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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절제, 더 나아가 억제함으로 고양하는 글쓰기를 계속 만난다. 클레어 키건, 한 강, 욘 포세의 간결함이 동일한 결은 아니어도 소란함이나 치장은 제하고 의미를 내포한 행간 그대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보이기도 한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욘 포세는 기념 연설문에서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p.95)라고 말했다. 귀 기울여 들을 때 들리는 것은 ‘침묵’이며 나아가 침묵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한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화자가 숲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페이지마다 쌓여가는 눈이 표지판 없는 숲 한가운데에서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냉각시킨다. 눈이 내리고, 어둠이 들어서고, 기온이 떨어지고, 체온이 내려가고, 허기지고 피로한 상태로 그는 본다, 듣는다, 감각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낯선 현상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수용한다. 미심쩍소, 당신 누구요, 라고 물을 권리, 잠시만요, 라고 유예시킬 자격은 이미 회수되었다.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할 수 있나. 그는 기회를 기회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가 낭비한 시간 목록과 세부 사항이 추수가 끝난 곡식 단처럼 가지런히 묶여 있다. 첫 번째 묶음은 마땅치 않은 일련의 감정들이었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p.7)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그는 “무언가를 했을 뿐”(p.7)이다. 운전했고, 갈림길에서 선택했고, 숲길 끝에 처박혔고, 후진하지 못하여 차에서 내렸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머릿속으로 방법을 시뮬레이션한 끝에 숲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루함에서 공허함으로, 다시 두려움으로 감정의 파고를 탄다. 멍청하다는 자책을 털고 간절하게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두려움’을 감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어로 분석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두려움’, ‘불안함이 없는 두려움’, 말하자면 ‘말뿐인 두려움’. 그러므로 감정은 허상이고 이성적인 나는 구출되는 게 마땅하다는 합리화다.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실체는 몹시 불합리하다. 철저하게 혼자인 그, 누가 봐도 혼자인 그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문을 연다. 머릿속에 작동하는 사고는 언어 회로를 돌린다. 최면을 거는 듯한 문장으로, 이전의 말을 번복하고, 맞서다가 부연하고, 오류를 곁들이다 끝없이 덧댄다. 딱히 할 일이 없는 그는 의식의 흐름을 놓칠 이유가 없다. 자기의식과 침묵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다. 그런데 누군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불분명한 ‘순백색의 존재’, 예전 그대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례로 다가온다. 지력과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감정’이 그랬듯이 ‘지력’이나 ‘이성’도 하나의 단어, 또는 말,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그는 곧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결국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작은 행동의 총합, 애쓰고 버틴 끝에 예외 없이 맞이할 단 하나의 결말을 빛 속에서 마무리한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작가는 예외일 수 없는 길인 죽음을 <아침 그리고 저녁>에 이어 <샤이닝>에서 다시 한번 형상화한다. 전작에서 친구 페테르가 고깃배를 타고 요한네스를 마중 나왔는데 이번에는 깊은 숲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 나온다. 전작에서 페테르는 질문하는 요한네스에게 하나하나 답해준다. ‘궂은일’이 생긴 아래를 내려다보다 ‘길’에 접어들자 인도자는 이제 말들이 사라질 거라고 안내했다. <샤이닝>에서는 화자인 ‘나’가 다가온 이들을 묘사하다가 말미에는 일인칭 복수형인 ‘우리’로 주어를 바꾼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려 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경계를 넘자마자 즉각적으로 통찰하고 의문도 망설임도 없이 빛으로 합류한다. 거의 단일한 공간적 배경인 눈 쌓인 숲에서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죽음의 여정을 그린다. 작가는 죽음을 문학적으로 완성해 낸다.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사실과 환상을 치밀하게 직조하여 설득력을 갖춘다. 죽음은 도처에 만연하나 나와는 무관하다고, 아직 무관하다고 여기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금기시하는 정서와 달리 이면에는 확고한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샤이닝>에서 독자는 열 번 남짓 마침표를 썼던 <아침 그리고 저녁>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마침표를 볼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이 이어질 때 쉼표를 타고 연속해 나간다. 다만 질문 끝에 물음표는 삽입하지 않는다. 답을 간구하기보다 상태를 수용하고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 답변이 주어지지 않아도 이의가 없다는 마음을 엿본다. 80여 쪽 분량의 소설은 독자를 한 호흡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상당히 감각적이다. 말끝에 얼어붙는 입김, 속수무책으로 에워싸는 눈발이 느껴진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텅 빈 공간이 자리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캐릭터들에게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든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회화적으로 구축한 미지와 익명의 세계를 간결한 글로 읽으며 상상의 영역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랄까. 한국어판 표지도 인상적이다. 인간이 육신의 눈에 담는 마지막 풍경이 별이 총총히 박힌 채 진공처럼 영혼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일까.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샤이닝>은 묵독으로 읽어도 좋지만 낭독할 때 울림은 극대화된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삶 전체를 조망해 볼 작품이다. 물음표 없는 물음이자 사유의 쉼표로 초청하는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물어볼 수는 있는 일이었던가. 나는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존재가 말한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p.64)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다,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p.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