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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당신의 독서여정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모호하고 한계 없는 질문에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내가 인식한 첫 책은 <데미안>이었고 이전의 모든 앎과 앓이는 <데미안>를 위한 준비였다고 돌이켜 생각한다. 때로 데미안과 헤세는 혼동되기도 하였고 혹시 다시 데미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헤세의 소설들을 한권씩 찾아 읽었다. 녹턴이 귓가에 끝없이 울리던 짧은 에세이부터 <유리알 유희>까지 헤세의 글에 숨은 또 다른 데미안 찾기는 계속되었다. 헤세는 시로, 구름으로, 노을지기 시작하는 저녁의 부드러운 서정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치열하고 논리적인 기준점과 선택지, 신생 이론으로 답을 요구할 때도 많았다. 내가 선망하는 쪽과 내가 처한 쪽은 한 번도 자리 바꾸는 일 없었고 한결같이 스스로를 ‘데미안을 선망하는 싱클레어’로 규정했다. 그러니 나의 두 번째 이름을 에밀이라 지은 건 당연했다.
재독을 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다시 읽을 때에 무언가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잠재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결말을 차마 두 번 읽기 어려웠다는 핑계를 하나 더 보탠다.(다시 보니 결말은 바람 앞 흔들리던 촛불이 어떤 바람 앞에서도 춤출 수 있는 촛불로 거듭남에 방점이 찍힌다) 그럼에도 데미안은 늘 나의 시야 범위 내에 자리했는데,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기에 종이에 활자로 찍힌 데미안이 나무 책꽂이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삼중당부터 민음사, 문학동네까지 <데미안>들이 서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했던 생각은 잊혀지지 않는다. “얘는 언제 커서 데미안을 읽지? 큰일일세.” 여기까지는 다시 만난 데미안에게 보내는 인사다.(요즘 새롭게 놀라는 한 가지는 책에 치르는 지불 금액이다. “세상에, 데미안이 8천원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가치로 책값을 매기자고 시도한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동화 속 청년처럼 별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안인희 옮김, 문학동네, 2013, 1919, 240면 분량)』 은 온전한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스럽고도 신비로운 여정을 기록한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가 부제로 『데미안』은 화자인 싱클레어의 수기이자 성장기이다. 익명으로 출간되었던 <데미안>에 대해 토마스 만이 “폭풍우 치는 등대의 불빛”이라는 찬사와 함께 신예 작가 에밀 싱클레어를 궁금해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헤르만 헤세는 독일 남부 칼프에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한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헤세는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첫 시집과 산문집을 발간한다.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가 성공하며 작가의 길을 가게 되고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반전주의를 분명히 한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p.7)라는 제사에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선 서문격인 페이지에서, 화자인 싱클레어는 독자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평이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어쩌면 스치고 외면해온 주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문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사람들”(p.8)은 죽을 때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으며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자신 또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거라는 고백은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내던져진 시도인 인간이라는 확인, 이해와 해석의 간극에 긴장은 더해간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지금까지 속했던 세계. 밝고 따뜻한 아버지의 집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두 번째 세계는 금지된 세계에 가깝고 내 삶의 방향과 어긋나지만 분명한 끌림이 있다. 프란츠 크로머가 등장하고 이 끌림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두려움에서 그를 해방시킨 게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해주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비성경적이다. 지금까지의 싱클레어에게는 불경스럽고 전복적이다. 불편하고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정밀하면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기까지 하기에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스며들고 있다. 카인의 표가 죄로부터, 징벌로부터 기인한 게 아닌 뛰어남을 표식이었다고? 데미안의 ‘다르게 생각하기’는 또 다른 세계의 진입구였고 데미안의 세계를 엿보고 그로인해 그토록 그립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나 정작 구원자에게는 거리를 둔다. “아,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p.57) 이라는 자각은 수기를 쓰는 시점까지 미루어진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공기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법칙에 따라”(p.62) 사는 데미안을 별에 견준다. 데미안의 얼굴에 대한 묘사는 시간을 초월하여서 지배받지 않는 항속성,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나 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를 보여준다. 미와 추의 개념으로 이분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간직한 그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고 평한다. 회피의 기간을 지내고 교류한 데미안은 주의력과 의지를 집중하여 존재 전체가 소원으로 채워졌을 때 실현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 싱클레어가 갈등했던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는 데미안에게서 더 나아가 신과 악마의 주제로 대치된다.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차이와 사람마다 자기만의 범위를 알아내야 한다는 견해는 익숙함, 매너리즘, 편안함과는 극단에 있는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싱클레어는 “자기파괴적인 방종함”(p.90)의 시기에 접어든다. 한껏 바닥을 치던 그에게 데미안 이후 두 번째 구원자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그림 그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록을 시작한다.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과 감정, 풍성해진 꿈을 그림으로 구체화할 때 또 한걸음 기대하지 못했던 자아상을 구별해내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투쟁하는 새를 통해 데미안과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가는 세 번째 길 안내자인 음악가 피스토리우스 뿐만 아니라 동급생 크나우어까지도 역시 “길을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길 자체”(p.147)라 느끼고 충실히 그들을 맞고 보낸다. 마침내 에바 부인을 만나기까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모든 존재의 어머니”(p.173)같다고 여긴다. 동시에 데미안이 고착될 수 없듯이 에바 부인 역시 어머니이면서 연인, 사랑의 정수이자 무한한 확대를 내포한다. 온전히 평온한 삶, 싱클레어 행복의 시대는 다가오는 격변, 전쟁이라는 불행 앞에서 상실의 시대로 추락하게 될까. 데미안의 마지막 페이지는 깊은 울림과 충격으로 잊지 못할 인장을 남긴다.
혹시 무언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라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다시 읽은 데미안은 처음 읽어나가던 순간의 충격만은 못하겠지만 무척이나 놀라워 다시 읽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워진다. 상징이 가득하고 환상적이기까지 한 작품은 등교와 크리스마스가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시간, 방과 대문, 골목이 있는 공간, 소음과 냄새까지 끼쳐오는 사실성에 밀착한다. 그래서 데미안은 독자의 외부에서 제 3자로 위치하는 하나의 픽션, 타자로 머물지 않는다. 소설은 에밀 싱클레어의 수기가 아니라 독자 개인의 고백록이자 성장기로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나에 대한 예표로 다가온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자들에게 작가는 친절하게 쉬운 예로 바꾸어 말하거나 거듭 설명한다. 우리는 싱클레어의 목소리를 빌어 반론하거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다.
명민한 인도는 전쟁이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던 새로운 세대 청년들에게 먼저 향했고, 그 얼굴 그대로 지금까지 모든 시대를 향하고 있다. 헤세는 “그 모두가 저마다 자연의 아주 소중한, 딱 한 번뿐인 시도인 인간들을 총으로 쏘아 대규모로 죽이는 판”(p.8)에 반대하여 최대치의 방안을 강구하였고 목소리를 내었다. 시대적 배경의 암울함과 온전한 자기 발견의 어려움이라는 이중의 고통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데미안>은 피할 수 없는 먼 길, 불안하고 명확하지 않은 길에 선 모두를 기꺼이 안내하는 나침반과 같다. 진리를 향하기에 아름답고 강력하며, 무엇보다 강제하지 않는 나침반이다. 그 방향 지침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지금 <데미안>을 처음 펴는 이들을 열렬히 부러워한다.
책 속에서>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p.110, 문학동네)
나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로 내 옆에서 죽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증오와 분노, 때려죽이기와 없애버리기가 대상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깨달았다. 아니, 대상이란 목적만큼이나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다. 근원적 감정은 가장 사나운 것일지라도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근원적 감정의 피비린내 나는 행위는 내면의 표출, 속으로 찢긴 영혼이 겉으로 터져나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찢긴 영혼은 미쳐 날뛰며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거대한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은 세계이고 세계는 부서져야 했다.(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