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감에 관하여>


**‘취미 taste에 관한 한 논쟁할 수 없다‘는 격언은 *고대 로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로마시대 이후 우리는 커피나 와인에 대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 상이한 취향들 사이에 *우열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안다.

오늘날 ‘어느 것이 좋은 커피인가‘와 같은 물음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주관적 기호의 문제로 치부된다.

그러면 ‘미‘는 어떨까? **오늘날에는 미에 대한 취향도 다양해져 거의 **기호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17세기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미에는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 믿었다.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은 무엇이 아름다운 예술인지 판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을 자기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 기준 중 하나는 **회화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형태(드로잉)‘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이외의 지역은 회하에서 형태보다 **색채를 중시하는 *바로크 취향, 가령 루벤스의 화풍이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위배되는 이 흐름을 몰취향으로 간주했다.


/ 주관적 보편타당성

**프랑스 합리론에 취하면 미적 독단론에 빠지고, 영국 경험론을 취하면 **미적 회의론에 빠진다. 칸트는 두 입장을 적절히 종합함으로써 딜레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취향이 주관적이라는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나, 동시에 ‘미적 판단은 보편타당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미적 판단은 **‘주관적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관적인 판단이 동시에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 형용모순을 섦여하기 위해 칸트는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는 **‘미적 무관심성‘이다. 칸트에 따르면 사람마다 미적 판단이 달라지는 것은 거기에 불순한 요인들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런 예술 외적인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판단을 내린다면 모든 이의 미적 파난이 일치하리라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공통감‘,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의 인식 기관이 선험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식 기관은 동일하기에, 비록 개인의 쾌/불쾌의 감정에 따른 주관적 판단이라 할지라도 그 판단이 공통감에 근거한 것이라면 동시에 객관적 필연성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미적 판단을 내릴 때에 온갖 사적 이해와 관심에 얽매인 경험적 자아에서 벗어나, 공통감에 따라 판단하는 이상적 자아의 위치로 올라서야 한다는 얘기다.


1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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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1:8-10


그러나 너,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너는 야곱이다. 내가 고르고 고른 자다.

나의 좋은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나는 세상 전역에서 너를 끌어모으고,
당의 어둔 구석에서 너를 부러내며 말했다.

"너는 나의 종, 내 옆에서 나를 섬기는 종이다.
내가 너를 뽑았으며, 너를 내친 적이 없다.
겁먹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내가 네게 힘을 줄 것이다.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꽉 붙잡아 주리라.



사 41:11-16


두고 보아라. 너를 푸대접했던 자들,
천대받게 될 것이다.
실패자가 될 것이다.
너를 대적하던 자들,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보여줄 것 없는 신세가 될 것이다.
기억하는 자 하나 없으리라.

그렇다. 나 너의 하나님이,
너를 꽉 붙잡고, 결코 놓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말한다. ‘겁먹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

야곱아, 네가 하찮은 벌레처럼 느껴지느냐?
여려할 것 없다.

이스라엘라, 네가 보잘것없는 곤충처럼 느껴지느냐?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나 하나님이 장담한다.

나는 값을 치르고 너를 다시 산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다.

내가 너를 벌레에서 써레가 되게,
곤충에서 철이 되게 할 것이다.

너를 날카로운 날을 가진 써레가 되어 산들을 갈아 없애고,
굳은 언덕들을 옥토 밭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너를 거친 땅을 온갖 풍상에,
햇빛과 바람과 비에, 시달리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너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안에서
자신감 넘치고 원기 왕성하며,
기상이 원대해지리라!

사 41:17-20


가난하고 집 없는 자들이 간절히 물을 찾는다.
갈증으로 혀가 타지만 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있다. 그들을 위해 내가 있다.

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그들을 계속 목마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메말랐던 언덕에서 강물이 터지고,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터져 나게 할 것이다.

바싹 말랐던 황무지를 시원한 못으로,
메마른 사막을 물이 철철 넘쳐흐르는 시내로 바꿀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없던 황야에 붉은 백향목과
아카시아나무, 도금양나무, 올리브나무를 심을 것이다.


사 42:1


나의 종을 유심히 보아라.
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 종이다.
그는 내가 택한 사람이며,
나는 그가 더없이 마음에 든다.

나는 그를 온통 내 영으로, 내 생명으로 감싸 주었다.

그가 민족들 사이에서 모든 일을 바라잡을 것이다.
그는 일장연설이나 화려한 행사로
자기 일을 과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치고 상한 이들을 무시하거나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으며,
분명하고 단호하게 모든 일을 바로잡아 줄 것이다.

그는 자기 일을 마칠 때까지 지쳐 주저앉는 법이 없고,
땅 위의 모든 일을 바로잡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먼 바다 섬들까지,
그의 가르침을 고대할 것이다.


사 42:5-9


우주를 창조하시고, 하늘을 펴셨으며,
땅과 거기 자라는 모든 것을 펼치신 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 불어 넣어,
그 생명으로 그들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나는 하나님이다.
의롭게 살라고 내가 너를 불렀다.
내가 너를 책임지고 안전히 지켰다.
너를 내 백성 가운데 세워 그들과 나를 잇고,
너로 하여금 민족들을 비추는 등대로 삼아,
밝고 탁 트인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시작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주며,
어두운 감방을 텅텅 비우는 일을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남에게 빌려 주지 않으며,
우상 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기억하여라.
예전에 예고했던 심판들,
모두 이루어졌다.

이제 나는 새로운 구원을 예고한다.
그 일이 엄습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일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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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 20-26

어찌하여 하나님은 비참한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쓰디쓴 인생을 사는 이들을 살려 두시는가?
이들은 죽기를 무엇보다 바라건만 죽지 못하고
죽음보다 나은 것을 상상하지 못하며
죽어서 묻힐 날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손꼽아 긷다리지 않는가?
부질없는 인생, 삶의 의미를 찾을 길을
하나님이 모두 막으셨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저녁식사로 빵 대신 신음만 삼키다
식탁을 물리고 고통을 토해 낸다.
내가 가장 두려우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가장 무서워하던 일이 벌어졌다.
쉼이 산산조각 나고, 평안이 깨졌다.
내게 더 이상 안식이 없다.
죽음이 내 삶을 덮쳤구나



757-8쪽

욥기 6: 8-13


내가 오직 원하는 것은 한 가지 기도 응답뿐.
내 마지막 간구를 들어주시는 것.
하나님이 나를 밟아 주셨으면. 벌레처럼 짓이겨
영원히 끝장내 주셨으면.
그러면 궁지에 몰린 나머지 한계선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나마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텐데,
내게 무슨 힘이 있어 희망을 붙들겠는가?
무슨 미래가 있어 계속 살아가겠는가?
내 심장은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아나?
내가 무쇠인간인가?
내가 자력으로 지금 상황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닐세. 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네!



욥기 7:7-10


하나님, 내 생명이 한낱 입김에 불과한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내 눈은 더 이상 좋은 일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눈이 더 이상 내게 미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살피셔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증발한 구름은 영원히 사라지고
무덤에 들어간 자는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다시 와서 가족을 찾아갈 수 없고
차 한잔 하러 친구를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욥기 7: 14


이런 생활을 계속해서 견디느니
차라리 이불보 덮어쓰고 숨 막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더 이상 살기 싫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살고 싶겠습니까?

나를 좀 내버려 두십시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낱 연기에 불과합니다.

욥 9: 7-20


그 분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큰일들을 행하시고
그분의 기적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어.

하나님이 내 앞으로 바로 지나가신다 해도
나는 그분을 볼 수 없네.

은밀하지만 분명히 일하시는데도 나는 눈치채지 못한다네.

하나님이 자네들 소유를 몽땅 털어 가신다 한들
누가 그분을 막을 수 있겠나?

누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하고 항의할 수 있겠나?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시니
용이 낳은 괴물들도 그분 앞에서는 꼼짝 못하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분과 논쟁을 벌이며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변론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내가 결백하다 해도 입증할 수 없느니
고작해야 재판관의 자비를 빌 수 있을 뿐이야.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이 친히 대답하시면
그때 비로소 나는 그분이 내 말을 들으셨다고 믿겠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하나님이 나를 여기저기 치시고
까닭 없이 마구 때려 멍들게 하신다네.

그분은 내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으시고
괴로움에 괴로움만 더하시지.

힘으로 결판을 보려 하면 그분이 강하시니 승부는 뻔하네!
재판에서 정의를 가려 보려고 한들, 누가 감히 그분을 소환하겠는가?
내가 결백하다 해도,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날 유죄로 보이게 만들 거네.

내가 흠이 없다 해도, 무죄를 항변할수록 더 나쁜 놈으로 보일 거야.



욥 10:8-10


주께서 나를 질그릇처럼 손수 빚으셨는데
이제는 산산조각 내려 하십니까?

주께서 진흙으로 나를 얼마나 아름답게 빚으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제 나를 진흙덩이로 돌리시렵니까?


욥 10:18-22

이러실 거면 왜 나를 세상에 내놓으셨습니까?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사산아로 태어나 숨 한 번 못 쉬고
그대로 당에 묻혔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 내가 죽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죽어서 묻히기 전에,
관에 들어가 땅속에 봉인되고
죽은 자들의 땅으로 영원히 추방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기 전에,
**노를 멈추시고 내가 미소라도 한번 짓도록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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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독일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끝난 것이고,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제단과 화덕 앞에서의 **천상의 기도가 반박당한 후에 그것의 오류의 *세속적 실존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천상의 환상적 현실에서 초인을 찾으려 했고, 거기서 자기 자신의 반영(反影)만을 발견했을 뿐인 인간은, 자신의 참된 현실을 찾고 또 찾아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가상, 즉 비인간만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종교적 비판의 토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는 않는다. 더욱이 종교는 아직 자기 자신을 획득하지 못했거나,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잃어버린 인간의 자기의식이고 자기 감정이다. 그런데 인간, 그는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7쪽

2.

인간, 그는 인간의 세계이고 국가이며, 사회적 결사체이다. 이 국가와 이 시회적 결사체는 전도된 세계 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세계의식을 낳는다. 종교는 이러한 세계의 일반이론이요, 이러한 세계의 백과사전적 개요이며, 통속적인 형태로된 이러한 세계의 논리학이고, 이러한 세계의 유심론의 명예의 문제이며, 이러한 세계의 열광이고,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이며, 이러한 세계의 장엄한 보완이자 이러한 세계의 위안과 정당회의 일반적 근거이다.

 인간 본질이 참된 현실성을 전혀 얻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저 세계, 즉 종교를 자신의 정신적 향료로 삼는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비참함은 현실적인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적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탄식이며,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고, 
또한 정신 없는 상대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8쪽

3.


 비판은 사슬에 매여 있는 거짓 꽃들을 뜯어내버렸는데, 이는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없는 사슬을 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벗어던져 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갖기 위해서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을 깨우치는데, 이로써 인간은 생각하고 행위하고 자신의 현실을 형성하며, 각성하고 분별 있는 인간이 되고, 또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인간의 주위를 맴도는 **환상적 태양일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이 사라진 뒤에 ***차안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과제이다. ***인간의 자기소외의 신성한 형태가 폭로된 다음,
신성하지 않은 형태들 속에 있는 자기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에 봉사하는 철학의 과제이다. 

그런 까닭에 ***천상에 대한 비판은 지상에 대한 비판으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법에 대한 비판으로,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된다.

아래서 상세하게 논의하는 것- 이러한 작업에 대한 기고 -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독일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원본이 아닌 그것의 복제본인 독일의 국가 철학 및 법 철학과 관련된다.

 유일하게 적절한 방식, 즉 부정적인 방식으로 시작한다 해도, 사람들이 독일의 현상태 그 자체에서 시작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여전히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현재를 부정하는 것조차 이미 현대 국민들의 역사의 헛간에서는 먼지투성이의 사실일 뿐이다. 

내가 분바른 변발을 부정한다면, 나는 여전히 분을 바르지 않은 변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1843년경의 독일 상황을 부정한다면, 프랑스식으로 시간을 계산해서 나는 1789년에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현재의 초점에는 더 더욱 있지 않다.


9쪽

 물론 독일의 역사는 역사의 무대에서 이전의 어느 국민도 이룩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운동을 해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대 국민국가들의 혁명을 공유하지 않고도 그들의 복고를 공유했다. 

첫째, 다른 국민들이 혁명을 감행했기 때문에, 
둘째, 다른 국민들이 반혁명을 겪었기 때문에,
즉 한편으로 우리 영주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우리 영주들이 전혀 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로 돌아갔다. 우리들, 앞장선 우리의 목자들은 항상 자유의 장례식 날에만 자유로운 사회에 있었다.

과거의 비열함을 통해서 오늘의 비열함을 정당화하려는 학파, 가죽 채찍은 오래된 것이고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며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가죽 채찍에 반항하면서 농노들이 부르짖는 절규를 반란이라고 선언하는 학파, 이스라엘의 신이 그의 종 모세에게 그러했듯이 역사 또한 그들에게만 후천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학파, 이들은 곧 역사법학파인데, 이 학파는 자신들이 독일사의 발명품이 아니었더라면, 자신들이 독일사를 발명했을 것이다. 

샤일록,
그러나 충실한 종으로서의 샤일록인 역사법학파는 인민의 가슴에서 도려낸 1파운드의 살코기 각각에 대해 자기 학파의 증서, 자기 학파의 역사적 증서, 자기 학파의 기독교적 게르만적 증거를 걸고 맹세하였다.


10쪽

5.


  이에 반해 선량한 광신자들, 혈통으로 보면 독일 토박이고 지적 반성의 측면에서 보면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은, 우리의 자유의 역사를 우리 역사의 저 너머에 있는 튜튼 족의 원시림 속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의 역사가 원시림 속에서만 발견된다면, 우리의 자유의 역사와 멧돼지의 자유의 역사를 구별해 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널리 알려진 말이 있다. 숲을 향해 외친것은 그대로 숲 바깥으로 울려 나온다. 그렇다면 튜튼 족의 원시림에 평화를!

독일의 상황에 대해 전쟁을! 물론이다! 독일의 상황은 역사의 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고, 모든 비판 수준 아래에 있으나 여전히 비판의 대상인데, 이는 수준 이하의 인간성을 가진 범죄자가 여전히 처형집행인의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독일 상황과의 투쟁에서 비판은 두뇌의 열정이 아니라 열정의 두뇌이다. 비판은 해부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 반박하고자 하는 적이 아니라 절멸시키려 하는 적이다. 독일 상황의 정신은 이미 반박되어 있기때문이다. 

본래 독일의 상황은 결코 사유할 만한 대상이 못되며, 오히려 경멸할 만한 것인 동시에 이미 경멸받고 있는 현실형태들이다.

비판은 그 자체로 이 대상을 스스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데, 이는 비판이 이 대상을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비판은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수단으로만 나타난다.

**비판의 본질적인 정서는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인 작업은 고발이다.

11쪽

6.


온갖 비참함을 보존하면서 목숨을 잇고 있으며, 비참한 통치만이 수행되는 통치체제의 틀에 둘러싸인, 모든 사회적 영역들 간의 숨 막힐 듯한 압박, 실행되지 않는 일반적인 침체, 시인되면서도 작 못 인정되고 있는 편협함에 대한 서술이 필요하다.

 이 얼마나 볼만한 광경인가! 사소한 반감, 악의, 조잡한 평범함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다양한 종족들, 서로 믿을 수 없고 의심나는 태도 때문에 서로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 아무런 차이 없이 영주들에 의해 인가된 현실형태로 취급받고 있는 아주 다양한 종족들로 끝없이 분열되는 사회: 

그리고 이것조차, 즉 그들이 지배받고, 통치되고, 소유되는 것조차 하늘이 용인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시인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저 지배자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그 위대함은 그 숫자에 반비례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비판은 육박전을 치르고 있는 비판이며, 이 육박전에서는 상대가 고상한지 대등한지 흥미로운 상대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때려 눕히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인에게는 어느 한순간도 자기기만과 체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적인 억압에 억압의 의식을 덧붙임으로써 현실적인 억압을 더욱 억압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치욕을 공개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치욕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12쪽


8.


독일 사회의 모든 영역은 독일 사회의 치부로 묘사되어야만 하며, 이 화석화된 상태에 그들 고유의 멜로디를 노래하여 들려줌으로써 이 상태가 춤추게 해야만 한다. 독일 민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려면 그 민족이 자기 앞에서 경악하게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일 민족의 피할 수 없는 욕구가 충족되는데, 모든 민족들의 욕구는 그 자체로 욕구 충족의 궁극적 근거이다.

그리고 현대의 국민들에게조차 독일 현상태의 편협한 내용에 대한 이 투쟁은 무관심한 것이 아닌데, 독일의 현상태는 구체제의 공식적인 완성이며, 구체제는 현대 국가의 숨겨진 결함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치적 현재에 대한 투쟁은 현대 국가의 과거에 대한 투쟁이며, 현대 국가들은 이 과거의 추억 때문에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현대 국가가 비극으로 체험했던 구체제가 독일식 유령이 되어 희극으로상연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현대 국가의 입장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구체제가 세계에서 앞서 있던 권력이었고, 그에 반해 자유가 개인적 환상이었던 한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구체제가 자신의 정당함을 믿었고 또 믿으려고 했던 한에서, 구체제의 역사는 비극적이었다. 

구체제가 현전하는 세계질서로서 막 생겨나고 있던 하나의 세계와 싸우는 동안 세계사적 오류는 구체제의 편에 있었으며, 그것은결코 개인적인 오류가 아니었다. 따라서 구체제의 몰락은 비극적이었다.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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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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