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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평점 :
『야생 종려나무』(권지은 옮김, 민음사, 2026, 1939, 436쪽 분량)는 윌리엄 포크너의 열 한 번째 소설로『소리와 분노』와 10년의 간극이 있다. 미시시피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하던 작가가 할리우드에서 간헐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시기를 거쳐 집필한 작품이다.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야생 종려나무』는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을 교차 진행하는 독특한 구조다. 출간 시 출판사의 강요로 제목이 정해졌지만 포크너가 선택했던 제목은 시편 137편 5절에서 인용한 부제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이었다. 포크너가 두 작품을 각각 완결 후 재배치하지 않고 교대로 집필하였다는 점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작가의 의도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홀수 장에 묶이는 <야생 종려나무>는 첫 장과 마지막 장이 조응하며 수미상관의 구조로 만난다. 미시시피 남부 해변의 별장을 세놓고 있는 중년 의사의 관점에서 거주중인 샬럿과 윌본을 보여준다. 그의 눈에 비치는 두 사람은 정체도 관계도 모호해서 자신을 순수의 울타리에 갇힌 자로 여기고 진실을 가리는 베일을 상정한다. 마음의 평화 수호와 베일을 걷어낸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관찰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을 이들을 호기심과 적대감으로 주시한다. 가운데 3, 5, 7장은 두 사람의 여정을 보여주는데 인턴으로 근무 중인 해리 윌본이 스물일곱 생일날 들르게 된 파티에서 리튼마이어의 아내 샬럿을 만난다. 후에 샬럿은 윌본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책에서 읽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던 것’을 비로소 깨우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샬럿은 “사랑과 고통은 같은 것이고 사랑의 가치는 그걸 위해 희생한 것들의 총합이라서, 사랑을 싼 값에 얻는 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p.62)라 주장하며 둘만의 사랑을 완벽한 현재, 시간과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상태로 만들어가려 한다.
윌본은 샬럿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동조자이며 연인이 된다. 사랑은 죽지 않고 죽는 건 연인들 뿐이라는 샬럿이 사고와 행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윌본의 성찰은 깊어지고 시카고에서의 안정으로부터 근본적인 질문을 끌어내는데, 샬럿이 주장한 미덕에 동의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랑이 존재할 만한 장소는 없다, 인간이 사랑을 제거해 버렸다는 서술에 이어지는 부분은 기시감도 느껴지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에피소드가 연상된다. 포크너의 인장과도 같은 시간과 존재의 관계 탐구는 흥미롭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시간의 전류는 기억을 통해 흐른다는 발견은 후에 윌본의 지향이 된다. 10년 전 작품『소리와 분노』의 퀜틴 장에서 만났던 파편적 시간의 변주와도 연결된다. 결국 방향을 바꾸는 결단도 윌본이 내리고, 두 사람은 유타주 탄광촌의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은 짝수 장에서 다섯 번 <노인>이야기를 펼친다. 미시시피주 교도소 농장에 수감되어 있는 스물다섯 살 정도의 키 큰 죄수는 기차 강도 미수 혐의로 십오 년 형을 받았다. 소설에 몰입한 나머지 내용을 직접 실행하다가 범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붙잡혀 구속된 그는 이게 다 내가 읽은 책 때문이라며 작가들을 저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 무렵, 미시시피 주 마을 제방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강제 기상한다. 1927년 5월 미시시피 대홍수가 배경으로 <노인(Old man)>은 “미시시피 강”을 부르는 별칭인 <Old Man River>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간수는 두 죄수에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여자와 지붕에 앉아 있는 남자를 구조해 오라고 명령한다. 배가 뒤집히며 익사했다고 보고된 그는 사망자 처리가 되었으나 살아 있었고, 작가가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압도적인 홍수와 싸우며 ‘나뭇가지에 매달린 여자 구하기’라는 임무에 몸을 던진다.
3인칭 서술 중에 ‘이것이 칠 주 후(...)들려준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등 회고의 틀을 삽입하여, 현재의 사건과 훗날 전달된 이야기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드러나며 독자는 시야가 확대된다. 이야기는 더 입체적이고 생생해진다. 포크너가 중심으로 삼은 <야생 종려나무>와의 균형과 대조를 위해 집필한 <노인>은 분위기를 환기하고 독자를 새롭게 집중시킨다. 죄수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를 당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경험을 쌓고 보이는 것 너머의 이면에 접근하는데, 특수한 현상과 일반적인 상태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착각해왔음을 느낀다. 인간은 얼마나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생각하며 자연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는 구출한 여자를 맡기고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죄수의 복장만 보고 발포하는 사람들. 소통은 연거푸 실패한다. 우연한 만남이 더할수록 배움을 늘어 가는데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즐거움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왜 탈출하지 않고 계속 되돌아가려 할까. 자유로운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 보다는, 교도소에서 책임감, 명예심, 자부심 등의 미덕과 가치를 경험했다 여기고 받은 것을 돌려주기 원하는 죄수는 원칙과 약속을 가치로 선택한다. 다만 그의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 채, 결국 ‘운이 없었던 일’로 치부된다.
매 순간이 사랑만으로 완벽한 삶을 살고자 했던 샬럿, 깨끗하고 질 좋은 돌이나 청동을 오랜 시간 잘라서 뒷면을 볼 수 있고 직접 안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원했던 그녀는 여성이나 모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와 무관하게 극히 개인적 선택과 실존을 밀어붙이고자 한다. 샬럿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리튼마이어를 완전히 잘라냄으로, 즉 온전하게 상실함으로 다시 온전해졌다고 여겼듯이 임신이라는 현실도 같은 방식으로 되돌리고자 한다. 반면 <노인>에서 죄수는 헬레네나 살아 있는 가르보가 아닌 만삭의 익명 여성을 구조해 어떤 의학적 도움도 없이 출산을 돕고 아이를 보며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이유를 깨닫는다. 배와 여자를 끝내 돌려주지만 추가로 형까지 받는다. 아이러니한 결말을 넘어 타자의 인정과 무관하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스물일곱의 윌본도 열여덟의 키 큰 죄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진입하였다. 윌본의 날들 역시 죄수가 예측 불허의 물살이 간직한 파괴적인 힘에 휩쓸렸듯이 다른 형태의 파도와 맞서야했다. 결코 배경이랄 수 없는 종려나무 잎은 마치 의식을 가지고 움직일 때를 정하듯이 샬럿과 윌본 곁에서 야생의 소리를 지르곤 했다. 윌본은 조용히 생각하는 잠깐의 정지상태를 수차례 반복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 성찰은 나침반처럼 다음 목적지를 가리켰고 그들은 호숫가에서 시카고로, 시카고에서 유타주 탄광촌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샬럿을 떠나보내고 눈앞에 놓인 몇 가지 가능성 가운데 윌본은 스스로를 가두는 길로 들어선다.
의식을 닫지 않고 깨어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무가 아닌 비통함을 택할지라도 기억하는 일은 잃어버릴 수 없는 대상을, 시간과 길과 소리를 어떤 의미에서는 조각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샬럿의 작업과도 다르지 않다. 샬럿이 추구하던 예술을 윌본은 글쓰기로 치환함으로 생동감 넘치던 영원과 같았던 찰나들을 수집한다. 둘만의 추억도, 그 끝에 닥친 원하지 않았던 결과도 흘러가버렸다. 무엇보다 흘러내리던 육신과 먼지와 재로 무화하는 놀라운 속도 앞에서 무력했던 윌본은 직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차곡차곡 글이라는 용기에 담는다. 더 이상 흘러내리는 일이 없도록.
포크너의 글에는 빈틈이 없다. 독자는 <야생 종려나무>를 읽으며 고조된 긴장이 <노인>에서 조금씩 풀어지면 바람이나 파도를 타듯 완급 있는 읽기를 경험한다. 숨을 돌린다. 감옥의 침대 끝에 걸터앉은 윌본이 온 세상 모든 비극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서술, 그럼에도 ‘작은 조각’에 집중하는 태도는 영웅적이다. 남은 자가 남겨진 삶을 견뎌낼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아닐까. 윌본에 못지않은 비극적 인물 리튼마이어에게 포크너는 비로소 지면을 할애한다. 그의 태도, 그의 고통, 그럼에도 지켜낸 약속이 울림을 남긴다. 그럼에도 특별한 감동은 윌본의 차지다. 포크너는 윌본의 성찰, 각성, 의지, 결심, 실천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내내 치밀했던 작품은 결말에서 한 단계 도약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성실하고 미숙했던 청년이 단 세 줄로 요약되어있는 1년의 여정을 거치며 깨달은 것을 전할 차례다. 그는 종언을 고하는 기억을 멈춰 세운다. 이제는 마주할 용기가 있다. 기억을-이해하고-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고-따라서 이제 다 괜찮았다는 진심어린 선언은 모든 쓰는 사람들의 푯대일 것이다.
반면 <노인>의 죄수에게 포크너는 느낌은 간직하지만 ‘언어화할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설정함으로 ‘없음’으로의 회귀를 막고 통찰을 간직하게 하는 언어화의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윌본의 글쓰기,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 아니었을까. 숨도 쉬어지지 않고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 없는 중에 글쓰기만이 그에게 호흡이었을 테다. 읽혀서 돈으로 치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글을 써온 윌본은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쓴다. 기꺼이 비통함으로 걸어 들어간다. 포크너의 목소리가 겹치는 장면들이다. 포크너가 자신의 이별 경험에서 가져온 말인 “비통함과 무(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를 <야생 종려나무> 파트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았기에 그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윌본의 선택은 어쩔수 없이『소리와 분노』에서 퀜틴 콤슨의 퇴장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었다, 라는 말을 남겼던 퀜틴은 자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10년 후 <야생 종려나무>의 윌본은 존재하기를 선택하고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언어화함으로써 기억하고, 기억할 수 있기에 고통을 마다않고 ‘다 괜찮았다’라며 수용하는 입장이다. 퀜틴은 실현되지 못한 욕망과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자신의 혼란을 끝내 언어로 바꿔내지 못했고, 그래서 평화롭게 물속에 누워 뼈를 달그락거리고 싶다는 염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퀜틴은 단독자이기 이전에 남부의 장자라는 상징을 짊어지고 있었고, 남부 몰락의 예표이자 종결이기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 했을 테고, 동일선상의 비교가 부적절할지 모르나 안타까움은 여전히 남는다.
『야생 종려나무』는 대표적인 장편들을 출간한 후, 후기 소설로 옮겨가는 전환축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연구자들은 설명한다. 이 작품 역시 비선형적 서사, 의식의 흐름, 감각을 일깨우는 상징과 메타포(물 묘사 경연대회가 있었다면...), 흡인력 있는 만연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이에 더해 음악의 대위법 형식을 문학에 접목하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를 해낸다. 소리와 색채와 이미지가 풍부하고 극한의 온도까지도 글로 감각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샬럿과 리튼마이어의 재회장면으로, 오듀본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는 윌본의 적극적인 상상으로 진행된다.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재구성하는 형식이 기억과 상상, 추측의 경계를 지우고 결합시킨다. 자유의지와 사랑, 실존을 향한 투신, 평판과 무관한 가치 실현 등 읽는 일 자체가 맞서고 격돌하는 인물들과 동행하는 경험으로 남는다. 무엇보다 읽기는 어떻게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지, 결국 쓰기는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 숙고할 수 있는 작품이며 독자 역시 내 삶의 방향성을 살피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설 것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게 하라.”(시편 137:5)는 구약의 시구처럼 이제 윌본의 오른손은 칼이 아닌 펜을 들고 둘의 영원한 예루살렘을 기억하려 한다. 이제 우리 각자의 예루살렘을 불러낼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