
138-41쪽
<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언어의 이주민을 위하여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심지어는 시베리아 열차도 영혼이 나는 것보다 빨리 간다. 나는 처음 유럽에 올때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오면서 내 영혼을 잃어버렸다." (26-7쪽)
154-6쪽
<소설의 인식적 가치> 은희경, 태연한 인생
문학작품에는 몇 가지 가치가 있는데, 이를 인식적/미학적/정서적 가치로 명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대에 사람들은 소설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그 시대가 저물면 그 반작용처럼 소설의 ‘미학‘적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때가 온다. 그런가 하면 요즘처럼 멘토/공감/힐링 등의 어휘가 유행하는 시절에는 소설도 그런 ‘정서‘적 맥락에서 많이 읽힌다. 이런 식으로 그 상대적 우열 관계가 변하며 소설의 특정 가치는 주목되거나 간과되거나 한다.
(...)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전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어휘를 각자 달리 이해하고 살아내는 인간(삶)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주기 위해 쓰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인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의 한 사례다.
다시 쿤데라를 인용하자면, **소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실존의 어떤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장소다. 소설은 실험실이고 작가는 실험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실험 보고서의 인식적 가치다. 은희경의 이번 보고서는 예리하고 우아하다.
16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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