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안중근과 윤치호의 길을 가른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일전쟁(1904~1905)이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겨룬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로 20세기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요, 그 주요 전투 현장 또한 한반도와그 주변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배후에는 미국과 영국이 있었다. 전쟁 발발 직전 일본은 "조선을 다른 강국에 빼앗겼을 경우 일본의 방위가 성립하지 않으며, 조선의 존망에 제국(일본)의 안위가 달렸으므로 결코 조선을 다른 나라가 간섭하도록 내버려둘 수없다"고 이 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일본의 입장에서 승리는 곧 조선의 지배를 뜻했다. 그래서 일본은 겉으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실제로는 총성이 울리자마자 조선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신의 내정에 간섭하였으며 *조선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런데 윤치호뿐 이니라 안중근도 *처음에는 ‘백인에 대항하는 황인종의 승리‘라는 일본의 선전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시아의 후발국 일본이 거대한 제국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서구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던 아시아는일본의 승전보를 듣고 열렬히 환호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대표적이다. 그는 조선을 ‘동방의 등불‘로 찬양한 시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매우 우호직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다 기슭에 밤은 밝고, 핏빛구름의 새벽에/ 동녘의 작은 새, 소리 높이 명예로운 개신을 노래한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19-20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2>
그러나 여전히 세렵 있는 사람들의 무법천지였던 조선은 전제 군주제, 고루한 신분질서와 중국 중심의 ‘천하‘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런 조선을 개화시키고 백성이 참여하는 독립된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김옥균 등이 일으킨 1884년의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3일 만에 진압됐다.
**기독교 선교를 위해 조선에 온 서양인들은 "독립할 힘이 없는 이 가련한 나라는 결국 주변 강대국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앙반 노인과 젊은이의 대화에서 한반도의 정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 "이 양반 어른은 독립관(현 서대문 독립문)을 내려다보면서 나라의 꼴이 아니라고 개탄을 했다. **명나라 청나라를 통해서 우리는 사대를 하여 아이가 부모를 우러러보듯이 했는데 *독립이니 개화니 하면서 이처럼 *소란하고 성인의 말씀을 어기고 있지 않는가 하니
소년이 답하기를(…) 모든 나라가 개화를 하는데 우리만 미개하면 남에게 지게 되고 독립을 못 하면 남의 노예가 될 터인즉 어찌하오리까. **옛날에는 중국이 문을 굳이 닫고 자신을 높이고 오랑캐라고 멸시했는데 지금 문이열려 (…) *외인의 능욕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의 속방이 되면 내정에는 자주가 있을 수 없고 토지세와 인구세가가중해지고 노예가 되어 박탈을 그들의 뜻대로 하리니 우리가 독립국이 못 되면 군신상하가 어디에 몸을 두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남북의 촌에서는 독립과 개화라는 네 글자를 원수로 여기고 신문물을 문 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다만 양반 기세를 행한다고 하옵는데 나라가 있어야 양반 이름을 유지하고 학문이 있어야 양반의 명맥을 계속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성신문, 1898년 9월 30일 논설
20-21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3>
지위와 권세를 누려온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시대의 요구에 귀를 닫았다. 그들은 **일본이나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주권이나 민권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유교 정신을 고집했던 지방의 고루한 선비들도 **개화파가 의리와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정신을 버리고, 오직 경제적 욕망과 힘만을 추구하는 서양문명을 배워 **소인의 길을 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반상을 엄격히 구분하는 신분질서의 관습에 젖어서 나라의 경제 문화 군사를 키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이 봉기하여 관아를 접수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일본도 중국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흔히 청일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의 첫 장면은 **일본군의 조선 제압이었다.
이 무렵의 조선은 처음에는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그다음에는 "일본의 나가사키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끼여서 **어느 쪽이든지 함부로 찰 수 있는 *축구공 신세가 됐다."
**독립협회의 해산과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백성의 힘으로 **개화와 독립을 추진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22-3쪽
<독립과 개화의 딜레마 4>
개화기의 또 하나 두드러진 현상은 **기독교 신자의 증가다. 구한말 이후 성리학과 **신분 차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 노비나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던 사람들이 대거 기독교로 귀의했다.
노론이 주도한 세도성치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남인과 중앙 진출이 좌절된 **서북지방 사람들도 같은 처지였다. ***조선 사회나 유교의 가르침에서 전혀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은 초기에는 민란에 가담하며 저항했지만, 점차 사람 간의 차별을 두지 않는 **개신교와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들은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양문명의 핵심인 기독교를 배워이 한다고 생각했다. 윤치호가 개신교로 개종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정부는 천주교가 "폐족, 서얼 등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를 규합하여 (…) 시정의 거간꾼과 농 사군, 여자까지 불러 모았다"고 진단했다. 천주교 공동체에서는 중인이나 백정도 양반과 함께 방을 쓰고 때로는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들은 신분이나 정치 노선의 차이를 넘어서 평등 의식을 기반으로 강한 유대 의식을 형성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순이는 남편 유중출과 빈민을 구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부자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재산을 내놓는 일은 일찍이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신유박해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도 굶주리면서 과부와 고아를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나누었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새롭게 생각하고 만들어낸 사회는 가족· 씨족 유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그들은 평등한 사회조직을 만들어서 기존의 가족 · 씨족 질서체제를 바꾸려고 했다.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일진회 등의 근대적 사회·정치 단체의 결성도 기독교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조선에서 급속히 퍼진 이유를, 한국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유일신 개념과 유사한 ‘하나님‘의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안중근도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조선을 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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