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인간의 정의는 이 땅에 편만하나 오히려 현실을 병들게 해왔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망 없는 세상에 희망이 되나 우리의 눈에 숨겨져 있고 우리로서는 획득할 수 없다. - P51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 혹은 문명의 뿌리에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위기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이러한 앎은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을 분석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다.
바르트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특별히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급진적 메시지를 들으라고 촉구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역사 비평 방법을 성서 해석학의 왕좌에서 퇴위시켰다. - P51
바르트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배경 역사나 원래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독자에게 말하려는 바 sache에 집중하려고 했다.
‘십자가’가 죽음으로 경계 지어진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 Nein이라면, 부활은 심판과 죽음 저편에 있는 그분의 긍정 ha이다.
변증법적 신학은 신적 진리의 역설적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은총이자 동시에 심이시다. 위기의 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 P56
우리는 죄에 관한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가르침을 토론하는 것을 선호해서는 안 된다. 죄인에 대한 값없는 용서, 심판 속의 은총 외에 다른 은총이 없다는 통찰이 어디에 보존되어 있던가?
우리가 러시아인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이러한 진리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은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이 진리를 더 잘 이해했던 우리의 &종교개혁자들에게 듣기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여전히 &개신교라고 할 수 있는가? - P612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과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둘 중 하나를 택하여 대립을 해소하기보다는,
둘 사이의 긴장을 사유와 언어 속에서 포착하는 변증법적 방식을 배웠다.
달리 표현하자면, 여기에 인간이 있고 저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여기와 저기 사이의 *간격을 넘을 인간의 방법은 없다. 이 가운데 은총은 인류가 상상해 온 실재의 허상을 깨부수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백일몽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은 낯설고 거칠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가 아는 현실, 인간성, 종교성의 한계로 우리를 내몬다. 그 지점에서 보는 현실 세계는 아득하고 아찔하다.
는 근대 서구 사회가 빠진 문화의 발전이나 인류의 일치,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달콤한 꿈을 깨트림으로써 *방어기제 없이 은총 앞에 서 있는 인간상을 드러내고자 했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신학적 읽기를 통해 투르나이젠은 인간의 실제 상황을 분석하고 종교와 문명을 비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제시하려 했다.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에 끼여 *방황하던 전후의 젋은 세대들은 이러한 *역동성 속에서 *낡아버린 세계를 *심판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에게 늘 *새롭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희망할 수 있었다. - P63
종교론은 *경건주의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라는 근대사회에서 꿈틀대던 큰 사상사적 물줄기가 합쳐지며 탄생한 책이다. - P35
*계몽주의 이성의 맹렬한 공격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편에서는 교리라는 객관화된 지식 대신 인간 내면의 체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흐름이 부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계몽주의적 이성에 교리적 이성으로 맞대응하는 *정통주의 신학이 발전했다.
하지만 전자는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근대인의 *언어와 논리로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으며,
후자는 신앙을 주지주의화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 생동감을 약화했다.
슐라이어마허는 근대정신에 푹 잠긴 채 종교를 멸시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방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성에 기초한 *자연종교, 혹은 *윤리로 환원된 *도덕종교와는 다른 참 *종교의 본질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 기울여 들으려 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으려고 한다. - P37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닌 지구가 공전한다고 주장하며 낡은 우주관을 폐기했듯,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 외부의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내부의 직관과 감정에 찾는 *인각학적 전환을 시도했다.
즉, 종교는 교회의 교리를 이해하거나 윤리적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인간이 온전히 포착도, 설명도 할 수 없는 무한한 대상과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만남과 이에 대한 심정의 자연스러운 반응에서 발견된다.
슐라이어마허가 성취한 것은 종교의 *인간학적 전환이지 인간학적 *환원이 아니다.
그가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저함 없이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성이 심정에서 솟아오르게 하는 *무한자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신의 행위로 생각하는 것이 종교이며, 이것은 무한한 전체에 대한 이 모든 사건의 관계를 표현한다."
즉, 인간의 인식과 실천 너머의 신비와 만남에 대한 반응이 직관과 감정이고, 이를 뒤따르는 언어적 반성이 신학이다. *생동적 경험이 선행하지 않는 신학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 P39
종교를 *형이상학과 *도덕 위에 기초하는 것은 그 본질을 왜곡시키지만, 무한자에 대한 직관과 감정은 인간을 다시 외부 세계로 이끌어 이성과 의지(혹은 형이상학과 도덕)에 경건의 풍미를 새로이 불어넣는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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