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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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박영근 옮김, 민음사, 1999, 1835, 420쪽 분량)』은 1819년 파리의 삶을 그리지만 시간과 공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동시켜도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만나게 한다. 고급 하숙집과 사교계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일상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와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낸다. 이에 필요한 수단을 노력보다 탈취와 희생에서 취하기 시작하면 도덕적 해이와 양심의 무감각은 이미 전제된다. 작가가 초판 서문에 썼다는 “모든 것이 사실이다.”(p.9)라는 말에 반대할 수 없다. 그가 확언했듯이 어느 누구의 집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도 한없이 되풀이되지만 제어할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운 오래된 슬픔을 고리오와 그의 딸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스무 살 때 문학의 길로 들어설 결심 후, 약 십 년간 독서와 습작, 경제적 독립에 전념했다. 그러나 시작하는 사업마다 실패하고, 소설을 써서 빚을 갚아 나가는 등 평생 곤란을 겪었다. 발자크는 서른 살 때 스콧과 쿠퍼의 영향을 받은 역사 소설 『올빼미당원』을 발표하고, 1848년에 이르기까지 약 이십 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갖가지 인간 삶을 그린 소설들을 서로 엮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구성되도록 한 작품집 『인간 희극』을 평생에 걸쳐 집필했다. 프랑스 문학사에 하나의 큰 덩어리로 남아있는 『인간 희극』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큰 뜻”(p.398)대로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라는 세 계열에 91편의 소설로 구성된다.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인물 재등장 기법”을 처음 시도한 후 주인공들을 여러 소설에 등장시켜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 “인물 경제학의 대가”가 『인간 희극』에 선보이는 인물은 거의 2000여 명이다. 이는 559명이 등장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1869)』를 상기시킨다. “완전한 단편의 형식을 갖추는 각각의 장은 완벽히 연결되어 거대한 장편소설을 완성했”(전쟁과 평화 4권 583p, 문학동네)던 톨스토이 이전에 근대적 소설의 탑을 정밀하게 구축하고 있다. 이런 발자크를 “인간 사회에 대한 진정하고 완벽한 모습을 제시하는 진짜 사회학자”(p.408)라고 알랭은 평한다.

작가는 고급 하숙집이라고 명시한 보케르 집을 촘촘하게 이동하는 카메라 렌즈와 같이 시각적으로 먼저 형상화한다. 이어 ‘냄새’를 보태 독자의 감각이 민감해지면 고급은 가난을 의미하는 또 다른 낱말이 된다. 하숙집에 묵고 있는 일곱 사람은 1820년대 파리에서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견디며 혹시 나아지지 않을까 꿈을 꾼다. 3장 ‘불사신’에 중점적으로 등장하며 보트랭으로 불린 자크 골랭은 라스티냐크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도모하고자 계획하나 실패한다. 보트랭은 자신을 비난하는 보케르 부인에게 “당신은 우리 같은 놈들보다 더 훌륭합니까? 타락한 사회에서 무기력한 부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치욕이 우리 어깨에는 덜 있어요.”(p.276)라고 외친다. 여전히 묻고 있다.

“젊고, 사교계를 부러워하며, 여성을 갈망하는 이 청년이 자기를 위해 두 집안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다니!”(p.48) 으젠 라스티냐크는 성공적인 사교계 입성을 위해 학업보다는 유력한 관계에 의지하고자 결심한다. 보트랭이 보여주는 라스티냐크의 암울한 미래를 부정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자네가 서둘러 출세하기를 원한다면 벌써 부자가 되어 있거나 겉으로라도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말일세.”(p.149) 유혹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젊은 영혼을 흔드는데 거침이 없다. 그러던 중 라스티냐크는 제면업자였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리오 영감과 “자기 아버지를 모른다고 하다니!”(p.104)라고 한탄케 한 그의 두 딸의 사정도 알게 된다.

고리오 영감은 딸들에게 헌신했으나 그 대가로 버려졌다. 나의 엄마는 내게 늘 말씀하셨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라고. 너는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도 왜 그녀는 헌신했을까. 사랑의 역동은 수백 년 전 파리나 현재의 지구촌이나 놀라우리만치 닮아서 작가가 어느 골방에서 실시간 써내고 있는 글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다. 어리석은 고리오 영감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결심하지만 그 자리가 한 순간 독자의 발밑과 흡사해 고리오의 고통과 호소는 오늘의 독자를 울린다. 그의 실수를 번복하지 말자는 부모의 각오는 무르고 빛바래 돌이킬 여분의 시간을 남기지 않는다. 작가는 인간 비극을 활자로 새기고 행여 흐트러질세라 고정액을 뿌려둔다. 그럼에도,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복되겠지만 말이다. 야망도 자신도 넘쳤던 라스티냐크의 도전은 눈물에 젖어 스러져가는 노인 곁에서 잠시 멈춘다. 노인에게는 연민을 담은 타인의 손만이 허락될 뿐, 그가 간절히 원했던 딸들의 목소리, 시선은 다른 공간에서 다른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러시아 여류작가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가 『시간은 밤(문학동네)』에서 그린 모성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고리오 영감이 보여주는 부성의 비극과 겹친다. “어머니, 아, 이 얼마나 성스러운 단어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아이에게, 아이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들이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버려질 것이다. 아아아.”(p.225, 시간은 밤) 미칠 노릇이다. 임종을 앞둔 고리오 영감이 내는 절규는 작가의 섬세한 문장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딸들과 나누는 대화 역시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이다. 또한 익숙해서 슬프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p.396) 소설의 마지막, 라스티냐크의 유명한 외침은 고리오가 걸었던 눈물과 비참의 골짜기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동행했던 청년의 치열한 도전장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무저갱으로부터 이제는 비상만이 남았다. 라스티냐크는 어떤 길로 내달리게 될까.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구원이었던, 다른 이름을 가진 소냐일까? 무엇을 통해 어디에 이르게 될지 다음 장면이 필요하다. 작가는 결말을 절정으로 치환한다. 소설은 숨죽이며 꺼져가는 안타까운 부성과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통한 라스티냐크의 성장기를 고루 담는다. 질문하면 정보를 취합해 실시간으로 답을 알려주는 똑똑한 시대다. 우리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힘닿는 만큼 발자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겠다. 핑크빛 전망은 없겠지만 예리한 펜은 충분히 깊게 통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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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 인생을 바꾸는 자기 혁명 - Think Hard! 몰입
황농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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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농문은 몰입을 통해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함으로 두뇌를 100% 활용하고 마침내 귀중한 업적으로 연결한 천재들로 뉴턴과 리처드 파인만, ‘방랑 수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폴 에어디시의 예를 든다. 그 탁월한 궤적은 아무나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가능할 법한 전설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이 사용했던 몰입적 사고는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몰입』(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92쪽 분량)은 황농문 교수가 특별한 몰입상태에서 7년간 진행했던 연구 경험을 추적해 관찰, 분석하고 체계화한 결과물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몰입적 사고로 수십 년간 풀리지 않았던 난제를 해결하고 “세상 모든 것을 긍정하고 싶”(p.17)은 극적인 순간을 맞는다. 그는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기 위해 첫 책 『몰입』을 발표한 이후 『몰입, 두 번째 이야기』 에서는 몰입의 심층적인 원리와 더 풍부한 사례를 전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은 다정하고 정교한 인문학 저서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이끈 명저다. 칙센트미하이는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동일한 밀도를 지니지 않았으며 그 밀도를 높일 때 변화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 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고 시간을 재배치하고 빼어난 성취와 기쁨을 선사하는 도구로서의 몰입을 선보였다. “인생을 바꾸는 자기 혁명”이라고 명명한 황농문의 『몰입』은 『몰입의 즐거움』의 활용편이다. 손에 잘 맞게끔 정교하게 다듬고 안내서를 첨부하고 질문에 실시간 답해주는 친절한 안내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저자는 “최선의 삶”에 닿고자 한다. 공부도 연구도 “최선”에 이르는 여정은 면밀한 계획, 불면을 비롯해 투입시간의 총합과는 어긋난다는 시행착오를 거친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면서 Work Hard가 아닌 Think Hard로 전환하게 된다.

저자는 “몰입을 오랜 시간 유지하면서 두뇌 활동의 극대화와 지고의 즐거움을 동시에 경험”(p.58)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몰입을 시도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과정과 단계를 보여준다. 환경, 주변 정리부터 공간 선정과 운동, 식사까지 구체적이다. 해야 할 것과 주의사항을 포함하고 몰입 도전자들의 상담 사례도 첨부한다. 몰입이 영적인 감정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며 이를 뇌과학과 연결해 설명한다. 활동 위주의 몰입과 사고 위주의 몰입의 유사점과 차이, 쫓기는 사슴의 몰입과 쫓는 사자의 몰입을 예로 들어 수동적 몰입과 능동적 몰입을 알려준다. 저자가 죽음에의 통찰이 능동적인 몰입을 유도하며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한 최선으로서의 몰입을 설명할 때 더 공감하게 된다. 유대인의 영재교육과 몰입적 사고의 근접성, 직장에서의 몰입 적용과 기업 우수사례, 5단계 실천법까지 계속된다.

저자는 “지금 해야 하는 일, 해야 하는 공부를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목표로 만들어라. 그러면 삶을 채우고 있는 모든 순간이 행복해질 것이다.”(p.280)라고 말한다. 자신이 처한 조건이나 환경에 주목하고 탓하기보다 주어진 현재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가 바탕이 될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이나 외부의 평가, 보여지는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금씩 내면으로 침잠해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며 속도 경쟁에서 벗어날 때 성취 이전에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만, 몰입에 진입하기 위해 확보할 일정 기간이 장벽으로 작용해 일반화하는 데 걸림돌로 여겨질 수는 있겠다. 책은 미하일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을 요약 전달할 뿐 아니라 추가 질문을 끌어내고 체험을 통해 더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몰입의 즐거움』도 재독하고 싶다. 『몰입』은 어느 연령의 독자가 읽어도 삶의 가치를 다시 매겨보게 이끌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사례도 제시되었듯이 학업 중인 청소년들에게는 지니고 다닐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 자신만의 몰입 다이어리를 채워가며 발견할 세계는 얼마나 새롭고 경이로울지, 시도하는 만큼 생의 지평을 넓힐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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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 경험이 글이 되는 마법의 기술
메리 카 지음, 권예리 옮김 / 지와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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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근하면서 동시에 외면하기도 쉬운 글감인 자신을 기록하는 일은 그 자체


로 의미를 지니고 나아가 의무가 되어가는 듯하다. 자서전 쓰기는 도서관이나 학습관에서 모집 인원 미달로 폐강되는 일 없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온 오프라인에서 접근 가능한 채널도 다양하다. 인기를 더해가는 장르인 자전적 글쓰기에도 눈 밝은 길잡이가 필요하다. 몇 해 전 참여했던 강좌에서 교수님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을 필독 도서로 삼았다. 메리 카의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권예리옮김,지와인,2023,원제:The Art of Memoir,2015,328쪽 분량』는 읽고 쓰는 일을 비롯해 허구를 제외한 진실에 닿는 글쓰기의 가치를 전한다. 저자는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일인칭 시점의 실화를 읽을 때마다, 언젠가 나도 자라나 엉망진창인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갔다.”(p.14)고 서문에 밝힌다. 메리 카는 미국 시러큐스 대학교 영문과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1995년 출간한 첫 인생록 『거짓말쟁이들의 클럽』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머물며 자전적 글쓰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과 함께 작가 지망생들의 필독서로 여겨져 왔다.

책은 “인생은 어떤 가치를 품고 있나”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법”, 2부로 구성된다. 인생을 기록하기 위한 재료는 상당부분 기억에 의지하지만 부실한 기억, 암송된 기억, 전승된 기억 모두 충분치 않다. 과거를 향하는 여정에 오르고 나서 경험을 글로 옮길 때 저자는 “일단 없는 이야기를 새로 지어내는 데에는 결사반대”(p.43)를 표한다. 고양이똥 샌드위치의 예를 들어 ‘거짓’에 대해 정의 내린다. 또한 쓸 준비가 되었는지 가늠해 볼 항목도 제시한다. 기억력이 나쁘면 포기하라, 마음의 상처치료를 원한다면 전문 상담사를, 복수를 원한다면 변호사를 찾으라며 특히 싫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쓰지 말 것을 권한다. 20세기 들어 회고록에 열광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라이트의 <흑인 소년>부터 회고록의 역사도 살핀다. 찾아 읽어야 할 도서 목록들이 추가된다. 저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읽지 않고 자전적 글쓰기의 작가가 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가 쓴 작품의 분위기는 너무도 황홀해서 읽고 있으면 뇌 구조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리는 것만 같다.”(p.107)면서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만날 수 있는 빼어난 지점들을 짚는다. 또한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세부 묘사의 중요성, 다섯 가지 감각으로 파악되는 육체성이 글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설명한다.

2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법”은 한발 더 나아간다. 정보를 배치하는 방법, 저자가 주로 사용하는 구조, 서사 기법 등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생생하게 비평한다. 자전적 스토리를 쓰기 이전에는 독자들을 피해 다녔지만 꾸며낸 사실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할 때, 시에 비트겐슈타인이 등장할 때, 고전문학을 동경하고 아빠에 대한 호칭을 고민할 때, 가식과 솔직 사이에서 서성일 때, “뭔가를 쓸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p.256)던 순간, 그리고 “나는 곧은길을 걸어가듯 글을 써본 적이 없다.”(p.257)고 말할 때 심장은 두서없이 빠르게 뛴다. 페이지는 밑줄과 기호로 얼룩지고 감동은 저절로 차오른다. 저자는 30년의 글쓰기 강의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인용과 사례, 지켜야 할 제언들과 요소를 요약해 번호를 매긴다. 밑줄과 색으로 강조한다. 행간에 시간이 흐르고 독자는 어떤 경이로운 공간에 이동해 있는 느낌이 든다.

훌륭한 사람이 된 후에 훌륭한 책을 쓰겠다는 결심이 터무니없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한다. 아마도 훌륭한 사람 되기라는 사명은 애초에 도달 불가능의 표지를 달고 만들어 졌을지 모른다. 지금의 나 역시 싸이즈를 줄인 시지프스일 뿐이다. 사생활을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건 자유지만 인쇄물로 내어놓는다는 건 예의에서 벗어난다는 걱정이 컸고 의심은 계속되었다. 일기와 에세이와 소설은 동등한 선택지인가. 문맥과 가독성을 비롯해 한 교수님이 강조하는 객관적 상관물의 수준을 획득하는 글쓰기에 도달하는 동시에 정확한 진실을 새겨 넣는 일은 실현 가능할까 불안했다. 이에 대해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는 최대치의 답을 제시한다. “지독하게 엉망인 한 사람의 삶에서 진실을 끌어내려 애쓰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마지막 페이지 문장에 깊이 감사한다. 읽고 쓰는 일을 저버리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아끼고 사랑하고 되풀이 펼치게 될 책이다.

책 속에서>

내가 읽고 또 읽은 책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의존하는 시각적 매체인 영화처럼 기록하지 않는다. 여러 출처의 비중을 가늠하고 저울질해서 균형 잡힌 관점을 내세우는 역사처럼 기록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자전적 글쓰기의 위대함이다.(p.99)




(서평단-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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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 이즈 오사카 This Is Osaka - 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 2023~2024년 최신판 디스 이즈 여행 가이드북
호밀씨 지음 / TERRA(테라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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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끝나고 해외여행이 급증을 넘어 폭발 수준이라는 기사를 보며 덩달아 설렌다. 다시 자유롭게 국경을 넘게 되는구나 싶어 약간은 조심스러운 마음과 어쩔 수 없는 기대가 교차한다. 대학 새내기가 된 아이는 언니와 지난 1월 2주 동안 미국에 다녀왔는데 단 하루 도쿄를 경유하는 일정이었다. 그 하루를 사진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음악으로 끝없이 복기하더니 여름 방학 중 4박 5일 오사카 행 티켓을 예약했다. 그렇다면 일본 여행 공부 좀 해볼까. 호밀씨의 『디스 이즈 오사카(THIS IS OSAKA) 2023~2024년 최신판(2023, 584쪽 분량)』는 여행서가 전문인 테라출판사의 디스 이즈 시리즈로 개정 출간되었다. 책 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는 신뢰를 더한다. 일본어를 전공하고 취재 기자 및 번역활동을 하고 여행의 의미를 숙고하고 발로 뛰며 글쓰는 호밀씨를 믿고 따라나설 만하다.

책의 앞면지는 확대 지도를 뒷면지는 간사이 주요 대중교통 노선도를 담았다. 목차에 앞서 소개 코너에 특징을 정리하고 효율적으로 읽는 방법을 나란히 배치했다. “<디스 이즈 시리즈>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압도적으로 친절한 교통 정보”라는 말에 안심이 된다. 지난번에 스치듯 일본을 통과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게 이동 시의 우왕좌왕이었다는 아이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도 앱보다 강력한 상세지도”에서 나아가 “2가지 버전의 지도”까지 장착했다. 그대로만 따라하면 되겠다. 뷰 포인트를 보면 이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사진으로 간사이를 조명한다. 빼놓을 수 없는 음식과 쇼핑 정보는 아기자기한 사진과 알찬 소개가 함께한다. 전문가가 추천하는 목록이니 꼼꼼히 살피고 놓치지 말아야겠다. 드럭스토어 대세템 체크 코너에 이미 말해둔 로이히 츠보코! 동전 파스가 보인다, 다양한 목적에 맞는 오사카여행 추천일정은 여행자의 수고와 불안을 덜어줄 듯하다. 초행길에는 분명 더할 것이다. 아이는 내일 숙소를 예약해야 하는데 이 또한 꼼꼼하게 설명해준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미술관, 동물원도 눈여겨본다. 국립 국제 미술관 맞은편에 2022년 오픈했다는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이 특히 궁금하다. 검은 육면체 모양의 외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오사카 시립 동양 도자기 미술관에서 우리 도자기를 보는 도예학과생은 어떤 마음이 들까, 꼭 만나고 오기 바란다. 『디스 이즈 오사카』는 하나의 지면도 낭비됨 없이, 그러나 빽빽함 속에서도 생각할 여유를 주는 일본 여행 안내서다. 여행 가이드북은 효용에 우선순위를 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할을 바꿔 아련한 추억 창고 기능을 한다. <미국 서부>, <미국 동부>가 그랬고 <샌프란시스코>, <워싱턴>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에는 최신 개정판이었으나 지금은 절판된 판형이 책꽂이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물성을 지닌 여행 가이드북이 일상에 기쁨을 더할, 나아가 오래도록 꺼내 보아도 닳지 않을 순간들을 함께 만들어줄 것이다.(뜬금없지만 이 서평에 한 줄을 추가한다면 ‘난바 본점’의 명물인 치즈케이크가 가장 먹고 싶다. 성인 얼굴 크기만큼 커다란 사이즈라나···)




ㅊ((출판사 도서 제공,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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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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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새로 세들어 살게 된 영국인 록우드 씨는 소유주인 히스클리프와 대면키 위해 폭풍의 언덕을 찾는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 씨가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폭풍(wuthering)'이라는 말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키는 이 고장의 표현이다.”(p.11) 그곳에서 하룻밤 묵게 된 록우드 씨는 악몽을 꾸다 캐서린 린턴의 유령을 만나고 주인의 미심쩍은 행동까지 목도한 후 간신히 돌아온다. 록우드 씨는 하녀장인 딘 부인으로부터 자신이 만나고 온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 듣는다. 언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헤어턴과 린턴 가문의 마지막 후손 캐시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는 힌들리와 캐시의 아버지 언쇼가 “악마에게 받은 것 같”은 까만 피부의 아이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리고 오던 날부터 시작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김정아 옮김,문학동네,1847,2011,544쪽)』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폭풍의 언덕』을 문학적 교양의 수준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든 수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칭했다.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주에서 성공회 사제의 딸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와 함께 세 자매는 필명으로 공동 시집을 출간한다. 다음해인 1847년 각자의 작품이 나오는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 되며 1848년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출간 당시에는 비도덕적이라고 비판이 많았으나 반세기 후 서머싯 몸, 버지니아 울프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고 지금까지 영화와 연극,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 조명받고 있다.

아버지 언쇼는 아이들에게 약속했던 선물 대신 히스클리프를 데려왔고 극진히 편애한다. 눈에 보이는 부당함에 아들인 힌들리는 원한을 새기지만 캐시는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힌들리의 원한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줄지 않았고 특히 아내가 죽은 후에는 학대와 자학 사이에서 망가져 간다. 캐서린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에드거 린턴으로부터 청혼을 받아들인다. “천국에서 살면 너무 불행할 것 같”(p.129)다는, 천국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캐서린은 이 결혼에 대해, 그리고 히스클리프에 대한 진심을 넬리에게 털어놓는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p.130)라는 이 유명한 문장을 당사자는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린턴에 대한 내 사랑”과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p.133)이 어떤 격차를 지녔는지를 듣지 못한 채 나가버리고 3년이 지난 후에 둘의 재회는 이루어진다.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앞으로 더욱 많은 격변을 예고하면서. 그야말로 폭풍이다.

소설은 화자인 하녀장 넬리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상황 전개, 인물의 드러난, 또는 숨은 감정도 넬리의 해석을 거친다. 그녀는 아내 캐서린의 죽음을 슬퍼하는 린턴을 보고 캐서린의 축복받은 해방을 슬퍼하니 헌신적 사랑 안에 이기심이 들어있음을 단정한다. 캐서린의 죽음에 고통받는 히스클리프의 끈질김에 감동해 마지막 작별을 고할 기회를 만든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단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이지만 넬리의 목소리는 상황에 개입하고 의도하고 이끌고 예측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짧은 삶도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폭풍의 언덕』은 소설구성의 3요소 중에서도 단연 “인물”이 주도하는 작품이다. 캐서린이 개에게 물려 처음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머물게 되었을 때 히스클리프는 그 집의 남매가 캐서린을 보고 홀딱 반했다며 “캐서린은 그런 애들 따위와는, 이 세상 사람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잖아.”(p.83)라고 자신의 우상을 확실시한다. 캐서린은 자기감정을 살피고 의지를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캐서린에서 딸 캐시로 이어지며 압박과 위협, 규범과 굴레에 굴하지 않는 캐릭터는 생생한 현존으로 다가오고 선명한 인장처럼 남는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죽음 이후 한 가지 욕구로만 치닫는다. 소설은 사랑과 사로잡힘, 집착의 경계를 줄타기하듯 그린다. 집착은 원망과 투사를 부르고 제어장치 없이 극대화된다. 감정의 해소는 파괴에 다름 아니다.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빼앗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망가뜨리겠다는 의지와 그로 인한 여파를 작가는 직설적인 단어와 빠른 전개, 황량한 풍광으로 묘사한다. 돌연히 멈추었을 때야 비로소 이를 멈출 수 있는 것은 호흡의 부재, 즉 죽음 뿐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세대를 이어 바통을 건네면서 다가오는 운명과 환경에 휩쓸리고 맞서는 인물들은 고립된 배경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인간의 내밀한 심리, 무의식의 발로를 언어로 아로새긴다.

고전을 읽지 않으면 고전하게 된다는 말에 동의했다. 한 가지 더, 고전은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다. 유추의 대상도 아니다. 고전 읽기는 문장과 낱말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멈칫거리게 되는 행간을 견디고 섬뜩할지라도 전진하는 일이다.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느리게 조절하면서 이완과 외면, 재촉과 대결을 오롯이 통과해야 한다. 굳이 “고전이란”으로 시작하는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정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느지막이 만나는 고전은 민망함마저 부른다. 문학기행의 꿈을 품었던 히스 언덕의 낭만은 ‘아직도 내가 낭만으로 보이니?’ 라고 물으며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오해가 길어지다 보니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상상 속 이미지는 고착되고 말았다. 편역과 축역의 혼란한 선택지를 넘어서서 온전한 완역으로 본색을 드러내 보자. 비로소 얼어붙은 바다가 산산이 깨어지도록.

책 속에서>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린턴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과 다른 것은 달빛이 번개와 다르고, 서리가 불꽃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인걸.(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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