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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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읽었던 책의 제목은 <생의 한가운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는 <삶의 한가운데>는 어제 읽은 듯이 생생하고 외우다시피 하는 문장 또한 상당하다. 니나 부슈만의 투신하는 삶은 지독할 정도였고 그래서 더 빛이 났으며 근접하기 어려운 차원이라고 여겼다. 전혜린 번역이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어서인지 작가인 루이제 린저와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 니나 부슈만, 그리고 전혜린까지 연결되면서 범접 불가한 열정과 순수, 뛰어난 실력이 하나의 이미지로 섞여 들었다.

 

삶의 한가운데(박찬일 옮김, 민음사, 1999, 1950, 382면 분량)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자전적 소설로 니나 부슈만이라는 아이콘이자 전형을 완성한다. 니나에게서 분출하는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더 많이 알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용기 있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과정을 견인할 뿐 아니라 잦아들지 않는 동력을 제공한다. 루이제 린저는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토마스 만으로부터는 시대악과의 싸움에서 뛰어난 용기를 보인 작가라고 평가받았다. 나치의 억압으로 교사 해직 통보를 받고, 나치 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에 더해, 히틀러에 저항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 문학가로 행세하며, 독일의 잔 다르크가 되길 원했(주간조선, 박광작, 2017)으나 본모습은 친 나치주의자라는 무리요의 평가가 추가되며 놀라움을 안긴다.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는 니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며칠간을 함께 보낸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p.7)라는 첫 문장에서 후자에 가까웠던 마르그레트가 동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소설은 담고 있다. 동시에 언니 마르그레트도 니나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서서히 발견한다. 오랜 시간 니나를 사랑하던 슈타인이 죽은 후 니나의 집으로 배달된 그의 일기와 편지, 메모와 공백까지 함께 읽어나갈 때, 슈타인 역시 니나를 거울삼았고, 그뿐 아니라 사랑의 유일한 대상, 삶의 이유이자 이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문턱을 넘어왔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야 하리라.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p.43) 1929915일자 일기는 슈타인의 미래를 예견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지 18년째 되는 날, 삶이라는 여정을 맺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죄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비겁해서라기보다는 유약해서였다고, 끝없이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목소리와 모든 경우의 장단점을 고려하라는 명령이 결단을 막았다고 스스로 변호한다. 그의 내면에는 멈추는 법 없는 북소리,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니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니나는 수선화와 빨간 장미를 좋아하는 건 물론, 많은 것을, 아니 모든 것을 좋아하는데 심지어 몹시 저주스러운 이 삶”(p.15)까지 좋아한다. 풍만함이나 포만함은 참을 수 없는 대신 공포와 불안에 흔들릴지언정 미지의 가능성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다. 당면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중요하다. 일신상의 편안함은 고려 조건이 아니었기에 당면한 일을 수행한다.

 

니나는 흘려버리고 말 일상도 순간마다 붙들고 그 안의 감정과 의미를 들여다본다. 삶에 산재해 있는 여러 관념을 명명하고 각각 분리하기 원한다. 사랑은 무엇인지 행복은 무엇인지 재정의한다. 사랑과 정열의 차이, 행복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고, 결혼의 의미와 결혼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의무나 당위, 제반 사항을 탐색하며 관계 맺는 일에 대하여 질문한다. 멋진 순간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던 니나는 그런 삶을 살아냄으로 직접 확인하기 원한다. 처음에 그녀에게 삶이란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p.55)을 의미했다. 그녀에게 삶이란 점차 약속을 지키는 것,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일로 확대되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 전쟁에서 비롯한 거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 무엇보다 제대로 된 글을 쓰고,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된다.

 

소설은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니나를 잃은 슈타인의 슬픔은 만져질 듯이 표현된다. 그리고 이 절망이 바닥을 치고 오르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지 않았다.”(p.304)고 자신과 대면 후에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한다. 정화되는 심정과 각성 끝에 감사에 이른다. “나는 니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쪽을 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한다.”(p.305) 이 감정은 곧 곤두박질하지만 그는 운명이라 여기고 운명을 종결짓는다. 보편과 극단을 아우르며 마음의 움직임과 파생되는 인간의 감정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다 꼽을 수 없지만 소설가인 니나가 가지고 있는 글에 대한 태도는 빼놓을 수 없다. “누구든 그가 쓴 것과 똑같아. 이걸 분리시킬 수는 없어.”(p.130)라고 단언한다. 살기로 결심한 즉시 실행에 옮기는데 바로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니나에게 산다는 것은 곧 소설을 쓰는 것이다. 책 속의 책인 니나의 소설에서는 그녀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는 어때야 하는지 밝힌다. 소재가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맷돌에 갈고 또 가는(p.164) 이유, 곧 값싼 효과를 허용함으로 빨리 타락하는 일을 방지한다는 원칙도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조건이다.

 

소설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니나와 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용감한 인생 탐구자인 니나와 함께 삶의 의미, 추구할 가치,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을 향한 여정에 돌입하게 된다. 슈타인과 니나의 글은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고 지그재그를 그리듯 엇갈리며 배치되어 있어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다행히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이를 상쇄하는 요소다. 대화와 서술이 섞여있고 공간적 배경도 글에 따라 현재와 과거를 왕래한다. 화자인 언니가 대강 펼친 뒷부분을 먼저 읽기도 하기에, 결말에 다가가다 앞으로 다시 거슬러 읽는 일도 생긴다.

 

그와 같은 수고는 글로써 남겨진 자의 흔적을 쫓을 때 일정 부분 정성으로도 간주된다. 어쩌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슈타인 박사만이 아니라 폭력의 무참한 시기에 희생양으로 사라진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일수도 있겠다. 재확인한 작가의 행보가 지금까지처럼 몰랐던 게 나았겠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다시 읽은 작품이 다시 잃은 작품이 되었나 생각할 때, 작품은 작품으로 남겨두고 싶다. 온통 의지와 정신으로 형성된 듯한 니나는 새롭게 질문을 시작한다. 니나 부슈만은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며 곧바로 실천할 태세다.

 

 

 책 속에서>


-그러니까 니나가 밤새 쓴 것은 편지가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피로와 절망, 이별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약속.(p.149)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 혹은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것을 숨기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한 후 일생 동안 그 이자를 갚아가며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도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p.144)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p.166)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신을 보고 전율한다.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도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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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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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한 적도 없는데 요즘 하는 일이 일관된다.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전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전작 <맡겨진 소녀>를 읽었다. 이제 김애란 차례다. 배송중인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데뷔작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이쯤되니 남들 다 읽을 때 읽자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전작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도 일종의 병이나 편견이라고 유연하자 허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지금 A를 읽기 위하여 전작인 -A 또는 그 전작 -AA, -A (마이너스 무한대 A라고 읽어야 하나)를 더듬어 읽을지 모르겠다. 역행하여 오르는 사이에 근육이 붙을 날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위하여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펴는 일은 당연과 강박 사이에 부유한다.

 

김애란의 첫 번째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2005, 268면 분량)는 자기만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의 분투를 이야기한다. 치열함은 분투의 기본값이지만 애쓰다 지쳐 분노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관조하고 웃어넘기면서 다음 페이지에 희망을 남겨둔다. 다음 페이지를 누군가 대신 써줄 수 없고 내일을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속임수나 부조리와 맞닥뜨리는 시기는 몇 세부터 몇 세 사이, 어릴 때 제외, 주로 사춘기 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왜 아버지는 달려 나가셨고, 어머니는 안 계시며, 나는 복어의 독을 이겨내야 하는지 당면한 문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아버지는 잠깐만 있으라 하고 돌아오지 않는지, 왜 나는 잠 못 드는지, 불면의 원인 해결이 중요한지 증상 완화가 먼저인지 알고 싶다. 혼자 깨우친 한글로 비로소 완성한 세계, 필연의 작품은 왜 기필코 붕괴돼 버렸는지, 그녀들은 자기만의 방에 기거하는지 내가 그녀들의 방에 침범하는지, 애초에 나는 복제품 중의 하나인지, 익명은 실존의 극단이고 허상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집중한다. 두려움을 떨쳐내며 한 번 더 집중한다.

 

한국 문단의 새로운 이름을 기억하자는 찬사를 비롯해 수많은 감탄 속에 등장했던 작가 김애란은 한국일보 문학상의 최연소 수상(2005)을 시작으로 여러 상을 받아왔다.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 등으로 꾸준히 독자를 만나왔으며 얼마 전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출간했다.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는 데뷔작 후기에서 문학이 신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다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그의 소설은 추앙의 별은 아니지만 정직한 바람, 간절한 갈망을 추려내 담는다. 간절함을 갈무리하는 방식은 비장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고 확성기를 통과시켜 사실을 증폭시키는 일은 더더욱 없다. 마지막의 너털웃음이나 침묵은 적절한 매듭으로 묶이고 스스로를 침잠케 하거나 매몰시킬 유혹의 여지를 없앤다.

 

소설집은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부터 등단작인 <노크하지 않는 집>까지 아홉 개 단편을 묶었다. <달려라, 아비>의 아버지는 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날 집을 나가 의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화자인 나는 그가 달리기하러 집을 나갔다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p.15)고 선언한다. ‘는 아버지의 지구별 무한 경주를 자신이 입혀드린 야광 바지로 식별해 내고 띄엄띄엄 마음으로 동행한다. 혼자 남겨진 어머니는 비장함이나 분노로 딸을 키우는 대신 농담으로 키웠고 농담은 어머니의 가장 큰 유산인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과 조화롭다. 곤란과 고단과 억울은 할당받은 자기 영역 밖으로 흘러넘쳐 결국은 비극적 파장을 짙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설은 다른 전개를 보인다. 마지막 온점까지 읽고 났을 때 따라오는 건 감탄이다.

 

편의점을 배경으로 현대인의 일상을 성찰하는 소설이 인기였다. 편의점은 마치 하얀 도화지처럼 어떤 사연, 어떤 인물에게도 공평한 배경을 제공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어쩌면 많은 편의점 노벨의 시조다. 편의점이 변주를 시작하면 동네 사랑방 같은 다정함도 투명한 벽으로 칸막이 치는 싸함도 무난하게 완성할 수 있다. 어느덧 이십여 년 전인 2003년의 편의점 풍경은 이십 대 청춘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할 때 중요한 장치이자 상징이 된다. 불안과 부담 사이, 침해받지 않을 자유와 안부 물을 공존 사이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스카이 콩콩>은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일상을 그린다. 불통과 일탈, 다시 화합도 그린다. 집 앞에 서 있는 오래된 가로등은 가족을 내려다보는 무심한 목격자부터 기적을 공유하는 증인까지, 꿈과 상상,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스카이 콩콩이 보이지 않는 날개를 선사했다면 가로등은 어떤 가능성도 지지하겠다고 윙크한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는 불면증에 대응하는 백 한 가지 방법을 연상케 하면서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동거하게 된 아버지 일화를 보탠다. 아버지는 불청객이면서도 종국에는 불쌍해지는데 나와 아버지 중에서 누가 더 불쌍한지 독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의 인사>는 네스호 괴물 네시의 출몰과 약속을 저버리고 사라진 아버지와의 조우를 나란히 놓는다. 우연한 조우가 단 한 번의 사랑의 인사를 하기 위한 아버지의 선물이라 여겼지만, 극적으로 맞닥뜨린 그 아버지는 예전부터 유일하게 잘해왔던 일, 즉 내 앞에서 사라져가는 일”(p.160)에만 충실하다. 아비가 달리는 일에만 충실했듯이. 상실은 또다시 출발점에 서나 상실감을 느끼는 일은 그만 마다한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에서 나는 소리친다. “아버지 좀! 그러지 말고 말해보세요. 진짜 이야기를.”(p.183) 지금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아버지. 부자의 대화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진심으로 채색된 꿈자리를 편다. <종이 물고기>는 이야기의 변신, 글쓰기의 가능성을, <노크하지 않는 집>은 대학가 한 건물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지내는 화자가 겪는 어긋남을 보여준다. 예측은 빗나가고 몸 둘 바 모르겠는 순간은 느닷없이 도착하고 있다.

 

이토록 즐거운 소설 읽기라니. ‘즐거운이라는 낱말은 의미있는’, ‘특별한’, ‘새로운’, ‘매력 넘치는’, ‘웃픈’, ‘짠한으로 계속 바뀐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어가다가도 한 번씩 뭉클할 때면 그대로 멈춘다. 웃음과 낙관 사이에 마음 추스르고 나아가려는 의지는 부단히 개입했을 것이다. 소설의 들은 현재의 , 내가 처한 조건을 선택한 일이 없으나 최대치의 성실로 하루를 잇대어 살아 나가야 한다. 불안정한 관계와 불확실한 소통에도 지지 않고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빛을 발한다. 놀이처럼 게임처럼 숨바꼭질 또는 숨은그림찾기처럼 긴장과 느슨함을 왕래할 때 가끔 가로등의 윙크도 받는다. 유쾌하고 매력 넘치는 문장은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안긴다. 한 편씩 아껴 읽은 이야기가 소중하다. 남들 다 읽을 때 읽기를 미루지 말자, 이 무슨 시간 낭비이며 뒷북인가 싶은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높아지는 지수가 있으니, 딩동,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알람이 울린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설렘 지수는 높아진다.

 

 




책 속에서>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 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p.60, 스카이 콩콩)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 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p.81, 스카이 콩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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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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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독서여정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모호하고 한계 없는 질문에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내가 인식한 첫 책은 <데미안>이었고 이전의 모든 앎과 앓이는 <데미안>를 위한 준비였다고 돌이켜 생각한다. 때로 데미안과 헤세는 혼동되기도 하였고 혹시 다시 데미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헤세의 소설들을 한권씩 찾아 읽었다. 녹턴이 귓가에 끝없이 울리던 짧은 에세이부터 <유리알 유희>까지 헤세의 글에 숨은 또 다른 데미안 찾기는 계속되었다. 헤세는 시로, 구름으로, 노을지기 시작하는 저녁의 부드러운 서정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치열하고 논리적인 기준점과 선택지, 신생 이론으로 답을 요구할 때도 많았다. 내가 선망하는 쪽과 내가 처한 쪽은 한 번도 자리 바꾸는 일 없었고 한결같이 스스로를 데미안을 선망하는 싱클레어로 규정했다. 그러니 나의 두 번째 이름을 에밀이라 지은 건 당연했다.

 

재독을 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다시 읽을 때에 무언가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잠재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결말을 차마 두 번 읽기 어려웠다는 핑계를 하나 더 보탠다.(다시 보니 결말은 바람 앞 흔들리던 촛불이 어떤 바람 앞에서도 춤출 수 있는 촛불로 거듭남에 방점이 찍힌다) 그럼에도 데미안은 늘 나의 시야 범위 내에 자리했는데,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기에 종이에 활자로 찍힌 데미안이 나무 책꽂이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삼중당부터 민음사, 문학동네까지 <데미안>들이 서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했던 생각은 잊혀지지 않는다. “얘는 언제 커서 데미안을 읽지? 큰일일세.” 여기까지는 다시 만난 데미안에게 보내는 인사다.(요즘 새롭게 놀라는 한 가지는 책에 치르는 지불 금액이다. “세상에, 데미안이 8천원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가치로 책값을 매기자고 시도한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동화 속 청년처럼 별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안인희 옮김, 문학동네, 2013, 1919, 240면 분량)은 온전한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스럽고도 신비로운 여정을 기록한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가 부제로 데미안은 화자인 싱클레어의 수기이자 성장기이다. 익명으로 출간되었던 <데미안>에 대해 토마스 만이 폭풍우 치는 등대의 불빛이라는 찬사와 함께 신예 작가 에밀 싱클레어를 궁금해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헤르만 헤세는 독일 남부 칼프에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한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헤세는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첫 시집과 산문집을 발간한다.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가 성공하며 작가의 길을 가게 되고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반전주의를 분명히 한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p.7)라는 제사에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선 서문격인 페이지에서, 화자인 싱클레어는 독자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평이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어쩌면 스치고 외면해온 주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문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사람들”(p.8)은 죽을 때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으며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자신 또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거라는 고백은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내던져진 시도인 인간이라는 확인, 이해와 해석의 간극에 긴장은 더해간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지금까지 속했던 세계. 밝고 따뜻한 아버지의 집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두 번째 세계는 금지된 세계에 가깝고 내 삶의 방향과 어긋나지만 분명한 끌림이 있다. 프란츠 크로머가 등장하고 이 끌림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두려움에서 그를 해방시킨 게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해주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비성경적이다. 지금까지의 싱클레어에게는 불경스럽고 전복적이다. 불편하고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정밀하면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기까지 하기에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스며들고 있다. 카인의 표가 죄로부터, 징벌로부터 기인한 게 아닌 뛰어남을 표식이었다고? 데미안의 다르게 생각하기는 또 다른 세계의 진입구였고 데미안의 세계를 엿보고 그로인해 그토록 그립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나 정작 구원자에게는 거리를 둔다. “,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p.57) 이라는 자각은 수기를 쓰는 시점까지 미루어진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공기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법칙에 따라”(p.62) 사는 데미안을 별에 견준다. 데미안의 얼굴에 대한 묘사는 시간을 초월하여서 지배받지 않는 항속성,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나 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를 보여준다. 미와 추의 개념으로 이분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간직한 그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고 평한다. 회피의 기간을 지내고 교류한 데미안은 주의력과 의지를 집중하여 존재 전체가 소원으로 채워졌을 때 실현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 싱클레어가 갈등했던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는 데미안에게서 더 나아가 신과 악마의 주제로 대치된다.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차이와 사람마다 자기만의 범위를 알아내야 한다는 견해는 익숙함, 매너리즘, 편안함과는 극단에 있는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싱클레어는 자기파괴적인 방종함”(p.90)의 시기에 접어든다. 한껏 바닥을 치던 그에게 데미안 이후 두 번째 구원자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그림 그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록을 시작한다.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과 감정, 풍성해진 꿈을 그림으로 구체화할 때 또 한걸음 기대하지 못했던 자아상을 구별해내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투쟁하는 새를 통해 데미안과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가는 세 번째 길 안내자인 음악가 피스토리우스 뿐만 아니라 동급생 크나우어까지도 역시 길을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길 자체”(p.147)라 느끼고 충실히 그들을 맞고 보낸다. 마침내 에바 부인을 만나기까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모든 존재의 어머니”(p.173)같다고 여긴다. 동시에 데미안이 고착될 수 없듯이 에바 부인 역시 어머니이면서 연인, 사랑의 정수이자 무한한 확대를 내포한다. 온전히 평온한 삶, 싱클레어 행복의 시대는 다가오는 격변, 전쟁이라는 불행 앞에서 상실의 시대로 추락하게 될까. 데미안의 마지막 페이지는 깊은 울림과 충격으로 잊지 못할 인장을 남긴다.

 

혹시 무언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라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다시 읽은 데미안은 처음 읽어나가던 순간의 충격만은 못하겠지만 무척이나 놀라워 다시 읽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워진다. 상징이 가득하고 환상적이기까지 한 작품은 등교와 크리스마스가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시간, 방과 대문, 골목이 있는 공간, 소음과 냄새까지 끼쳐오는 사실성에 밀착한다. 그래서 데미안은 독자의 외부에서 제 3자로 위치하는 하나의 픽션, 타자로 머물지 않는다. 소설은 에밀 싱클레어의 수기가 아니라 독자 개인의 고백록이자 성장기로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나에 대한 예표로 다가온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자들에게 작가는 친절하게 쉬운 예로 바꾸어 말하거나 거듭 설명한다. 우리는 싱클레어의 목소리를 빌어 반론하거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다.

 

명민한 인도는 전쟁이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던 새로운 세대 청년들에게 먼저 향했고, 그 얼굴 그대로 지금까지 모든 시대를 향하고 있다. 헤세는 그 모두가 저마다 자연의 아주 소중한, 딱 한 번뿐인 시도인 인간들을 총으로 쏘아 대규모로 죽이는 판”(p.8)에 반대하여 최대치의 방안을 강구하였고 목소리를 내었다. 시대적 배경의 암울함과 온전한 자기 발견의 어려움이라는 이중의 고통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데미안>은 피할 수 없는 먼 길, 불안하고 명확하지 않은 길에 선 모두를 기꺼이 안내하는 나침반과 같다. 진리를 향하기에 아름답고 강력하며, 무엇보다 강제하지 않는 나침반이다. 그 방향 지침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지금 <데미안>을 처음 펴는 이들을 열렬히 부러워한다.

 

 


책 속에서>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p.110, 문학동네)

 

 

나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로 내 옆에서 죽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증오와 분노, 때려죽이기와 없애버리기가 대상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깨달았다. 아니, 대상이란 목적만큼이나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다. 근원적 감정은 가장 사나운 것일지라도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근원적 감정의 피비린내 나는 행위는 내면의 표출, 속으로 찢긴 영혼이 겉으로 터져나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찢긴 영혼은 미쳐 날뛰며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거대한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은 세계이고 세계는 부서져야 했다.(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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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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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한 번에 완독하자고 다시 한 번 약속해본다. 서평에 불필요한 사족을 먼저 언급하자면 나는 왜 쓰는가2년 전 리더동기모임의 토론도서였다. 완독을 못한 채 전반부 수록작품에서 논제를 만들었는데 그날 나온 논제 대부분이 약속이나 한 듯 앞부분에서만 나왔다. 다음 달에 후반부 토론을 하기로 하고는 아직 모이지 못한 채 2년이 되어간다. 책을 보면 2022125<문학 예방> 말미에 대단하다!’라는 메모가 있다. 지난 6월에 다음 이야기인 <행락지> 부터 펼쳤고 마지막 페이지 이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재독을 시작했다. 읽기를 중단한 사이에 특별한 변화라면 1984를 읽고(서평쓰기까지 포함) 토론했다는 차이가 있겠다. 1984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언어를 조작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지옥도와 그 안의 함의들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그 후 다시 보는 오웰의 문장은 낱말 하나, 문장부호 하나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든다. 다시 편 <행락지>부터 감탄은 계속되었다.

 

나는 왜 쓰는가(이한중 옮김, 한겨레 출판, 2010, 480면 분량)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선집으로 전체 스물아홉 편의 글이 담겨있다. 쓴 순서대로 묶인 에세이들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관찰자이자 행동가였으며 진실을 추구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정신의 증거이자 정직한 자화상이다. 영국령 인도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동물 농장(1945)><1984(1948)>를 꼽지만 책으로 출간한 소설, 르포, 에세이집 11권과 수 백편의 에세이가 있다. 그는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으며 정치적 글쓰기로 20세기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오웰은 필명으로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부랑자(1933)부터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작가가 제일 처음으로 발표한 1931년 글 <스파이크>는 부랑자를 위한 숙소에서의 체험을, 1948년 마지막으로 집필한 <간디에 대한 소견>은 인간됨의 본질과 성인됨을 거론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눈을 맞추었던 오웰은 그 시간에 정성을 들였고 반론이 있을지언정 대중이 우러르는 위치에 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글을 맺은 게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를 정치인으로만 볼 때, 그리고 우리 시대의 다른 유력 정치인들과 비교해볼 때, 그가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가!”(p.460)로 책은 끝난다. 이 마지막 문장이 작가에게 돌아간다. 오웰이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지. 동시에 짙으면서 필요한지, 몸을 사리지 않고 세상과 그 안에서 부대끼는 인간을 꿰뚫어보았던 실천적 지식인에게로 이 문장은 기꺼이 돌아간다. 에세이들은 분량도 주제도 다채로워서 전부 겨우 6페니를 주고 산장미에 대한 단상격인 <나 좋을 대로>부터 자신이 통과한 유년을 역설적인 제목 아래 사실적으로 기록한 <정말, 정말 좋았지>까지 다양하다. 후자는 작가 사후에 지면에 발표되었으며 여덟 살부터 육년간, 유년의 시기에 세상이 얼마나 비정할 수 있나를 학습하는 장이었음을 고백한다.

 

모든 글에서 작가의 주장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치와 영어>에서는 이와 같은 선명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글은 선명해지는지, 선명하지 않은 글의 문제점과 폐해를 조목조목 분석한다. 단어사용의 엄격함과 민감함은 역시 <1984>의 작가라는 걸 확인케 만든다. 문제점을 지적할 때의 진지한 분위기에도 위트는 사라지지 않고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또한 지적에서 끝나지 않고 유용한 처방을 내린다. 최고의 글쓰기 강의를 지면을 통해 듣는 셈이다. “나는 왜 쓰는가어떻게 쓸 것인가는 날기 위한 양 날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하는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는 스스로를 재어보게 하기에 주기적으로 떠올린다. 특히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p.300)로 시작하는 말미의 명문장은 숨을 고르게 만든다.

 

그 중에서 <어느 서평가의 고백>은 무척 흥미진진하면서 눈앞에 오웰의 방, 그의 책상, 종이더미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왜 내가 행복해지지, 자문하면서 읽은 후에는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하는 책들, 책배의 압박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가운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의 일이자 사명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다. <물속의 달>은 반전에 놀랐던 사랑스러운 글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평론과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반기를 들었던 톨스토이에게 대응하는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는 문학비평이자 심리학적 분석으로도 읽힌다.

 

조지 오웰은 어렵고 곁을 내주지 않고 심각하고 마냥 진지할 것 같았다. 그러나 대여섯 살 때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던 오웰은 차분히 앉아 책을 쓰는 일”(p.289)에 전 생애를 바친다. 오웰에게 차분히 앉아 있는 장소는 총탄의 한가운데, 냉기 가득한 거리, 식민지의 근무처나 터무니없이 열악한 병원을 의미했고 어쩌면 기숙사의 젖은 침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을 테다. 읽을수록 작가의 시선은 명치 언저리까지 아릿하게 만든다. <코끼리를 쏘다>에서, 시를 쓰게 만든 이탈리아 민병대원을 기억하는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에서, 장작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인간과 너무 많은 짐을 진 당나귀로부터 사실을 상기하고 지적하는 <마라케시>에서.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는 기록하고 질문하고 입장을 밝힌다. 독자는 대답해보려 애쓰면서 책장을 넘기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견주어본다. 간결하고 또렷한 문체는 건조하고 힘있게 파고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고귀함을 서정적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그는 진지한데 위트도 넘친다. 읽어야하는 책이면서 공부해야 하는 책이다. 눈으로 한번 스치고 말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작가의 한 문장이 농축하고 있는 하루, 일상, 투신, 참여와 거리두기, 필연의 선택과 결정을 따라가 보는 일에는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떤 글을 다시 찾아 읽게 될 테고 그때마다 감동은 여전할 것이다. 말미에 실린 <조지 오웰 연보>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숙연케 한다. 활자는 작가가 살아낸 궤적으로 인해 식지 않는 온기를 후대에 남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던데 서두르지 않고 오웰을 읽어나갈 수 있겠다. 남아있는 오웰의 작품들을 헤아려보며 이게 무슨 복인가 생각한다. 치열한 글쓰기의 표본, 좋은 문장의 릴레이, 간곡한 기록인 나는 왜 쓰는가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주 동안 매일 언제나 같은 시간에 노년의 여성들이 장작을 지고서 줄지어 집 앞을 절뚝절뚝 지나갔건만,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눈에 분명히 비치었건만, 나는 사실 그들을 봤다고 할 수가 없다. 내가 본 건 장작이 지나가는 행렬이었다. 내가 우연히 행렬을 뒤따라가다가 묘하게 들썩거리는 장작더미에 시선이 끌려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주목하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가련한 흙빛의 육신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반으로 접혀버린, 뼈와 가죽만 남다시피 오그라든 육신들 말이다.(p.14)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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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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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고 추구하는 이상과 발 딛고 서있는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꿈이 미화될수록 현실은 척박하게 다가오고 간극은 커진다. 선택은 자기만의 몫으로 압박을 가한다. 이를테면 만 갈래로 세분화되는 선택지에서 은연중에 작동하는 방어기제에 올라타는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자기 암시나 합리화가 선봉에 서고 어느 날은 전쟁을 선포하기도 한다. 무너뜨리겠다고 작정하다가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라며 톤을 바꾼다. 표정을 감추고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싸우겠다고 칼을 뺐는데 대상이 증발하기도 한다. 간극이 시대적 배경에서 기인할 경우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색이 짙어진다.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송은주 옮김, 휴머니스트, 2022, 248면 분량)는 어긋나고 비틀리는 관계와 그로 인한 불통의 괴로움, 그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단편집이다.

 

이디스 워튼은 뉴욕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유한계급의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을 쓸 때 도움이 된다. 23세의 나이에 열세 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한 후, 불행한 결혼생활, 사회적 지위와 작가적 야심 사이의 갈등으로 신경쇠약을 앓았다. 신경쇠약을 치료할 겸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으며, 소설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 건축, 미술에 대한 글을 썼다. 전쟁 후 1920년에 발표한 순수의 시대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순수의 시대외에도 환락의 집(1905), 이선 프롬(1911), 암초(1912), 여름(1917) 등이 있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타인을 향한 우상화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대개 시야를 가리면서도 속도는 높인다. <편지(1910)>의 리지 웨스트가 화가인 빈센트 디어링의 딸을 가르치느라 왕래하는 집은 긴 언덕을 올라가야 나온다. “삶의 얼굴이 바뀐 운명의 날부터 리지는 그곳에 날개 달린 발로 다가갔고,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꿈의 비행(p.10)과 같았으며,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그의 "지성의 넓은 날개를 타고 창공으로 솟아 오르는" 듯했다.(p.17) 그런 듯했고, 그래 보였고, 그렇게 느꼈던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의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녀의 삶이 그녀에게 유용한 방어 기술을 익히게 하였음에도 기술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 예외구역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외따로 떨어져있다.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재회 후에도 그는 그 영역에서 건재했고, 흡족한 결실도 맺었으나 3년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개봉되지 않은 자신의 편지를 발견하면서 균열이 간다. 초점은 보고 싶은 대로만 자동으로 맞춰졌던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초점을 재조정을 할 것인가. 작가는 리지의 심리 묘사를 리듬감 넘치는 언어로 생생하게 포착하고 매끄러운 문장은 각각의 장면으로 그림처럼 빨아들인다.

 

<빗장 지른 문(1909)>의 휴버트 그래니스는 명성을 얻기 위해 거의 모든 문학적 실험을 했으나 10년간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실패하였고, 자비로 무대에 올린 희곡 <곤경> 역시 대실패하면서 생애 최고의 10, 잃어버린 반생을 회고한다. 결정적 곤경에 빠진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한다. 바로 사촌인 조지프 렌먼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함으로 추구했던 이상에 단 한 번도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삶, 곤경 자체였던 삶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결심한다. 소설은 삶에 사슬로 매여 있”(p.119)듯이 그래니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는 아이러니를 속도감 있게 그린다.

 

삶의 목표와 지향, 소망과 계획이 그에게는 단단하게 빗장 지른 문처럼 열리지 않았다. ‘근심하지 않는다’(p.92)를 모토로 삼는 조지프 렌먼과 그가 키우는 멜론의 설정도 그래니스라는 인물을 비극적으로 부각한다. 표제작인 <석류의 씨(1931)>는 샬럿 애슈비에게 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집은 그녀에게 허리케인의 중심부에서 찾아낸 혼자만의 섬과 같은 안락한 성채였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도착한 회색 봉투의 편지는 불안하고 휴식할 수 없는 장소로 집을 바꾸어 간다. <하녀의 종(1902)>은 폭력적인 남편에 의해 희생당하는 브림프턴 부인과 시대적 위계질서의 고착으로 무력하게 방관할 수밖에 없는 피지배자이자 방관자의 공포를 기록한다.

 

석류의 씨에 담긴 네 편의 단편은 가리워진 진실을 그대로 둔다.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고, 독자는 결말 이후를 상상하고 추적하다 길을 잃는데, 그 아득한 감정은 기시감이 든다. 참고, 넘어가고, 통과했던 크고 작은 순간들. 다행이라 여겼던 게 정말 다행이었는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전혀 다른 현재를 살고 있을지 누구나 정답 길만 걷지 못한다. 독자는 모호성, 양가성, 열린 결말(p.243)이라는 워튼의 고딕소설을 나타내는 특징에 매료될 것이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인기를 끌었던 여성 작가들의 고딕 소설은 여성의 경험을 표현할 새로운 도구가 되어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취약함을 언어화한다. “고딕소설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p.241)이라고 했던 워튼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에 녹인다.

 

호흡이 길지 않은 단편이라 가독성이 좋고, 익숙하지 않은 서사라 몰입도를 높일 수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글을 이렇게 잘 쓴다고, 라는 감탄이었다. 접착제를 붙인 듯이 연결되는 문장, 단어의 선택과 효과적인 반복, 반복으로 인한 의미부여와 확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는 비유, 현미경을 댄 듯한 심리서술, 구체어와 추상어 사이의 균형, 경쾌한 문체와 때론 위트까지 독자의 관심을 한 순간도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그러니 <빗장 지른 문>의 주인공 휴버트 그래니스 같은 작가는 반평생을 허비했다고 총을 집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다. 작가의 성장 배경, 받아온 교육, 어려웠던 경험들이 모두 약이었겠지만 재능이라고 본다. 그리고 빼어난 통찰력. 당연히 밑줄이 많은 책이고 필사할 문장 또한 많으며 읽는 즐거움에 대하여 상기시킨다. 작품은 대표작부터 읽어야 한다고 여겨왔는데, 읽기만 한다면야 순서가 중요치 않겠다. 100여 년 전을 살았던 한 여성 작가의 목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삶의 편린은 여전히 유효하다. 워튼의 장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집으로 추천한다.

 



책 속에서> 


소설에서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 위에 세워진행복은 언제나 무너졌고, 그 폐허 밑에 주제넘은 건축가를 묻어버렸다. 그녀가 여태껏 읽은 모든 소설의 법칙에 땨르면, 그녀를 이미 한 번 속인 적이 있는 디어링 씨는 반드시 계속해서 그녀를 속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계속해서 자기를 속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p.67)

 

그래니스는 자신의 죄를 밝히려 무슨 짓을 해도 다 소용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삶에 사슬로 매여 있었다. “의식의 죄수.” 그 문구를 어디에서 읽었던가?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한밤중에 뇌가 불타는 듯한 기분일 때면 그의 고정된 정체성, 축소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자아의 감각이 여태껏 경험한 그 어떤 느낌보다도 더 날카롭게, 더 은밀하게, 더 피할 수 없게 찾아왔다. 정신이 이렇게 복잡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자체의 어두운 미로 속으로 이렇게 깊이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토막 잠이 들었다가 무언가가 그에게 달라붙은 느낌, 그의 손과 얼굴, 목구멍 속에 붙은 느낌에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 머릿속이 맑아지면 뭔가 진하고 끈적이는 물질처럼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 바로 자신의 혐오스러운 인격임을 깨달았다.(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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