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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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서제인 옮김, 암실문고, 2023, 432쪽 분량)은 마리아 투마킨의 비문학 저서로 고통의 얼굴을 한 생생한 사례를 열거하고 누적한다. 르포르타주의 옷을 입고 때로 문학적인 사유와 은유로 나아가고, 때로 믿지 못할 초현실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는 어느 순간 주된 분위기와 지향에 속하여 페이지를 넘긴다는 안정감에서 벗어난다. 예민하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줄타기와 같은 읽기는 이 줄이 최소한 튼튼하기를 기대하지만 이 기대 또한 충족될지는 의심스럽다. 흔들고 휘청거려 독자를 떨구려는 줄이다. 어쩌면 자아를 가진 줄이 아닐까, 느닷없이 한 가운데를 절단해버리는 줄이 아닐까, 고민에 빠뜨린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문화사를 전공하고 다양한 사회 문제와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탐구하며 그 과정을 기록해 왔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으로 번역된 책의 원제는 『Axiomatic』이다. ‘자명한’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이중적으로, 다시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사건들은 예측이나 기존의 틀, 굴레를 깨기에 자명함을 오히려 경계한다. 고통을 말해야 한다는 적극적 권유인지, 고통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접근하라는 경고인지, 감히 해석하려는 당신을 열 외시키겠다는 날카로움인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연대의 방법론인지 아마도 이들 모두를 품고 있을테다.


책은 목차가 있다. 다섯 개의 장은 각각 주요 테마로 또 다른 사례를 접목하거나 확장한다. 저자는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머물면서 보고, 경청하고, 전한다. 청소년 자살 생존자나 마약 중독자들,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나 아스팔트 위에서 반복적으로 트럭(저자가 비유한)에 치이는 자들, 가정 폭력 피해자 등의 기록이 쌓인다. 1장에서는 브로드스키의 시를 가져온다. “슬픔을 비롯한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아니, 슬픔은 아니다. 슬픔에는 한계가 없다.” 이 시의 후반은 “그런데 공간이란 무엇일까, 그게 만약 주어진 모든 지점에서 부재하는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면?”(p.90) 누군가의 부재로 꽉 찬 공간이라. 이어 삶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고통의 반경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시간이 사람들의 상처에 내려앉는 것일까, 라고 묻는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은 틈새에 연거푸 얼굴을 내민다.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p.92)이라고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정의도 마찬가지로 묻는다. 시간과 공간은 다시 한 번 규정된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여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하여 아들이 남긴 유일한 손자를 위해 싸운다. 심리학적 식견을 늘어놓는 이들은 어디든 있으나 정작 그녀가 말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만남에서 저자는 ‘오도와 오판, 그리고 오심’(p.122), 학대당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흔한 일들은 어떻게 계속되는지, 행정 구조적 문제와 관료주의적 문제와 과부하 걸린 청소년 구호 체계 자체의 문제로 치부되는지, 그러면서 다른 지점을 덧붙인다.


다양한 작품에서 가져온 인용문은 시선을 깊게 하거나 넓혀줄 징검다리가 될 수 있겠다. 찾아 읽는다면 말이다. 거침없고 직관적인 문장, 속도감 있는 이동, 일종의 맹렬함이 활자 사이에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다. 이 책은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최소한 A, B, C를 합시다, 라고 정리해주지 않는다. 충분치 않을지라도 힘 닿는데까지 해봅시다, 라고 요약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안도와 멀어지고 긴장을 풀지 못한다. 제목이나 표지 그림, 서술 기법과 전개 방식, 구조가 그렇다. 사례별 종결도, 책 전체의 매듭도 늪과 같은 끈끈함과 질척이는 감각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문제의 열거와 암울한 반복을 이 책의 아쉬운 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별히 더 황망한 부분, 특별히 마음 아프거나 애달픈 지점을 꼽을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반응 역시 감각이고 반사 일까봐, 이 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흩어질까 봐 걱정을 남긴다.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몰입하여 읽었으나 발생하는 질문들이 책을 덮으면서 읽기 전으로 회귀하는 건 아닐까라는 염려와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었다. 두 번째 장에서 화가인 여자는 말한다. “저는 심연에 던져져도 거기서 인간의 표정과 경험들을 찾아내 그릴 거예요.”(p.113)라고. 이 말은 저자의 집필 작업과도 닿아 있다. 무방비로 노출된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 개념정리와 요약과 절차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합의되고 요구에 부응하는 편린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재발견하려는 의지다. 본질에 밀착하겠다는 시도다. 바람직하지 못한 편독가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읽지 않았을 책을 약속한 과제 덕분에 읽었다. 오히려 뜻깊은 독서가 되었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 빼곡한 저서로, 기억하고 싶은 책으로 필자 역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오 당신, 안다는 자여/ 당신은 알았는가,

어머니가 죽는 걸 보고도/ 당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오 당신, 안다는 자여/ 당신은

알았는가, 하루가 1년보다 길고/ 1분이

평생보다 길다는 것을/······당신은

이것을 알았는가/ 당신, 안다는 자는.


(사를로트 델보 <오 당신, 안다는 자여>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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