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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평점 :
지금부터 <오뒷세이아>를 읽겠다, 라는 자발적 의지와 계획으로 시작한 여정이 아니다. 함께 읽기로 폈던 <일리아스>는 ‘함께’였음에도 중도에 멈추었고, 바라만 보아도 부담스러운 벽돌이 책상 한편에 놓인지 3년이 되어갔다. 시립 도서관의 공지문은 그때 올라왔다. 매년 봄이면 한 번씩 강의를 오시는 이권우 교수님의 올해 강좌는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 깊게 읽기”였다. 4차시 8시간 강독에 참여하며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 계속 읽는 중이다. 교수님은 3회독 후에 다른 판본으로 읽기를 권하셨고, 그래서 이준석 교수 번역본을 준비해두었다. 도서 마련이 여전히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 듯하다. 읽고 질문하고 쓰는 일련의 후속 행위는 감탄과 고민, 인내력과 너는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무엇을? 이해, 해석, 비판적 읽기, 재해석, 적용, 기록으로 1차 매듭짓기-를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의 바퀴를 돌리고, 모양새야 어떠하든 결과물 한 편을 요구한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5, 672쪽 분량)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 오뒷세우스의 10년에 걸친 귀향 여정을 노래한다. 1만 2110행, 24권으로 이루어진 고대 서사시는 작품 시간 배경을 제외하면 <일리아스>의 후속편이 아니다.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음으로 호메로스 세계로의 진입 장벽은 확실히 낮아졌다. 리듬을 타듯 즐거움도 베어 나왔고 장편 대서사시는 그 옛날 그 대단한, 나와 별 상관은 없는 영웅 후일담에서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응원하게 되고 가끔 폭삭 스며들며 이입하게 만드는, 모든 이에게 가능한 여정으로 보편성을 획득해갔다. 주인공은 출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서핑하듯 균형을 잡는다.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왼발에 힘을 줄 때, 다시 무게중심을 오른 발로 옮길 때 아슬아슬한 짧은 순간마다 독자는 참여한다.
출렁이는 난바다는 괴물이나 역경을, 유혹이나 저주를, 올가미나 술수를 숨긴 채 질책하고 시험하고 행동과 반응을 지켜본다. 판단과 결정을 확인한다.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은 역설적 이름인 ‘아무도 아닌 자(nobody)’를 대고 위기를 탈출하나 곧바로 정체를 밝힌다. 나 오뒷세우스요! 이 사건은 주요 실책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부른다. 이타케의 왕 오뒷세우스로 자기정체성을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년이다. 대단한 업적이나 성취가 아니라 어긋남을 바로잡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호기심도 꾀도 많았던, 자랑거리도 충분했던, 의지할만한 지위와 신분도 갖추었던 왕은 무명의 방랑자라는 낯선 입지 위에 자기 역사를 다시 세워야 한다.
구조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서사시의 구조 역시 독자를 집중시킨다. '오뒷세우스의 노래‘를 의미하는 <오뒷세이아>는 첫 네 권에서 텔레마코스의 성장을 다루며 ’텔레마키아‘ 라고도 명명한다. 5~12권까지는 먼 바다에서 일어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담고 있는데 9권부터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며 시간을 압축한다. 13권부터 24권까지 귀향한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하고 집안의 조력자들을 찾아내 징벌을 가한다. 흩어진 가족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가정이 회복되는 서사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목적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등 고통스런 과정을 잇댄다. 작품의 시작과 끝은 신들의 개입이 눈에 띈다. 올림포스 신들의 회의에서 아테나 여신은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촉구하고, 신들은 제안을 받아들여 ’귀향‘을 확고한 결정으로 합의한다. 오뒷세우스는 물론,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의 행동과 결단에는 모습을 달리한 신들의 의도가 작용한다. 오뒷세우스의 이타케 귀향과 복수 후, 다시 시작하려는 또 다른 복수극은 제우스와 아테나의 적극적 개입으로 중지된다. 신들의 지분은 여전히 많고 중대하나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서사는 아니다. 호기심도 자신감도 충만했던 오뒷세우스는 인내하는 자, 신중한 자의 면모를 축적해간다. ‘지략이 뛰어난‘이라는 수식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이에 걸맞는 자로 성장해간다. 자기 의지와 자의식을 세공하듯 단련해간다.
<일리아스>의 원전 첫 단어가 ‘분노’, 즉 아킬레우스의 분노인데 반해 <오뒷세이아>는 ‘한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서 중요한 첫 단어는 주제를 간직한다. 한 사람의 10년에 걸친 정체성 회복의 여정은 3천 년이 지난 지금 책을 펴는 새로운 독자에게도 빛바래지 않은 질문을 건넨다. <일리아스>의 인물들은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 분투하지만 <오뒷세이아>에서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영원한 삶을 구하는 건 아니다. 요정 칼륍소에 의해 오귀기에 섬에 7년간 붙들려 있던 오뒷세우스는 ‘바로 이곳에 나와 함께 머무르며’, ‘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질 거’(p.140)라고 그의 체류를 희망한다. 고향 땅에 닿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지를 그가 ‘안다면’ 다른 선택은 어리석고 불가하리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오뒷세우스는 이미 많은 고난과 고생을 한 바에 이번 고난이 추가됨에 게의치 않는다고 답한다. 필멸의 삶을 선택하고 불멸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오뒷세우스는 그가 맞서고 애쓰고 전력을 다하는 생의 과정 자체를 숭고하게 여긴다. 유한한 삶과 그 안에서의 성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역설한다.
고대 그리스의 환대문화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는 정체를 숨기고 거지 모습으로 찾아온 오뒷세우스에게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p.357)며 반긴다. 텔레마코스는 아테나의 조언대로 귀향을 준비할 때,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는 예언자 테오클뤼메노스가 다가와 도망자로서 탄원한다고 승선을 청하자 허락한다. ‘이타케에서 우리는 그대를 최대한 환대할 것’(p.370)이라는 말도 보탠다. 강대진의 <오뒷세이아 읽기>에 따르면 이 행동은 역시 고향을 떠난 자기 어버지도 무사히 배에 실려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한다.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고대의 믿음이다.”(p.439/<오뒷세이아 읽기>,강대진)라는 걸 알 수 있다. 텔레마코스의 여행 목적에서 이런 고대의 믿음은 주술적 행동으로 읽히기도 하고, 그럼에도 환대의 차원은 상당하다. 신화로부터 온 에피소드를 관련 예술작품들과 비교하며 읽는 일도 즐거움을 준다. 오뒷세우스가 알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아와 만날 때, 공주가 던진 공이 소용돌이로 굴러가는 장면은 그림형제가 수집해 펴낸 <개구리 왕자>의 원형이라고 한다. 장 베베르의 ‘오뒷세우스와 나우시카’는 이 순간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고난도 신이 주셨으니 참고 견디라는 말이나 불운한 탄원자가 받을 도움 등 나우시카아가 건네는 말도 인상적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나 유혹을 마다하고 귀환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결같이 나아간 주인공은 자기 분량의 성장을 이뤄낸 가족과 마주한다.
시간 순행적 구성이 아닌 회고가 반복되는 교차서술은 관객 또는 독자를 더욱 몰입과 상상의 장으로 이끈다. 어떤 회고는 환상계를 신전처럼 묘사하고 11권은 ‘저승’이라는 제하에 키르케의 명대로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듣기위해 떠나는 오뒷세우스 일행을 볼 수 있다. 한 눈에 오뒷세우스를 알아본 테이레시아스는 그가 ‘꿀처럼 달콤한 귀향’(p.267)을 바라겠지만 어떤 신, 포세이돈이 힘든 귀향길을 정해두었다고 전한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떼를 해치지 않는다면 고생은 해도 이타케에 닿을 것이나 만일 해코지한다면 파멸을 예언할 수밖에 없다고. 그대는 벗어나도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금기를 헤아린다. 금기를 지키겠다는 인간 의지와 이성은 인내와 절제하는 마음에 힘입어 시도하지만 상황은 급하게 변하고 합리화의 회로를 돌린다. 문명을 지탱하는 힘이 욕망의 충족이 아닌 금기를 지켜내는데 있다고 할 때 지금 우리 목전에 놓인 금기는 무엇인지 헤아리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레몽 크노는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거나 《오디세이아》다”라고 했다. 두 서사시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기원전 8세기경 창작된 이후 계속 공연, 전승되고 확대, 변용, 재생산되며 서양문화의 보고로 각 세대의 삶을 조명한다. 비현실적인 사건에서도 전조와 복선은 경고하듯 깔린다. 과도하게 치닫는 욕망은 화를 부르고 돌이킬 시점과 기회를 박탈한다. 오뒷세우스 가족의 성장 서사는 각자의 경로를 모험하며 시너지를 낸다. 장성한 텔레마코스의 수식구는 ‘슬기로운’으로 바뀌고 페넬로페의 베짜기는 오뒷세우스의 트로이 목마와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어린 텔레마코스와 구혼자들이 1:108로 맞붙는 대결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판세는 서서히 바뀌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정적 순간을 맞고 복수의 장은 처참하고 징벌은 엄혹하다. 이토록 광활한 공간 여행, 다층적인 에피소드의 중첩,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의 조우가 촘촘하게 쌓여있는 이 서사시는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고 성찰케 만든다.
<오뒷세이아>는 성장소설의 원형이며 동시에 모험담의 시조다. 고대 서사시로부터 파생한 작품도 무수하고 논점도 첨예하다. 귀환길에 오뒷세우스가 행한 일종의 약탈 행위나 귀환 후 시녀들 처형도 또 다른 문학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영향력은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어 의식과 무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여전히 구술한다. 강대진, 이준석 교수 등의 해설서나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도 함께 읽을 책으로 추천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나 아도르노 공저작 <계몽의 변증법>도 <오뒷세이아>를 다룬다. 찾아 읽을 저작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 전시가 2027년 3월까지 열린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하데스로 가는 문’이었는데 작품에서 내내 활약하는 아테나 여신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으며 다녀와도 좋을듯하다.
무엇보다 내년 개봉 예정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 <오디세이아>는 기다리는 시간까지 선물과 다름없게 만든다. 탐 홀랜드의 텔레마코스,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라니 놀라운 놀란 감독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무엇이 될까, 페넬로페가 제안한 활쏘기 장면일수도.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 화살을 줌통 위에 얹더니 시위와 오늬를 당기며 똑바로 겨누고 쏘아 도끼 자루 구멍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으니, 청동이 달려 묵직한 화살이 그것들을 모두 꿰뚫고 지나간 것이다.”(419-423/21권, 활) 화살로 열두 개의 도끼를 모두 꿰뚫는 이 장면일까. 훌륭한 장면이야 워낙 많을 테니까 기대치는 계속 올라간다. 시인은 여전히 <오뒷세이아>를 통해 목소리를 전한다. 후세에게 쉬지 않고. 필멸의 조건을 수용하는 누군가에게, 영생의 편에 서있는 누군가에게 고루 혜안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작품 자체가 지략이 뛰어나다고 할 수 밖에. 다시 읽기 위하여 우선 1회독을 권한다.
제1권 신들의 회의 후 아테네가 텔레마코스를 격려하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시들을 보았고 그들의 마음을 알았으며
바다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전우들을 귀향시키려다
마음속으로 숱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애를 썼건만 그는
전우들을 구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못된 짓으로 말미암마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보들이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떼를 잡아먹은 탓에 헬리오스 신이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
여신이여, 제우스의 따님이여, 우리에게도 들려주소서!(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