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5>



안중근은 처음에 무능한 조선을 좋은 나라로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서 천주교 신부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곧 일본은 물론 **선교사를 비롯한 서양인들도 결국 조선을 **노예로 부리려는 새로운 상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은 일본의 노예가 되고
영어를 배우는 사람은 영국의 노예가 된다.
내가 만일 프랑스어를 배우면 프랑스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그만둔 것이다.˝
/ 나카노 야스오, <동양평화의 사도 안중근>, 하소, 1995, 122~3쪽


1920년 이완용 등 조선의 대신들은 일본 측의 한일합병 요구에 ˝**나라는 망해도 나는 부귀하고 편안하다˝며 도장을 찍고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서구식 개화보다는 자주독립을 우선시했던 애국지사와 의병장들은 한일병합 후 *만주로 망명했고, 중화문명과 유교 사상을 철석같이 믿었던 선비들은 자결을 하거나 *은둔했다. 백성의 참정권 보장 등 서구식 개화는 필요하지만 일본의 지배를 거부했던 이승만 등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28-9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7>


구한말 조선을 여행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조선을
"관리들의 악행만 없어진다면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
생업에서 생긴 이익을 보호해줄 수 있다면 
행복하게 근면하게 될 만족, 
행정적인 계기만 보여주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할 민족, 
미개발된 자원을 개발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민족, 
그러나 잠재된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못한 민족"
으로 기록했다. 

같은 시기에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인 샤를 바라와 샤이에 롱은 "조선인은 재치 있 고 호기심 많으며, 서로 필요할 때는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상부상조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조선은 시대의 히름에 합류하지 못했고,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구한말 조선인들의 *대응을 단순화시켜보자. 

첫째, *개화를 시대적 대세로 인식하고 *외세의 지배를 받더라도 개화의 길을 가자던 *윤치호와 일진회 등은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협조했다.

 둘째, 개화는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그것을 위해 *독립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민족주의자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안중근 같은 *급진론자는 저항을 하다 죽음을 맞았고, *온건론자는 일본의 지배를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 

셋째, 개화는 곧 일본 및 외세의 지배라는 것을 알아채고, 백성들의 권리 보장(민권)과 외세의 배격을 추구했던 동학농민군은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게 제참하게 진압당했다. 물론 개화에 반대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유교적 전통과 신분질서를 지키려던 양반 출신 의병과 유생들은 동학농민군과 시상은 달랐지만 반외세의 입장은 동일했다.


29-30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1>



/ 나라가 망해도 슬퍼하지 않는 백성들 

한일 강제병합으로 사라진 것은 단지 조선이라는 전근대 국가만이 아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국가를 지탱해온 **성리학도 함께 무너졌 다. 

유교문명의 적자임을 자랑한 조선이 그간 변방이라고 무시했으나 서양문명을 이식받은 일본 제국주의 앞에 무너진 것이다.

양반 관리들의 횡포에 신음하던 **다수의 조선 백성은 나라가 없어 졌는데도 *슬퍼하지 않있다. 

한일병합 14년 전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말한 "국민들이 권리의 중대함을 모르면 다른 나라의 침범을 보고도 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오히려 조선백성에게는 나라 잃은 슬픔보다 학정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을지 모른다. 일본이 지배하는 ‘개화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양반처럼 살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을 수도 있다.

1909년에 일본의 사주를 받아 2대 조선통감 소네 아나스케에게「합방청원서를 제출한 일진회는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하층민과 중인 등 소외받던 세력 중심의 *10만 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단체였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이 열어줄 개화 세상에 희망을 걸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당시 **시대적 요구의 하나였던 *신분 철폐를 단행했고, *교육 기회도 넓히고 *도로와 철도도 깔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보며 윤치호 같은 급진 개화파뿐만 아니라 신문 해방과 교육 기회를 열망했던 다수의 중인, 그리고 ‘쌍놈‘으로전대받던 평민들도 다른 이유로 일제의 지배를 환영했다.

백성들이 일제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정도를 넘어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까지 하는 것을 본 유학자 김창숙은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따져보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서 망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조선 후기의 성리학은 **백성들을 이끄는 **사상이나 가치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모든 학문이나 사상을 배격하고, 오로지 성리학만 금과옥조로 여긴 **지배층의 경직성과 폐쇄성도 심각한 문제였거니와, **합리적 사고와 판단, 과학적 분석력, 인간의 자유와 잠재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교 자체의 한계도 있었다.

33-35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2>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청원한 일진회 등을 제외하면 생각 있는 조선인, 특히 지식인들에게 일본의 지배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일본은 조선인의 자발적 충성과 복종을 포기하고 일체의 자치도 허용하지 않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구사하는 한편, *순종적인 백성臣民으로 길들이는 우민화 정책을 폈다.

초기 타이완에서도 그러했지만, 조선의 총독은 군인 출신으로 입법·사법·행정권을 포함하여 육해공군의 통수권까지 장악한 *사실상의 전제군주였다. 일본은 *헌병경찰을 모든 행정구역에 배치해서 조선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군인을 경찰로 동원한 것은 다른 어떤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찾기 어려운 강압적인 통치 방식이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무력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지식인, 양반 출신 지도자들이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35-6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3>



성리학과 양반 관료들이 더 이상 나라를 이끌 수 없고 백성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새 지도자들이 시대를 주도해야 했다.

구한말부터 독립과 개화를 주장했던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학문을 배운 학생들이 앞장섰고, 지방으로 내려가서는 일제의 지배가 더 교묘하고 악독한 수탈과 억압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농민들이 대거 가세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시위 참가자는 202만 명에 달하며, 7500여 명이 사망했고 5만 2000여 명이 검거됐다.

 그러나 윤치호는 3·1운동 같은 저항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약한 민족이 강한 민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자기 보호를 위해 그들의 호감을 사야 하는데,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내용도 매우 부실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어리석은 소요는일제의 무단통치만 연장시킬 뿐"이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냉소를 보냈다.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문화통치‘ 라는 이름으로 교육의 기회를 개방해서 지위 상승을 열망하는 다수의 조선 청년들을 포섭하고, 그들에게 천황 사상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업 설립을 자유화해서 경제활동을 촉진했다. 

**이로써 독립의 길은 멀어지고 시대의 질서와 흐름에 순응하자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반대로 만세운동으로는 일본을 절대로 물리칠 수 없으므로, 무력을 키워야 한다는 **무장투쟁론도 확산되었다. 

앞의 생각은 인도가 영국에게 한 방식처럼 일본에 조선의 자치를 청원하는 **민족개량주의로 나타났고, 후자의 흐름은 신채호의 혁명론과 무력으로 일본을 물리쳐야 한다는 이회영 · 이상룡 등의 만주 독립기지 건설운동, 그리고 러시아혁명의 거대한 물결에 고무된 공산주의운동 등으로 전개됐다.


37-8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4>



다시 독립을 열망했던 사람들 중 장년층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결집했지만 청년층은 주로 무장 항일투쟁만이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임시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일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종교의 자유는 허용하는 정책을혔기 때문에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통해 개인과 민족의 구원의 길을 찾았다.

 미국과 프랑스 선교사들은 일제의 시책에 협조해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조선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들 서양 선교사의 대부분은 3·1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한국 천주교의 수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독립전 쟁을 살인 행위로 단정 짓고, 안중근에게 이토를 세기한 것은 오해 때문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야만 고해성사를 해주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합법적이며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정신적으로 타릭한 미개의 조선보다 서양문명을 이식받은 일본에게 더 우호적이었다. 또한 조선 선교를 위해서 일본 당국과 마찰을 피하고 싶어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1900년에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던 기독교 신자는 1940년에 이르자 35만 명을 헤아리게 됐다. 지역별로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가 전 신자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는데, **전통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유교 전통이 강하게 뿌리내리지 않았던 서북지방에서 증가세가 두드러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선 김산의 말처럼, 구한말 이후에 겪어야 했던 역경들이 조신인을 기독교라는 서양 종교에 더욱 의지하게 만들었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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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안중근과 윤치호의 길을 가른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일전쟁(1904~1905)이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겨룬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로 20세기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요, 그 주요 전투 현장 또한 한반도와그 주변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배후에는 미국과 영국이 있었다. 전쟁 발발 직전 일본은 "조선을 다른 강국에 빼앗겼을 경우 일본의 방위가 성립하지 않으며, 조선의 존망에 제국(일본)의 안위가 달렸으므로 결코 조선을 다른 나라가 간섭하도록 내버려둘 수없다"고 이 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일본의 입장에서 승리는 곧 조선의 지배를 뜻했다. 그래서 일본은 겉으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실제로는 총성이 울리자마자 조선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신의 내정에 간섭하였으며 *조선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런데 윤치호뿐 이니라 안중근도 *처음에는 ‘백인에 대항하는 황인종의 승리‘라는 일본의 선전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시아의 후발국 일본이 거대한 제국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서구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던 아시아는일본의 승전보를 듣고 열렬히 환호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대표적이다. 그는 조선을 ‘동방의 등불‘로 찬양한 시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매우 우호직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다 기슭에 밤은 밝고, 핏빛구름의 새벽에/ 동녘의 작은 새, 소리 높이 명예로운 개신을 노래한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19-20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2>



그러나 여전히 세렵 있는 사람들의 무법천지였던 조선은 전제 군주제, 고루한 신분질서와 중국 중심의 ‘천하‘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런 조선을 개화시키고 백성이 참여하는 독립된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김옥균 등이 일으킨 1884년의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3일 만에 진압됐다. 

**기독교 선교를 위해 조선에 온 서양인들은 "독립할 힘이 없는 이 가련한 나라는 결국 주변 강대국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앙반 노인과 젊은이의 대화에서 한반도의 정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
"이 양반 어른은 독립관(현 서대문 독립문)을 내려다보면서 나라의 꼴이 아니라고 개탄을 했다. **명나라 청나라를 통해서 우리는 사대를 하여 아이가 부모를 우러러보듯이 했는데 *독립이니 개화니 하면서 이처럼 *소란하고 성인의 말씀을 어기고 있지 않는가 하니

 소년이 답하기를(…) 모든 나라가 개화를 하는데 우리만 미개하면 남에게 지게 되고 독립을 못 하면 남의 노예가 될 터인즉 어찌하오리까. **옛날에는 중국이 문을 굳이 닫고 자신을 높이고 오랑캐라고 멸시했는데 지금 문이열려 (…) *외인의 능욕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의 속방이 되면 내정에는 자주가 있을 수 없고 토지세와 인구세가가중해지고 노예가 되어 박탈을 그들의 뜻대로 하리니 우리가 독립국이 못 되면 군신상하가 어디에 몸을 두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남북의 촌에서는 독립과 개화라는 네 글자를 원수로 여기고 신문물을 문 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다만 양반 기세를 행한다고 하옵는데 나라가 있어야 양반 이름을 유지하고 학문이 있어야 양반의 명맥을 계속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성신문, 1898년 9월 30일 논설


20-21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3>


지위와 권세를 누려온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시대의 요구에 귀를 닫았다. 그들은 **일본이나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주권이나 민권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유교 정신을 고집했던 지방의 고루한 선비들도 **개화파가 의리와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정신을 버리고, 오직 경제적 욕망과 힘만을 추구하는 서양문명을 배워 **소인의 길을 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반상을 엄격히 구분하는 신분질서의 관습에 젖어서 나라의 경제 문화 군사를 키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이 봉기하여 관아를 접수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일본도 중국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흔히 청일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의 첫 장면은 **일본군의 조선 제압이었다.

이 무렵의 조선은 처음에는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그다음에는 "일본의 나가사키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끼여서 **어느 쪽이든지 함부로 찰 수 있는 *축구공 신세가 됐다."

**독립협회의 해산과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백성의 힘으로 **개화와 독립을 추진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22-3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4>


개화기의 또 하나 두드러진 현상은 **기독교 신자의 증가다. 구한말 이후 성리학과 **신분 차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 노비나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던 사람들이 대거 기독교로 귀의했다. 

노론이 주도한 세도성치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남인과 중앙 진출이 좌절된 **서북지방 사람들도 같은 처지였다. ***조선 사회나 유교의 가르침에서 전혀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은 초기에는 민란에 가담하며 저항했지만, 점차 사람 간의 차별을 두지 않는 **개신교와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들은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양문명의 핵심인 기독교를 배워이 한다고 생각했다. 윤치호가 개신교로 개종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정부는 천주교가 "폐족, 서얼 등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를 규합하여 (…) 시정의 거간꾼과 농 사군, 여자까지 불러 모았다"고 진단했다. 천주교 공동체에서는 중인이나 백정도 양반과 함께 방을 쓰고 때로는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들은 신분이나 정치 노선의 차이를 넘어서 평등 의식을 기반으로 강한 유대 의식을 형성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순이는 남편 유중출과 빈민을 구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부자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재산을 내놓는 일은 일찍이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신유박해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도 굶주리면서 과부와 고아를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나누었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새롭게 생각하고 만들어낸 사회는 가족· 씨족 유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그들은 평등한 사회조직을 만들어서 기존의 가족 · 씨족 질서체제를 바꾸려고 했다.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일진회 등의 근대적 사회·정치 단체의 결성도 기독교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조선에서 급속히 퍼진 이유를, 한국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유일신 개념과 유사한 ‘하나님‘의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안중근도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조선을 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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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타인의 고통은 25년 전에 발표된 『사진에 관하여』(1977)와 이어지는 저서이다. 전작이 사진 *이미지를 분석하면서 사람들이 *현대성이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 이문을 제기했다면, 이번 저서는 **이미지가 시용되는 방식과 그 *의미는 물론이 거니와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은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힌 ‘지적‘ 개입이기도 하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시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디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혀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음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히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인 채 *타인에게 연민민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3쪽

<타인의 고통>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흔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특히 **고통받는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력한 것으로서,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수세기 동안 이 두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의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사람들이 타고났다는 주장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4-5쪽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은 행위인 것이다.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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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의 구성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의 기원과 형성을 다루는 *역사적 접근임과 동시에 현대에서 계몽이 빚어내는 *구도를 분석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은 **계보학의 결과 위상학의 결을 판별해야 한다.


1장 서문

/원리와 부연설명
2장 계몽의 개념
3장 부연설명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4장 부연설명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 그 중심에 서 있는 개념은 ‘희생‘과 ‘체념‘인데, 이 개념들을 통해 ‘신화적인 자연‘과 ‘계몽된 자연지배‘의 같음과 다름을 보여준다.
모든 자연적인 것을 **오만한 주체 밑에 굴복시키는 것이 궁극에는 맹목적인 **객체성과 자연성의 지배 속에서 어떻게 정점에 이르고 있는가를 분석함.


/ 현대적 야만의 징후와 계몽의 원리
5장 문화산업: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
6장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 집필 당시의 현대적 야만의 징후 속에 담겨 있는 계몽 원리의 지송성을 다룬다. 아울러 계몽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로 퇴보하는가를 보여준다. 반유대주의를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고 **계몽의 합리성에 내재한 **자기 파괴 경향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들이 보기에 반유대주의의 비합리성은 "합리성"의 왜곡이 아니라, "*지배적인 이성의 본질 자체"와 "이성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세계로부터 초론"된 것이다.


7장 스케치와 구상들


첫 번째 논문의 결정적인 부분은 크게 두 개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 **그리고 신화는 신화(체계)로 돌아간다.


94-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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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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