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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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 194쪽 분량)은 보르헤스의 유명한 묘비명에 얽힌 일화로 시작한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p.7)는 첫 문장부터 질문 또는 의미의 덩어리들이 독자 앞에 놓인다. 힌트는 바로 뒤따른다.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p.8) 칼의 정체는 실명이었고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무시무시한 번쩍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도입부의 강렬한 이미지는 소설 전체를 견인한다. 읽으며 묻고 읽으며 궁금하고 읽다 말고 멈추다가 다시 몇 페이지를 되돌아간다. 페이지를 앞으로 뒤로 번갈아 넘기는 동작이 읽는 내내 반복된다.

 

소설은 익명인 여자와 남자, 두 주인공이 단절하는 칼들을 넘어서서 마침내 유영하는 순간으로 맺는다. 유영이 성공적일지, 이 정도면 족하다 여길만한 여정에 들어설지는 미지수다. 예측하고 상상하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럼에도 다섯 번째 장편인 희랍어 시간을 출간 후 찾아온 봄에 작가는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책이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희망적으로 해석할 만한 배경이다. 이런 배경이 없더라도 결말은 안온하다. 매끄러운 안온함은 아니고 걸림돌은 분명 존재한다. 서사의 종착지를 20흑점이라고 생각할 때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p.184)는 끝문장은 어긋남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영원히라고 단정하는 어긋남이다. 그럼에도 빛과 희망은 스며든다. 역설적 제목인 심해의 숲에서, 숫자 1부터 계단 오르듯 헤아려온 장 번호가 숫자 0으로 고요해졌음에도 스며든다.

 

0일까 다시 독자는 궁금하다.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 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p.118) 철학을 하기엔 넌 너무 문학적이라고 일갈했던 까다로운 친구, 동갑내기 스승 요하임 그룬델의 말이다. 뜨거움의 또 다른 현현이었던,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이었던 요하임은 결국 마이너스의 어둠에 잠겼을까. 그렇다면 0은 얼굴까지 차오른 정적을 물리치고 심해를 탈출할 가능성, 발화와 호흡의 새로운 시작점일 테다.

 

읽어나가며 이 부분이 좋다, 따로 떼어내서 몇 번이고 다시 곱씹어도 좋다고 감탄한다. 그런 지점이 이곳저곳에 빼곡하게 박혀있다. 발상은 몇 줄의 문장, 단락으로도 빛이 나고 전환하는 장면과 나란히 놓여 있을 때도, 페이지를 넘어가 다시 연결됨을 알아차릴 때도 근사하다. 두 주인공은 마치 중력의 힘을 덜 받는 듯이 지면에서 약간 떠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내면에 남겨진 얼룩이나 상처의 증거인양 신체에 중대한 결손을 일으킨 현재를 인정하는 사람들. 침묵에 잠긴 여자와 암흑에 갇혀가는 남자는 묵묵하게 자기 조건을 견디고, 결핍의 예후와 삶의 다음 단계를 기다린다. 각자의 최선을 적극적으로 이행한다. 희랍어를 강의함으로, 희랍어를 수강함으로 자기 연민과 타협하지 않는다. 돌파하고자 애쓴다.

 

쓸모가 가치판단의 상당한 기준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지만 무용한 사어인 희랍어가 위협하는 칼을 넘어설 연장으로 등장한다. 갈고 닦아도 소통에는 불필요하다. 낯설고도 난도 높은 언어를 익히기 위해 쉽지 않는 단련의 시간을 지불하고 원하는 목적을 기대한다는 게 합리적인가. 그러나 소설은 일말의 가능성을 향해 몰입하고 집중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영리하지 못해 보이는 행동을 밀고 나간다고 환경이 편안한가, 아니다. 소설은 삶이 건넨 마땅치 않고 불합리하며 억울한 조건들을 대하는 태도, 맞서는 결심을 먼 거리에서 조망한다. 시간에 자취를 남기며 도달한 현재를 미화하지 않은 채 수용한다. 그런 일은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지 않는다. 긴장하고 의지를 세워 만든 결단의 기둥이 하루 이십 사 시간에 촘촘히 박혀있다. 잠시 호흡이 부드러워지는 순간이라면 남자는 여동생 란에게 편지를 쓸 때, 여자는 아이를 기억할 때다. 힘을 북돋게 하는 절대 대상과 치유 불가한 상처의 원인 제공자가 가족이라는 동일한 굴레 안에 존재한다. 행간이 넓은 소설은 가족의 이야기, 드러나는 폭력과 폭력 아닌 얼굴을 한 폭력의 이야기, 태도와 관계와 연결, 선택과 책임, 삶의 지향 등 질문으로 가득하다. 인생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처한 비극에 일정 부분 저항하고, 일정 부분 수용하는 균형을 보여준다. 이상적이지는 못해도 근접하려는 노력은 치열하고, 관조할 때조차 배려가득하다.

 

여자와 남자 두 주인공에게서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세계 문학사의 천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특징을 만나는 일도 놓칠 수 없다. 모국어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먼저 사용했던 유년기 이중 언어체험이나 9세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신문에 투고했던 보르헤스의 민감한 언어 감각을 여자에게서 본다. 가계의 유전적 질환으로 시력을 거의 잃고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읽을 수 없는 장서의 우주를 거닌 노후의 보르헤스를 남자에게서 발견한다.

 

작가 특유의 아름다운 묘사는 물론 시간과 공간과 화자가, 대화와 서술이 엇갈리고 교차하는 배치는 천천히 깊이 읽도록 이끈다. 적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과 화제 이동도 인상적이다. 꾹꾹 눌러쓴듯한 묵직함이 온전히 전해진다. 언어가 작품의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 병아리의 죽음, , 나무, , , 눈을 비롯하여 이후 한강 소설에서 만나게 될 편린이 단초처럼 자리 잡고 있는 점도 시선을 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라는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시적인 산문의 결이 움트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수식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아끼는 한강의 작품이 될듯하여 기쁘다. ‘그것은 침입하듯 갑자기 오기도, 경고의 북을 치며 포위하듯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발을 내딛기로, 감은 눈을 뜨기로, 처음인 듯 목소리 내기로 결단하는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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