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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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책꽂이에 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드디어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바로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 <사라진 것들>의 출간 소식이 들려서다. 신간을 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자 예의로써 읽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한줄 평을 이론 따위 필요 없다. 자체 발광하는 작품의 아련한 눈부심으로 빠져보자라고 쓴다. 두 줄, 세 줄이 되면 점점 더 과도해질 터라 한 줄로 맺는 게 최선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은 앤드루 포터는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2008년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였다. 출간 당시 현재 미국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단편 작가’, ‘데뷔작에서 이미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었다는 등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앤드류 포터의 사라진 것들(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2024, 332면 분량)<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15년 만에 출간되었지만 필자는 15년을 7일로 단축하는 순간이동을 가상 체험하였다. 전작의 빛이 유쾌하게, 자신있게에 방점이 찍히지 않았음에도 <사라진 것들>과 비교할 때 찬란에 가깝다. 소설집 <사라진 것들>은 열다섯 편의 작품으로 열다섯 번 쓸쓸함을 덧칠한다. 두껍게 겹쳐진 마띠에르는 감정의 여러 갈래를 압착해내서 과거라는 시간의 핀으로 고정하기에 복구의 여지를 없앤다. 겹겹이 올린 물감색은 쓸쓸함 또는 쓸쓸함이 번졌을 때의 컬러라 감정의 분지들은 하나의 색조로 짙어져간다. 주조색은 아무리 해도 명랑이나 희망참과 간극을 벌린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중략)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p.21) 옛 친구들의 모습이 묘한 광경으로 비치는 건 그들은 그때 그 시간에 머물러 있고 나의 시간만 흐른 느낌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나는 아내와 두 아이의 안위를 염려하고 안전을 확인하고 파수꾼 역할을 하며 걱정과 과민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의 교차에 현기증을 느낀다. ‘너 어디로 간 거야?’ 라는 친구의 문자는 과거에서 걸려온 전화처럼 아득하다.(오스틴)

 

작가는 상실에 대한 감각을 다시 한번 스케치한다.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담배나 와인, 심야의 여유가 사라질 걸 몰랐다. 함께하기에 인생도 사랑도 배가 될 것이다.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p.26)라고 할 때, 사라진 것의 대체물이 보기에 좋아 보이고 바람직해 보이나, 그 좋은 웃음이나 재미에 반하여 정작 잃게 되는 건 관계의 본질이고, 감소하는 건 각자의 실존이다. 양팔 저울이 급격히 한쪽으로 쏠린다.(담배) “그런 것들은 어떻게 알게 되는 걸까?”(p.56) 물음은 답에 이르지 못한다. 그림들을 본 순간에 그냥 알았다는 사실만을 알아차릴 뿐이고, 곧이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에 놀란다. 그는 그녀를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 찬 벽장 안 그림 한 점에서 떠올렸다. 잊었던 시간, 잃게 된 그녀를.(넝쿨식물)

 

소설은 아름다운 요소가 충만하다. 고전문학들, 도스토옙스키, 그림, 조각가, 와인, 음식, 식물, 음악, 클래식 연주, 편지 등 다양한 모티프를 두루 배치하고 집중적으로 반복한다.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좌표를 고정하고 있는데 반해 끊임없이 낙하하는 인간조건의 대비는 극명하다. <첼로>는 위대함의 표상,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의 현현이었던 첼리스트에게 닥친 병과 그로 인해 깨어지는 일상, , 성공, 계획 가능했던 미래와 이를 지켜보는 동반자의 아픔과 무력감을 그린다. 인생에 가하는 타격이 이유 없이 전격적일 수 있고 인간은 취약한 선택지(기다리거나, 견디면서 기다리거나)만을 받아든다는 설정은 소설보다 현실에 가깝다.

 

이와 같은 취약함은 아이의 요구에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서(숨을 쉬어),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내 뒤통수를 쳤다고 느껴서정년직 임용에 탈락한 일을 정년직 임용 사건’”(p.163)으로 확정하고 나름의 관계 재정립과 함께 컬렉션이라는 치졸한 복수를 쌓아간 지성인들의 이야기에서도(실루엣)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시선을 두었던 협곡이 미지의 공간이었듯이 실루엣만 보일 뿐이던 손짓에 의미를 만들고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일 역시 불안정하다. 불확실을 확실로, 나아가 확고부동함으로 밀어붙였던 기저에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다. 느낌에 기인했던 오해는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의 화자는 매우 취약한 상태”(p.212)에 놓인 가정이라 혹시 무너질까봐 힘주어 밀수도 없다고 고백한다. 언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아내와의 관계를 복기하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면밀히 살핀다. “작은 구멍, 떼를 지어 드나드는 벌들, 그 옆 풀밭에 놓인 텅 빈 벌집.”(p.219)은 벌의 본능적 행위가 아니라 침몰하는 관계의 불길한 메타포다. 이와 같은 전조를 그들은 최대한 감추지만 이번에도 깨달음은 갑자기 도달한다.

 

모든 일이 끝이 있듯이 놀이도 끝이 있다. 하물며 가장놀이라면. 화자가 친밀함을 회피하는 사람이 된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p.127). 조금 과장하자면 인류 공통의 독백이 등장하여 흠칫한다. 그는 덧붙인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고. 묵과의 베일을 걷어내고 어긋남의 시작점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순간을 상기하는 지금, 그는 여기에서 안녕한가. 감정을 낱낱이 분석하지 않아도 결말은 안온하리라는 낙관과 달리 익숙했던 쳇바퀴는 어느새 낯선 족쇄로 발목 잡는다.(라인백)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p.232) 다행히도 그에게는 자기만의 공간, 안전지대가 있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 당신의 포솔레 수프는 무엇인가 작가는 묻는다. 이 작은 안위조차 곧 사라지곤 한다. 히메나의 아파트처럼 미래형 동굴이 끝없이 안심시키는 듯했으나 이 또한 기한이 정해진 아지트였다. 안심의 근거는 인정의 부재를 보이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마법에 있었다. 더 이상 유령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기회는 놓치기 어려운 법이다. 마지막 작품이 표제작인 <사라진 것들>이다. 지금까지 회피와 상실의 여러 모양을 그려왔다면 본격적인 실종과 남겨진 자들을 말한다. 친구 대니얼은 이미 사라진 후이고 화자의 아내 타냐는 자기 영역을 만들고 소통을 거부하는 성정으로 언제 부재하게 될지 두려운 실종 임박 상태다. 남겨진 자들, 실종자의 여자 친구와 화자는 대니얼의 집을 정리하는 이틀간, 그리고 과거로 편입될, 사라지기 직전의 반 시간을 같은 마음으로 지킨다.

 

분명 확실했다. 캠퍼스와 친구들과 소소한 유흥과 아주 많이 남은 미래가 확실했다. 자신도 있었고 물질적인 곤란만으로 계량할 수 없는 여유도 지녔다. 확실함을 지렛대 삼아 하루, 또 하루를 보냈던 청춘이었건만 주위를 둘러보는 지금 이 순간 낯선 떨림이 안으로부터 흔들려 퍼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굳이 찾아보자면 그대는 유쾌하지 않으리라, 상실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패배의 맛이 진하게 배어 있는 상실이리라, 끝에는 세상 두려운 네 글자, 너무 늦은 감 있는 네 글자, ‘다시 시작이 버티고 있으리라는 정도만이 확실하다. 작가는 인생의 중반을 통과하고 있는 남성들의 목소리를 정성 들여 지면에 새겼다. 여섯 편의 초단편은 산문시처럼 아름다운 압축을 보여주는데 마치 순도 높은 보석 같다. 특히 <고추>는 붉은 루비에 견줄 만하다.

 

작가는 한 편 한 편 첫 문장부터 마지막 온점까지 눈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고 이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문장은 간결하고 주의는 흐트러지지 않으며 감각을 예리하게 벼린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중간중간 말을 거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 ‘아시죠? 당신 이야기잖아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서술도 독자의 시간을 맞대어보게 한다. 낯익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정연한 문장으로 읽을 때 마음에서는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감정도 분리수거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회한이나 아쉬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실수나 착각에도 눈을 맞춘다. 회피와 외면, 핑계와 합리화, 책임 전가까지도 인정하는 시간, 반드시 대면해야 할 시간을 작가는 초청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시킨의 명시 첫 행에서 의구심이 든다. ‘노여워가 이 자리에 적절치 않아 보인다. 분노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근력도 줄었다. 노엽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깝다.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그대를 한 번도 요청하지 않았던 곳으로 이끌었을지라도, 이 사실을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닫게 되더라도, 잠시 얼얼한 타격감이 느껴지더라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여기가 낯설어지는 순간, 뒤 돌아 서서 한 걸음씩 되밟아 올라가다 틀린 지점을 찾아 오답 풀이와 함께 수정할 수 있다면 자기 몫의 캔버스는 밝고 투명하게 유지될 테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그 작은 연산 착오는 이미 01, 10으로 교란해 버렸다. 이 간격은 종말에 이르렀을 때 무한없음만큼이나 회복하기 어려운 차이를 만들어낸다. 환불 요청은 물론이고 바꿔주세요, 라는 교환 요청도 어림없다. 댁이 다 사셨잖아요. 인생 무대 관리자(만일 그런 게 있다면)는 삶을 살아냈다는 의미로 응대하였으나 돈을 지불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니 반박할 수 없다. 서서히 자리를 떠나는 속내는 온통 헝클어지고 입안은 쓰디쓰며 잠긴 목에 비명이 살짝 걸친다.

 

전도서의 기자인 지혜자는 한 문장에 다섯 번을 반복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인간의 삶을 총평했다. 불통하여 불화하게 되었고 그래서 불만인 순간들은 미세한 변이와 복제를 자동화 시스템처럼 일으켜왔기에 영민했던 청춘조차 적절한 응대에 실패했다. 작가는 묻는다. 그래서 앞으로? 라고. 다른 누구 아닌 당신은 이제 막 확인한 생의 진면목 앞에서 어리석은 매너리즘과 장엄한 시지프스 중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갈 것이냐고.

 

푸시킨은 2연에서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이라고 노래했다. 책 속 인물들은 마음은 과거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으로 치환하며 얼어붙는다. 하지만 시인은 이어지는 마지막 행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리니에서 예언한다. 지금, 여기, 자각의 순간 또한 만일 작가가 15년 후에 세 번째 단편집을 출간한다고 가정할 때 더할 수 없는 그리움이지 않을까. <첼로>의 한 장면은 자신의 진정한자아와 실제자아를 묘사하는 단어를 기록하는데 포터의 소설은 이 간극에 눈감지 않고 생의 변곡점에서 다음 발을 떼는 이들의 초상을 완성한다. 그렇게 응원하고 있다. 직면하기, 이제 우리들 각각의 차례다. (.)

 


(20240807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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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에 대하여 - 2025 세종도서 학술 부문 선정작
라헬 베스팔로프 지음, 이세진 옮김 / 미행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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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이세진 옮김, 미행, 2025, 125쪽 분량)<일리아스> 완독의 아쉬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해 줄 책이다. 이 책은 수많은 수식과 찬사로 에워싸인 고전, 감싼 헌사의 무게가 때로는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명저, 가장 오래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빛나는 길잡이 별, 최고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정확하게 조명한다. 얇은 책은 예리한 날처럼 틈을 내어 고전의 중요한 핵심을 건드리고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840페이지 분량의 서사시에서 꼭 필요한 요소를 단 125페이지로 포집한다.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성이자 유대인, 철학자인 라헬 베스팔로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시 읽은 일리아스에 대한 통찰을 기록하고 전쟁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하였다.

 

목차를 보고 감동할 수 있을까. 이 책이 그렇다. <일리아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독자는 첫 장이 <헥토르>인 것에 감격한다. 첫 페이지부터 문장의 긴밀함과 밀도는 독자를 바짝 끌어당긴다. 헥토르라는 이름이 한 번 언급될 때 열 번에 맞먹는 파장이 감지되고 다른 이름들이 끌려온다. 안드로마케와 아스튀아낙스가, 프리아모스와 헤카베가, 헬레네와 파리스가,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끌려온다. 모든 문장이 밑줄이라 밑줄로 동여매어진 책에서 발췌를 꼽기가 어렵지만 다음 문장을 인용하다. “그리하여, 헥토르는 후대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될것이라는 이 영광을 제외하고 전부를 잃었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전사에게 이 영광은 기분 좋은 환상이나 알맹이 없는 허세 따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속이 나타내는 바와 맞먹는다. 그건 바로 불멸에 대한 확신이다. 이야기를 넘어, 시의 지고한 초연함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p.25) 전부를 잃은 헥토르는 죽음으로 불멸에 이르렀음을 명확히 한다. 아무도 반론할 수 없다.

 

서사시 1권의 첫 행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일리아스>의 주제를 확인하는 건 보편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일리아스>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작품의 통일성과 진행을 동시에 지휘한다.”(p.26)고 주장한다. 서사시는 두 영웅이 맞서기 전에 하르팔리온과 에우케노르의 대리전으로(일리아스 13) 먼저 암시하고, 운명적 결전을 노래가 끝나가는 22권에 배치한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아닌 어머니 테티스와 함께다. 저자는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약점 없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기에 그가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다고 밝힌다. 아킬레우스의 운명이 헥토르보다 더 가혹한 이유는 그가 불의에 바쳐진 자이고 불의를 가할 것이냐 당할 것이냐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들을 향한 테티스의 분투와 비탄은 <일리아스> 내내 베어 나왔다. <일리아스>를 펴니 우연히도 그 중 한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그대의 무릎을 잡고 간청하는 거예요.

혹시 그대가 단명할 내 아들을 위해 방패와 투구와 복사뼈 덮개가

달린 아름다운 정강이받이와 가슴받이를 만들어주실까 해서.

그 애가 가지고 있던 것은 그 애의 충실한 전우가 트로이아인들에게

쓰러질 때 잃어버렸어요. 그 애는 지금 속이 상해 땅에 누워 있어요.”(457-461/p.547/일리아스/천병희 옮김/)

그녀는 제우스에게든, 헤파이스토스에게든 거침없이 다가가고 몸을 던져 탄원한다.

 

이어지는 헬레네의 장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한다. “그녀는 트로이인들에게 속하지 않고 아카이아인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주어질 때조차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다. 아름다움은 자신을 만든 자, 자신을 관조하거나 욕망하는 자에게서도 달아난다.”(p.44) 그리고 헬레네의 변질되지 않는 아름다움은 생에서 시로, 육체에서 대리석 조각상으로 넘어가면서도 그 감동을 잃지 않았다고 아름다움의 신성함에 대해 말한다. 미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전달하는 저자의 능력 덕분에 독자는 안다고 여기던 개념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더 눈부시게 인식한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헬레네를 차지하려 싸운다는 결말, 실상은 판로나 원자재, 비옥한 땅을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헬레네를 놓고 다툰다는 지적은 놀라움을 안긴다.

 

신들의 희극에서는 <일리아스><전쟁과 평화>를 나란히 놓는다. 두 저자에게 진지함의 부재는 인간 이하를 의미하고,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전자의 신들과 후자의 사교계 사람들을 동일선상에 둔다. “트로이에서 모스크바까지에서는 다시 한 번 <전쟁과 평화>를 언급한다. 죽어가는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던지는 환멸 어린 시선과 안드레이 볼꼰스키가 자신의 죽음 너머에 던지는 듯한 시선(p.62)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엿보았던 영원에서, 전쟁이란 무엇인가, 바로 생을 소진하면서 생에 지고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재정의 내린다. 저자는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찬을 놓치지 않는다. 서사시의 마지막 권이며 주제를 견인하는 결말에서 비통함으로 간구하는 노왕과 그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간으로 돌아와 환대하는 아킬레우스를 주목한다. 그리고 고대적 원천과 성경적 원천에서 두 개의 원천<일리아스><성경>을 같이 살핀다.

 

이 책에서 특히 좋았던, 그래서 감탄했던 부분은 톨스토이와 호메로스를 견준 지점이다.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어 보라는 인사이트를 준다.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참전한 안드레이 볼꼰스키 공작이 눈앞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응시할 때다. “멀리 도나우 강 뒤쪽에 푸르게 보이는 산들, 수녀원, 신비로운 골짜기, 우듬지까지 안개가 낀 소나무 숲은 더한층 훌륭했다······저곳은 고요하고 행복에 가득차 있다······‘내가 저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중략) 그런데 여기에는······(중략) 아아, 바로 저것이, 저것이, 지금 내 머리 위와 내 주위에 있는 저것이, 그렇다, 죽음이다······눈 깜짝하는 순간에 나는 저 태양도, 저 강물도, 저 골짜기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1p.290) 관념이 아니라 사실로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저자는 볼꼰스키 공작과 헥토르 왕자를 비교했는데, 앞의 문장에 이어 공작이 마음을 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만약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다면? (중략) 글쎄,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죽음을 맞으리라.(전쟁과 평화 1p.321, 문학동네)” 안드레이 다운 각오인데 지금 다시 읽으니 상당히 헥토르적이다. “하지만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 싶지는 않다. 후세 사람들도 들어서 알게 될 큰일을 하고서 죽으리라.”(일리아스 22303-305/p.633, ) 거의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는 듯하다. 비평가 이반 곤차로프가 <전쟁과 평화>살아 있는 거장이 쓴 러시아판 일리아드라고 칭할 만 하다. 아마도 그래서 레몽 크노가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이거나 오디세이아.”라고 단언했을 테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전쟁이 수없이 반복되어도 다시 두꺼운 서사시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이유일 것이다.

 

모터 달고 달리는 글, 힘이 넘치는 글에서 에너지가 폭발한다. 고전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은 몇 개의 겹이 있어서 저자가 처한 상황, 고통, 불안,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기, ‘그럼에도라는 선언과 다짐이 포개져 있다. 어두운 시대를 향한 제언과 소망, 나아가 구원 요청까지 담겨있다. 숙고하며 전개했을 치밀한 저작은 분출하듯 쏟아져 나오니 타격감을 느낄 정도다. 이 책이 유사한 시기에 <일리아스>를 읽고 쓴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하는데 베유의 시선도 궁금하다. <일리아스에 대하여><일리아스>를 읽은 독자가 언제까지나 안도하며 아낄 책이다. 또한 아직 읽지 못한 독자를 기대하고 열망하게 만들 책이며, 나아가 상상하고 꿈꾸게 할 책이기도 하다. 라헬 베스팔로프,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탁월한 선택과 집중을 보여주는 버릴 글자 하나 없는 아름다운 저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일리아스의 철학, 이 쓰라린 경험의 소산은 원한을 배척한다. 원한은 무엇보다 자연과 실존의 결별이다. 여기서 전체는 부서진 조각들을 이성의 힘으로 그럭저럭 맞붙여놓은 조립이 아니라, 모든 구성 요소들의 상호 관통이라는 능동적 원칙이다. 불가피한 것의 전개는 인간의 마음과 우주를 동시에 극장으로 삼는다. 이야기의 영원한 실명(失明)과는 대조적으로, 시인의 창조적 혜안은 신보다 더 신적이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영웅들을 후대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준다.(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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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목격한 사람 - 고병권 산문집
고병권 지음 / 사계절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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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사람을 목격한 사람(사계절, 2023, 328쪽 분량)은 대신 기록하는 펜, 대신 외쳐주는 앰프. 저자는 이 앰프를 싸구려 앰프라고 칭하지만 성능 좋은 앰프는 무심했던 이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그가 대변하는 이들은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 내몰린 채 고통 받는 사람들이다. 책 표지에는 제목 사람을 목격한 사람을 다섯 번 반복해서 썼다. 앞의 사람은 각각 다른 서체이고 뒤의 사람은 동일한 글씨체다. 앞의 각각 다른 글씨체 사람은 다른 아픔에 처한 채 속수무책 버티고 있고 뒤의 사람은 목격한 증인으로, 목격 이전과는 달라져야 하고 달라지는 과정 중의 사람이다. 표지의 세 개 기호는 사람, 목격하는 눈, 이 둘이 만나 하나가 됨을, 변화를 일으킴을 뜻하지 않을까. 마지막 표기가 자꾸 비로소 쉬게 되는 숨을 연상케 한다. 기관지 절개술로 기도를 확보한 이미지를, 일단 안심하게 되는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고병권은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이며 읽기의 집 집사로 작은 앰프가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의 선봉에 선 지식인이자 행동가, ‘아프고 슬픈 사람, 싸우는 사람 곁의 인문학 연구자이다. 그의 목소리는 독자와 사회를 환기한다.

 

사람을 목격한 사람2018년부터 2023년까지 저자가 쓴 글과 현장에서 행한 연대 발언을 모은 산문집이다. 1<두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홍은전은 심보선 시인의 시의 의미로 시작한다.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라고 한다. 순서를 나타내는 서수를 사람에게 붙이자 슬픔의 진원지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가늠된다. 시인을 제외하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일까. 홍은전 작가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두 번재 자리를 채우는 사람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p.28)이기에 세 번째 네 번째 자리가 과밀해도 두 번째 자리는 회피하는 곳이다. 저자는 서술함으로 독자에게 거울을 건넨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고, 혼자 우는 자가 있다는 걸 알릴뿐 아니라 두 번째 사람을 기록한다.

 

2<아프고 미안한 사람> 구차한 고통의 언어에서는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p.56)는 말에 들어있는 두 겹의 고통, 생리적 고통과 그 상처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한 해석적 고통을 설명한다. 소수자들이 사용하는 변명의 언어는 어떻게 자포자기의 언어에 이르는가를, 우리 사회가 미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미안해지는 일의 원인을 알린다. 3<보이지 않는 사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다가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노동자들(p.96)을 기억하며 저자는 두렵다고 호소한다. 이 호소는 우리 사회 저택 주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주검이 되어도, 주검이 빈 자리가 되어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다. 4<포획된 사람>은 불법 체류자 단속이 초래한 딴저테이 사례를 알린다. “범죄가 법적인 타락이라면 불감은 윤리적인 타락이다.”(p.123)라는 지적은 세계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이 이대로 괜찮은지 질문한다. 5<함께 남은 사람>에서는 코로나 당시 방역 모델과 근대적 주권 모델에 전제된 타인에 대한 표상이 닮은꼴이고 해석한다. “안전을 위해 타인을 무증상 감염자로 간주하라는 방역 지침과 타인을 본성상 늑대로 간주하고 안전책을 도모하는 사회계약론은 멀리 있지 않다.”(p.169)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도 있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는 말도 있음을 강조한다. “공동 격리를 자원한 활동가편에서 저자는 그들로부터 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p.171)을 확인한다.

 

6<싸우는 사람> 죽은 사람의 죽지 않는 말은 네 페이지를 할애하여 유언을 만난 세계의 소회를 담는다. 유언을 만난 세계는 열사 여덟 명이 겪은 차별과 투쟁, 저항 그리고 죽음을 기록함으로 그 의미를 새긴 저작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 장애 운동사에서는 이들 안티히어로(반영웅)’열사이다.”(p.209)라고 쓴다. 7<연대하는 사람>의 첫 강연원고 한국 장애인들의 투쟁 형상은 어디서 왔을까에 앞서 언급한 유언을 만난 세계를 비롯한 <비마이너>3부작에 대하여 부연한다. 애도와 투쟁의 결합인 장례 투쟁이 필요한 이유, 생존에 대한 열정이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과 무관할 수 없다고 밝힌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목격한 사람, 목격하고 절규하는 사람의 구조 요청인 여기, 사람이 있다!”(p.5)에서 살려주세요’(p.322)까지, 그 사이에도 계속되는 구조 요청이 있다, 사람이 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이유는 의도하는 만큼 다듬고 잘라서 보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보는 이가 다급한 자의 손이 닿지 않을 자리인 세 번째, 네 번째 자리를 고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서두에 내가 쓴 글들이란 한두 걸음 떨어져서 보고 느낀 안타까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지만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스피커, 성능 좋은 확성기가 되어 곁에서 동행한다. 글로 새겨 잃어버리지 않도록 묶은 책에서 독자는 니체도 프리모 레비도 잠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정신 승리의 상징인 아Q도 오랜만에 만난다. ‘사람 살려라는 네 글자를 알아듣는 것이 문학이고 철학이라는 저자의 말은 책을 읽고 난 후에 더 또렷해진다. 제목이, 제목의 서체가, 사람과 눈의 간결한 표식이 또렷해진다. 먹먹해지는 가운데 함께의 의미를 묻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함께 사는 곳에서는 잠시 떨어져 지낼 수 있고 얼마든지 혼자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언제든 연락할 사람, 연락해오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잠시 연락을 끊고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격리된 채 고립된 사람들은 살 수가 없다. 제아무리 강한 사람도, 제아무리 큰 도시도 이것을 버틸 수는 없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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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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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영혼 없는 작가(최윤영 옮김, 엘리, 2025, 272쪽 분량)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선집이다. 이번 개역 증보판에는 초판본(2011)에서 아홉 편을 추가하여 모두 스물세 편을 담았는데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에서 정수를 모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정착하여 독문학을 전공한 다와다 요코 문학은 일본어 작품과 독일어 작품이 주제, 형식,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역자는 전한다.(p.268) 일본어 작품이 스토리를 갖춘 본격 문학에 가깝다면, 독일어 작품은 에세이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번 작품집은 후자에 속하는 작가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작가를 향한 호평은 기대를 높이고, 자유로운 여행자이자 집요한 관찰자,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다와다 요코를 서둘러 만나고 싶게 한다.

 

<유럽이 시작하는 곳>은 화자가 동 시베리아 항구까지 배에서 보낸 시간과 유럽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백 육십 시간의 기록을 모았다. 기록은 여행 일기, 여행이 끝난 뒤에 지어낸여행 일기, 여행기와 상상, 배의 도서실에서 본 지도, 동화 모음집, 잠에 빠져들며 들었던 옛 이야기,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추천 받았다는 지혜로 가득 찬 소설, 화자가 썼던 소설의 한 부분 등을 포함한다. 이야기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화자는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하고 마침내 도착한다. 기록 중 등장하는 시베리아의 숲처럼 지혜로 가득 찬 소설, 모스크바를 도서관이 중심인 도시로 각인케 만든 책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엄마말에서 말엄마로>는 독일로 이주한 작가가 필기도구와 문구류를 소재로 언어의 독특한 차이, 언어를 선물해준 타자기에 대한 회고를 담았다. 특히, 유년 시절에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서술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표제작 <영혼 없는 작가>는 독일어 단어 에서부터 연상의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방은 공중전화 부스인 전화 방, 고해 방, 작가의 서재로 이어진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를 기다란 빵과 물고기와 견주고, 영혼이 그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동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내가 겪고 쓰는 모든 것은 영혼의 삶과 부합한다.’(p.52)는 문장이 여운을 남긴다. 작가가 영혼이 없을 수 있을까, 영혼을 정신과 등치시킨다면 오히려 영혼 지킴이, 영혼 수호를 사명으로 하지 않을까. ‘영혼 없는 작가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에 대해 작가는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어서 비행기로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동화적인 이유를 독자는 곱씹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중세도시 관광여정의 짧은 스케치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독일 수수께끼>는 진짜 독일 인형인 호두까기 인형과 다양한 인형들 이야기를 보여준다. <통조림 속의 낯선 것>은 읽기와 이해, 오해와 불일치 등을 다양한 대상과 소재로 연결시킨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p.83)라는 문장은 독자를 멈추어 생각하게 만든다. 말 뿐인 말, 말을 위한 말, 의식을 거치지 않은 소리에 가까운 말을 비롯해서, 유창함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한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지만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감각과 언어가 맺는 타성을 직시한다.(p.88)

 

<부적>은 의심과 회피, 경계와 자기방어의 영역이 서서히 겹치다가 분리되는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전철에서 책 읽기>는 제목 그대로가 주제인 일종의 관찰이자 고찰문이다.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봤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멋지게 펼친다. <사전 마을>도 발상의 전환, 상상의 거침없음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어 원전과 독일어, 한국어 번역을 함께 실었다. <귀신들의 소리>에서 작가는 어린시절 가면극의 북소리를 회고하며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무엇이었던 음악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소리가 품고 있는 여러 겹의 소리가 낯설고 이질적이라 작가는 계속 자문한다. 연상은 불꽃의 갈라지는 끝자락, 이중의 혀를 지나 부조화의 다성성을 상징하는 인물 악마’(p.182), 바흐의 칸타타에 등장하는 단어에 이른다. 바흐 음악회 감상 후 우리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p.183)라는 질문에 편을 나누어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함의를 지닌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독자 역시 일상에 배어있는 관습적 사고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각성의 순간은 때때로 등장한다.

 

<번역가의 문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에서는 문학의 번역 가능성’, 번역본 또한 문학일 수 있는지를 숙고한다. 작가는 파울 첼란의 시 원전과 일본어 번역본의 관계를 시를 직접 인용하며 첼란의 시들이 일본어를 들여다본다는 인상은 더욱더 강해’(p.195)진 근거를 밝힌다. 첼란의 단어들이 보관 용기가 아니고 열림이라는(p.200) 발견, ‘단어 하나를 쓴다는 것은 문 하나를 연다는 것이며 글자 읽기는 단어 읽기이지 문장이나 음향 읽기가 아니라는(p.201) 통찰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독자는 작가의 세심함 덕분에 경이로운 세계를 잠시 엿본 듯한 기분에 잠긴다.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에서 작가는 프랑스 시인의 시 원전을 받고 배우지 않은 언어는 투명한 벽’(p.216)이라고 생각한다. 초벌 번역본을 받기 전의 기간을 며칠 동안이지만 읽을 수 없는 원본과 같이 살았다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짐작하고 추측하는 알지 못하는 문자를 낯설게 동시에 기대하며 기다리는 풍경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영혼 없는 작가는 정좌하고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있어도 내내 흔들리며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여행 중이고, 그 여행길의 동반자로 독자를 택했다. 독자는 이름 모를 여행지의 예기치 않은 날씨의 변화, 분위기나 낯선 풍경에 반복해서 노출된다. 지도도 정보도 없이 무작정 작가를 따라 나선 채, 길 위에 서서 띄엄띄엄 행하는 독서, 급하게 넘기는 페이지, 여운을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이야기로 서둘러 뛰어들 때의 불안과 조급함, 뜻밖에 발견한 보석을 주어 담을 새 없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동 등이 그의 작품을 읽으며 부차적으로 얻는 수확, 또는 경험이다. 작가의 아이같은 상상력이 때론 천진하게 다가오고 유머와 위트는 생기를 부여한다.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세계는 휘리릭 지나가는 듯하나, 상당히 정교한 일침들이 박혀있다. 유년 시절에 단어는 어떤 힘을 갖는지(p.46), 원본 없는 번역이 일어나는 인간의 몸과 태어날 때 주어지는 원본 텍스트 보존 장소인 영혼(p.55), 모어 유창자를 볼 때 경험하는 구역질, 포장과 내용물의 불일치, 단어와 이미지의 괴리, 파울 첼란의 시 탐구에서 원전과 번역의 불가사의한 연결, 번역을 염두한 창작 가능성 등 이야기는 독자를 매혹한다. 단어, 텍스트, 의미, 소통으로 이야기는 무한히 확대된다. 공간을 차지할 때 작가는 이방인으로 때론 정착민으로 존재하며 투명하게 움직임과 쉼을 누린다.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관찰자적 시선, 적극적인 기록자 시선, 깨어 있는 의식, 그렇게 무한히 수집하는 순간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고 에너지가 가득하며 거침이 없다. 그렇게 고요하고 소란한 즐거움을 책에 저장했다. 영혼 없는 작가는 다와다 요코의 세계로 들어가는 빼어난 입문서 또는 초대장이 되어줄 것이다.

 

 




책 속에서>


유년 시절에는 단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모든 단어가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삶은 단어를 문장 내의 의미에서 해방시켜준다. 심지어 어떤 단어들은 너무나 생명력이 넘쳐 마치 신화속의 인물처럼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p.46)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사람과 삶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 그들은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나도 살고 있고 나의 삶도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도 삶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글을 쓸 때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은 비뚤어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인간을 중심에 세우기 위해서 던지는 것이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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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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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김선욱 감수, 김명철 옮김, 와이즈베리, 2014, 2009, 444쪽 분량)는 마이클 샌델의 정치 철학 강의를 통해 우리 사회에도 정의라는 화두를 던졌다. 책은 2010년 처음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정의 바로 세우기의 지침서가 되었다. 저자는 집필의 목적을 정치 역사 또는 사상사를 다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p.55)고 밝혔다.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정의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숙고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여러 관점과 입장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라는 제목의 첫 장은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바로 복지, 자유, 미덕인데 그 중 복지의 극대화에 영향력 있는 견해는 공리주의다. 정의의 원칙을 추론하기 위하여 저자는 폭주하는 전차즉 트롤리 딜레마를 예로 든다. 두 번째 사례 또한 민감한데 저자는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정리해아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p.53)이며, 행동의 세계와 이성의 영역이 소통하는 방식이 도덕적 사고의 근간을 형성한다고 전한다. 2장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벤담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p.63) 일반적 복지를 증진시키려는 시도는 반박을 부르는데 계약과 희생양이라는 논점을 제시하는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소환한다.

 

3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자유지상주의편에서도 주장은 갈린다. 경제 불평등은 부당하므로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이들과 자유로운 선택으로 얻은 부는 부당하지 않다는 이들이 있다. 정의를 행복의 극대화라고 보는 시각에서는 부의 재분배 주장을 옹호하지만 반박도 존재한다. 두 가지 반대 주장이 있는데, 그 중 자유지상주의자는 부자의 세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재분배하는 행위는 자신의 소유를 원하는 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댄다. ‘자신은 자신이 소유한다는 생각’(p.114)은 선택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데 설득력 있지만 위험한 지점이 존재한다. 저자는 장기 거래와 안락사의 예에서 자기소유의 개념을 좀 더 살펴본다.

 

4장은 자유시장은 공정한지, 돈으로 살 수 없거나 사면 안 되는 재화는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논의한다. 5장에서는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살펴본다. 칸트는 정의를 이해하는데 공리주의 접근법과 미덕에 기초한 접근법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기에 거부하고 대신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접근법을 지지한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p.166)이라는 데서 찾는다. 그는 쾌락과 고통이 인간의 통치권자라는 벤담의 주장에 반대하며 그 자리를 이성에 내어준다. 이성과 자유, 두 가지 능력이 합쳐졌을 때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여긴다. 칸트가 세 가지 주요 개념인 도덕, 자유, 이성을 대조 혹은 이원론적으로 설명한 사항 중에서 가언 명령과 정언 명령의 개념과 다른 어떤 동기도 없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명령을 내리는 실천 법칙’(p.183)인 정언 명령 소개는 인상 깊다. 칸트의 3대 비판서 정독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장이다.

 

6장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할 것인가를 질문한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시작한다. 롤스는 무지의 장막뒤에서 선택한다는 가상의 사고 실험을 통해 사회 계약의 개념을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 합의라고 보았다. 7장은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반발하는 입장과 지지하는 입장을 살펴본다. 지지하는 이유의 세 가지 근거는 표준화된 시험의 격차 또는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과거의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학교와 사회의 공동선을 앞세워 다양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영예,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와 결부되어, 가망 없는 의견의 차이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에 관한 논쟁이 논란에서 벗어나 정의와 권리의 기본을 찾기 원한다는데 주목한다. 칸트와 롤스의 철학이 그 기본을 찾으려는 시도였다고 정리한다.

 

8장 정의와 도덕적 자격 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함께 본다. 근현대의 정의론이 공정성과 권리를 앞에서 언급한 영예, 미덕, 도덕적 가치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좋은 삶은 연관될 수밖에 없고 정의는 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추론을 따라가며 재화와 배분, 정치의 목적을 열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한 것’(p.288)으로 공동선을 고민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보살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언어는 선을 식별하고 고찰하는 매체로 본다. 9장은 충성심의 딜레마를 다루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를 묻는다. 사과와 손해 배상,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느냐는 논쟁은 지금도 첨예하다.

 

저자는 10장 정의와 공동선에서 앞서 언급해온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요약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철학, 자유지상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향한 존 롤스의 주장,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p.379)으로 저자는 이 중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고 밝힌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p.380)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전망한다. 도덕적 이견과 차이에 도전하고 때론 경청하며 직접적으로 참여하자고 촉구한다.

 

책은 어쩌면 인류와 함께 태동하고 동반해온 정의에 대해 환기시키고 숙고하도록 돕는다. 최고선으로 여겨지는 원칙은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른 면을 보여주고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저자는 정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다양한 사례와 함께 과정을 보여준다. 사고실험과 실제 에피소드를 배치하여 현실과 이론의 충돌, 선택하기 힘든 딜레마 상황을 제시함으로 독자는 생각과 행동, 선택과 주장에 한 번 더 숙고하거나 귀 기울이는 경험을 한다. 주제가 심화되고 장이 바뀔 때마다 매끄러운 정답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결말 부분의 총평으로 다음 장의 질문지를 받아볼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책을 읽으며 칸트의 철학을 간략하게나마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정의라는 화두로 주요 철학 사상을 연결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점을 책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p.326)라며 서사라는 관념을 제시한 매킨타이어의 견해는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를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 분리 가능하다라는 추론은 잘못이다”(p.329)라는 주장은 공감이 되었다. 서두에 저자가 밝혔던 책의 목적, 정의에 대한 견해 정립 후 비판적 검토를 통해 깨닫고 통찰한다는 목적은 저서의 구조를 따라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훈련의 장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된다. 쏟아지는 사례와 논리에 답하느라 부지불식간에 긴장하고 입장을 생각하게 만드는 저서로 토론할 때 더 빛나는 책이 될 것이다. 공론의 장을 통과해 정의가 추상적 개념이 아닌 매순간 선택함으로 성취하고 실현하는 성장의 고리가 되지 않을까. 유익하고 흥미로운 샌델의 저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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